이 세령에게 답하다 答李 世寧
지난해 이사 가던 날 손잡고 전송하지 못하고 지난 가을 제가 서울에 들어갔을 때도 나아가 회포를 펴지 못했으니, 앞의 일은 오히려 말없이 떠난 형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겠지만 뒤의 일은 스스로 해명할 만한 말이 없습니다. 양해의 여부는 형의 아량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겠으나, 여러 차례 풍범을 뵙지 못하는 동안 백발이 성성해졌으니, 시인이 “군자를 보지 못한지라, 아침을 굶은 듯 허전하네.[未見君子 惄如調飢]”라고 노래한 심회를 절로 금치 못했습니다.
전혀 뜻밖에 편지를 보내주시니, 성대한 정성과 빛나는 문장이 편지를 읽자 저로 하여금 마음을 씻고 정신을 차리게 했습니다. 이미 계교치 않으시는 성대한 뜻에 감격했고 또 먼저 편지를 보내지 못한 것이 부끄러운데, 이 감격과 이 부끄러움 가운데 무엇이 더 큰지를 모르겠습니다.
밤이 몇 번이나 돌아오고 해가 새로 바뀌었는데, 편안히 수양하시는 절도가 새해를 맞아 더욱 아름다우며 가정에 가득한 자제들이 아침저녁으로 잘 모시고 기쁘게 해드리며, 집 밖의 눈바람을 견딜 만하여 때때로 강조(腔調)를 불러 높이 솟은 불평한 기운을 누르시는지요? 이것으로써 구구하게 송축합니다.
저는 한 살이 또 더해져 온갖 감회가 서로 이르는데, 평생을 돌아보니 세상사 이룬 일은 하나도 없이 다만 한 사람의 늙은 중 같은 신세가 되어 천장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쉴 뿐이니 오히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오히려 하나의 정신이 고요한 밤 잠들지 못하는 즈음에 맑아져 다만 강구(康衢)의 노래를 한 번 불러보기를 원하지만, 황하가 맑아질 날은 아득하기만 하고 노경(老境)은 어느덧 또 이릅니다. 이러한 심사는 모르는 이와는 말하기 어렵고, 오직 그대 또한 내 뒤를 따르는 사람이니 어찌 이러한 선배의 고충을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는다면 한 번 크게 웃을 것입니다.
보내온 편지에서 누누이 많이 한 풍자의 말에 필력이 호방하고 의취가 웅건하니, 여전히 장성한 시절 영민한 기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까?
이렇게 오랜 벗들이 새벽별 사라지듯 세상을 떠나는 지금 살아 있는 사람 또한 강호(江湖)에서 서로 잊은 형국이 되었으니, 형이 나를 꾸짖는 것은 실로 마땅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손바닥 뒤집듯이 한다.”라고 한 말씀은 실로 저의 나태한 습성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감히 기꺼이 감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일이 있으니, 연전에 우리 고을의 네 분 선열(先烈)을 한꺼번에 함께 존봉(尊奉)하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일의 국면이 전과 달라져 석주(石洲) 일송(一松) 두 공의 존봉은 이미 차례대로 거행되었으나 오직 동산(東山) 어른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으니 실로 개탄할 만합니다. 사력(事力)에 구애되어 일을 크게 벌이기에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겨우 남은 유문(遺文)에서 이 어른의 방불한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이곳의 여러 벗들과 출판하는 일을 논의하는 차인데, 형은 먼 곳에 있어서 함께 일할 수 없으니 한스럽습니다. 서울에도 또한 간간이 평소 친하게 지내는 벗들이 있을 것이니, 모름지기 널리 채집하여 극력 성원해주시는 바탕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일에 따라 지도해주기를 바랍니다.
군자를……허전하네 : 이 시는 《시경》〈주남(周南) 여분(汝墳)〉에 보인다.
강조(腔調) : 악곡의 성률(聲律). 성율로 말하면 조(調)라 하니, 궁조(宮調) 상조(商調)와 같은 것이고, 발성으로 말하면 강(腔)이라 하니 진강(秦腔) 곤강(崑腔)과 같은 것이다.
강구(康衢):네 방향으로 난 길을 강(康), 다섯 방향으로 난 길을 구(衢)라고 한다. 요(堯)임금 시절에 백성들이 태평을 구가하여 강구에서 노래하였다.
노경(老境) : 원문의 ‘유경(楡景)’을 풀이한 말이다. 서방에 해가 지는 곳을 상유(桑楡)라고 한 말에서 일모(日暮), 또는 만년(晩年)의 때를 비유한다. 반대로 해가 뜨는 곳을 동우(東隅)라고 하는데, “동우에서는 잃었으나 상유에 수습한다.[失之東隅, 收之桑楡.]”라는 말이 있다. 《後漢書 卷17 馮異列傳》
석주(石洲) :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호이다. 자는 만초(萬初),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의 문인이다. 류인식(柳寅植, 1865∼1928), 김동삼(金東三, 1878∼1937) 등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여 1907년 안동 임하(臨河)에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였다. 1909년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를 결성하여 회장을 맡았다. 이 해에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김형식(金衡植) 등이 만주로 떠나자 양기탁(梁起鐸)과 협의 후 1911년 2월 서간도로 망명했다. 1911년 최초의 만주지역 항일자치단체로 개간과 영농에 종사하는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여 사장에 추대되고, 그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했다. 1912년 경학사를 발전시켜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교포들의 자치기관인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신흥강습소도 이전하여 제2의 기지를 정했다. 저서로는 《석주집》이 있다.
일송(一松) : 김동삼(金東三, 1878∼1937)의 호이다. 초명은 긍식(肯植), 자는 한경(漢卿),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의 문인이다. 1907년에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개화교육에 힘쓰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여러 동지들과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1918년 서일(徐一)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39인이 민족대표로서 연서한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22년 민족 단일의 독립운동단체인 통군부를 조직하고 교육부장에 임명되고, 통의부가 조직되자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31년 하얼빈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동산(東山) : 류인식(柳寅植, 1865∼1928)의 호이다.
백저 배동환(白渚 裵東煥) 著, 김홍영·이미진 역, 학민출판사(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