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 (食口)란
식구(食口)라는 개념은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야 할터인데, 오늘날 진정 옛날과
같은 가족 애를 느끼며 살아가는 식구란게 있기는 할까? 가슴을 따뜻하게
적시는 우리의 단어 "식구"가 그립고, 그 시절을 그리워 한다.
가족은 영어로 패밀리(family)다. 노예를 포함해서 한 집안에서 생활하는
모든 구성원을 의미하는 라틴어 파밀리아(familia)에서 왔는데
즉, '익숙한 사이' 라는 의미이다.
중국은 일가(一家), 일본은 가족(家族)이란 용어를 주로 사용하는데
즉, 한 지붕 밑에 모여 사는 무리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식구(食口)라는 말을 주로 사용해 왔는데 "같이 밥 먹는 입' 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에게는 가족이란 '한 솥 밥을 먹는 식사 공동체" 라는
뜻이다. 그래서 남에게 자기 아내나 자식을 소개 할 때도
'우리 식구' 란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한 집에 살아도 한 상(床)에 밥을 먹지 않거나, 식사를 할
기회가 없다면 엄밀히 말해서, "핏 줄"이기는 해도 '식구' 랄 수는 없다.
최근 한국 가정의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는 것은 가족 간에 식사를 같이
하지 않는 풍조가 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몇 년 전 뉴스에 나온 고된 이민 생활 속에서도 여섯 남매를 모두 예일대와
하버드대에 보내, 미국 최고 엘리트로 키운 전혜성 여사도 자녀 교육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 식사는 가족이 함께 했다" 며
"밥상 머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요즈음, 우리 생활을 들여다 보면, 실제로 식구가 얼굴을 맞대고 대화 할 수
있는 기회가 밥상 머리 뿐인데 오늘 날 우리나라 가정에서는 온 식구가 한
밥상에서 같이 식사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버지의 출근 시간과 자식의 등교 시간이 다르다 보니, 각 자 일어나자
마자 허둥지둥 밥을 먹는둥, 마는둥, 또는 우유 한 잔 서서 마시고 나가기
일쑤고, 저녁 귀가 시간도 각 자 달라 저녁 식사를 한 식탁에서 하기는 커녕,
언제 귀가 했는지도 서로가 모르고 각 자 방에서 잠 자기 바쁘다. 이러한
일상의 연속이니 "밥상 머리 교육" 은 고사하고, 어떤 때는 며칠간
얼굴 못 볼 때도 허다하다.
1970 년대만 해도, 대부분의 가정이 늦게 귀가하는 식구를 위해 아랫목이나
장롱의 이불 속에 밥을 묻어 두곤 했는데 밥의 온도는 곧 사랑의 온도였다.
자식이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어머니는 뜨끈한 국과 따뜻한 밥을 챙겨 주셨다.
그러나 요즈음은 전기 밥솥이 그 자리에 대신 놓여 있고, 라면 등 몸에 좋지
않은 인스턴트 제품이 집집마다 있어 필요 할 때면 밤 중에라도 각 자
알아서 처리하게끔 배려(?) 되어 있다.
요즈음, 밤 늦게 들어와 아내에게 "밥 상 차리라" 고 했다간 "이 시간까지
밥도 못먹고 어딜 돌아 다녔느냐?" 고 핀잔을 듣기 십상이고, "부엌에
라면 있으니 끓어 먹으라" 고 한다. 느닷없이 소낙비 오는 밤, 버스 정류장에
우산을 받쳐 들고 언제 올 줄도 모르는 식구를 기다리는 그 많은 모습을
요사이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요즈음 주부들의 태반이 나름대로 직장과
할 일을 갖고 있으니,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어도 현실이 그렇다.
자식이 뭐 좀 해달라는데 해주지 못했을 때는 "고개 숙인 부모" 를 향해
자식은 "도대체, 해 준게 뭐 있느냐" 고 따지고 들 때도 있다.
옛날에는 아내와 자식이 가장의 위압적인 언사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고
하지만 요즈음 가족들이 던지는 무심한 투정 한 마디에 가장의 속 마음에
피 멍이 들 때가 있다. 단지, 자기 소치인냥 말하지 않고 지낼 뿐이다.
그 누가 말했던가? 오늘 날 아버지는 "울고 싶어도 울 곳이 없는 사람" 이
바로 '아버지' 라고 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아버지는 직업 형편 상 귀가하는
시간이 대체로 늦다. 그래서 식구들이 가장을 기다리다가 먼저 잠 자는
경우가 많다.
어쩌다, 아이들이 깨어 있더래도 컴퓨터나 휴대 전화에 정신이 팔려
제 방에서 건성으로 인사만 건넨다. 그러니 밥상 머리 교육이나 대화는
기대하기 힘들고, 나아가 얼굴은 자주 못 보더래도 서로 각 자의 시간과
생활은 간섭이나 침범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찬 바람 불듯
집 안 분위기를
냉각시킨다.
평소 눈길 한 번 준 일 없던, 애완견 만이 한 밤중에 쓸쓸히 반갑게 맞아
주는 진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품 안의 자식 대하듯 애완견 재롱에
푹 빠진 가장을 보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이 밀려온다. 한 집에 살지만
잠 만 집에서 자는 동거인에 불과해진 오늘날 한국 가족의 현실이 서글퍼진다.
오늘날 또한 우리에게는 생가(生家)라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주소 ㅇㅇㅇ
번지, 부모가 살고 있는 집에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태어나고,
돌 잔치, 생일 잔치 모두 레스토랑이나 호텔에서 갖는다. 그러다가 회갑,
칠순 잔치도 집 밖에서 하며, 죽을 때도 병원에서 죽으니 이러고 보니
생가가 없다. 전부 다 집 밖이다.
조상과 부모의 체취가 어려있고, 나의 첫 울음 소리를 내 품었던 집은
이제 찾아 보기 힘들다. 이렇게 볼 때 엄밀한 의미에서 나의 생가,
나의 고향은 어디인가? 요즈음 가족 잔치는 집에서 손수 장만하고,
따뜻한 정이 오고, 갔던 그런 분위기가 아니고, 집 대신 외부의
음식점이나 호텔로 손님을 초대하는 사실 상 "체면 흥행 이벤트" 로
변질되어 버렸다.
정진석 추기경도 최근의 "가정은 신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마련된
성소이니 물질의 노예, 정보의 노예가 되지 말고 가정 안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라" 고 한 말은 의미가 있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보면 가족과
가정의 해체는 결국 식구의 소멸과 집의 부재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대와 사회가 아무리 변해도 자식이 결혼으로 분가하기까지는
가급적 한 집에서 식구들과 지지고, 볶는 생활을 갖는 것이 진정한
식구이며, 삶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요즈음 우리에게 식구란게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