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북한)의 언어정책, 외래어 오용과 국적 불명 ‘잡탕말’(이재봉)
앞에서 말했듯 남한에서는 외래어 남용으로 우리말은 토씨만 남는 형편이라며 서울 표준어가 ‘잡탕말’이라고 북한 김일성이 매도한 게 1966년이었다. 무려 60년 전이다. 1990년대부터 거세게 불어닥친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거치면서 외래어 범벅이 얼마나 더 극심해졌겠는가. 외래어 남용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오용이다. 영어단어처럼 생겨서 영어로 착각하고 쓰는 말엔 영어가 아닌 잡탕말이 많으니 영어 공부에도 혼란을 줄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잡탕말 가운데 으뜸이 ‘핸드폰’일 것이다. 초등학생들도 쓰는 등 누구에게나 필수품처럼 돼버렸다. 영문으로 ‘hand phone’으로 표기하니 영락없는 영어 같지만 영어권에서는 쓰지 않는다. 미국에선 흔히 ‘cellular phone’, 또는 줄여서 ‘cell phone’이라 하고, 영국에선 대개 ‘mobile phone’이라 한다. 더구나 ‘phone’은 제대로 발음하기도 어렵다. ‘ph’는 ‘f’처럼 우리 발음엔 없어서 ‘p(ㅍ)’와 구별하기 위해 윗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줘야 하니, 한국인들은 엉터리 영어를 잘못 발음하기 쉽다. 우리말로 ‘휴대전화’나 ‘이동전화’라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핸드폰’과 관련해 내가 겪었던 어이없는 얘기 두 토막 전한다. 1996년 대학교수로 취직할 무렵 호출기(비퍼, beeper)가 널리 보급됐다. 학생들이 ‘삐삐’라 부르며 요즘 휴대전화처럼 거의 필수품으로 여겼다. 2000년 전후로 호출기가 휴대전화기로 대체됐다. 난 호출기든 휴대전화든 장만하지 않아 동료 교수와 학생들 포함 주변 사람들에게서 연락하기 어렵다는 불평을 많이 들었다. 농담 삼아 사주고 싶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2000년대 초 한 정치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는데 주최 측에서 참가자들에게 연락처를 적어달라며 종이 한 장을 돌렸다. 하필 내가 맨 앞줄에 앉아 가장 먼저 받았다. 이름, 전화, H.P, 이메일이 위에 적혀 있었다. H.P가 뭘까 머뭇거리다 홈페이지(homepage) 주소를 썼다. 한 바퀴 돌고 나에게 되돌아온 종이를 받아보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 놓은 게 아닌가. 휴대전화를 갖지 않고 ‘핸드폰’이란 말을 쓰지도 않던 터라 H.P가 ‘hand phone’의 약자로 쓰이는 걸 모르는 멍청이가 돼버려 머쓱했다.
그 무렵 어느 해 5월 교육부에서 <스승 찾기 운동>을 벌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 몇 분을 찾아뵙고 싶었다. 고교 1학년 때 날 몹시 사랑해주며 <우리말 바로쓰기 운동>으로 이끌어준 국어 선생님이 1순위였다. 시인 교사였는데 일주일 정도 날 데리고 서울 주요 관공서 등을 돌며 맞춤법에 어긋나는 표기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를 정리해 어느 월간지엔가 글을 실으며 내 이름도 올려주었다. 텔레비전(TV) 출연도 함께 했다. 상고 1년생이 월간지에 이름을 싣고 TV에도 나갔으니 엄청 출세한 셈이었다. 거의 50년이 흐른 뒤 선생님 댁에서 다시 만났다. 대학 진학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직장을 잡았던 상고 출신이 어찌어찌 대학에 들어가 미국 유학까지 마치고 대학교수가 됐다는 말에 놀라움과 감탄을 쏟아냈다. 반세기 추억을 담은 정겨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선생님에게서 ‘핸드폰’이란 말이 나왔다. 즉각 따지듯 물었다. “아니, 선생님께서도 ‘핸드폰’이란 말을 쓰세요?” “핸드폰이 왜?” “1971년 선생님께서 저에게 우리말 바로 쓰기를 가르쳐주셨잖습니까. 저는 선생님 지도로 지금까지 맞춤법에 신경쓰며 글쓰고, 엉터리 외래어 쓰지 않으며 될수록 우리말 쓰고 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선생님 태도에 놀라움과 실망을 감추기 어려웠다.
2003년 10월 큰형님이 돌아가셨는데 나에게 급하게 전화로 알리지 못해 난처했다는 가족들의 불만과 핀잔에 어쩔 수 없이 나도 휴대전화를 마련했다. 물론 ‘핸드폰’은 영원히 꿈속에서도 쓰지 않는다.
‘핸드폰’ 못지않게 널리 쓰이는 영어 같은 잡탕말이 ‘핸들’을 포함한 자동차 관련 말들이다. ‘핸들(handle)’, ‘백미러.빽밀러(back mirror)’, ‘크략선.클랙슨(klaxon)’ 등은 영어권에서 쓰지 않는다. ‘핸들(handle)’은 ‘손잡이’라는 뜻인데, 자전거 운전대는 영어로 ‘handlebar’라 하지만 자동차 운전대는 ‘steering wheel’이다. 운전대 위에 달린 거울을 흔히 ‘빽밀러’라고 하지만 ‘뒤쪽을 보는 거울’이란 말 그대로 ‘rear-view mirror’가 진짜 영어다. ‘크략선.클랙슨(klaxon)’은 ‘빵빵’ 울리는 장치를 만든 회사.상표 이름에서 온 말인데 ‘경적’은 영어로 ‘horn’이다. 차동차 앞쪽 양옆에 달린 거울을 ‘사이드미러(side mirror)’라고 부르는데, 이는 미국인들도 쓰긴 하지만 ‘옆쪽을 보는 거울’이란 뜻의 ‘side-view mirror’가 정확한 영어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핸들’, ‘백미러’, ‘클랙슨’, ‘사이드미러’ 등은 모두 올라있다. ‘운전대’, ‘후사경(後寫鏡)’, ‘경적’도 올라있다. ‘옆거울’이나 ‘측면거울’ 같은 우리말 단어는 올라있지 않은데 말이다. 잡탕말이라도 관용어로 굳어져 표준말이 됐는데 우리말은 아예 없으니 우리가 우리말에 얼마나 소홀했을까.
참고로, ‘거울(mirror)’의 철자에 ‘r’이 두 개 연달아 있으니 한글로 ‘ㄹ’을 두 개 써 ‘밀러’로 발음.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름(summer)’을 ‘섬머’나 ‘썸머’로, ‘달리기(running)’를 ‘런닝’으로 소리내고 적는 것과 비슷한데 이는 잘못이다. 알파벳 ‘m’, ‘n’, ‘r’ 등은 두 개 잇달아 있어도 우리말로는 대개 ‘ㅁ’ ‘ㄴ’ ‘ㄹ’ 하나로 발음된다. 굳이 한글로 표기하면 ‘미뤄’나 ‘미러’, ‘서머’나 ‘써머’, ‘러닝’ 등이 비슷한 발음일 것이다. 정반대로 알파벳 ‘l’은 단어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우리말로는 흔히 ‘ㄹ’이 두 번 발음.표기된다. 몇 가지 쉬운 단어로 비교하면, ‘borrow’와 ‘terror’는 ‘r’이 둘 있어도 ‘바(보)로우’와 ‘테러’처럼 ‘ㄹ’이 한 번 발음.표기되지만, ‘blue’나 ‘telephone’은 ‘l’이 하나 있어도 ‘블루’와 ‘텔레포운’ 같이 ‘ㄹ’이 두 번 발음.표기된다.
아마 2000년대부터 유행처럼 번진 ‘스킨십(skinship)’이란 말도 ‘피부 접촉’을 뜻하는 영어가 아니다. 20여년 전 내가 잘 아는 교수의 딸이 미국 유학을 준비한다며 나에게 영문 추천서를 부탁했다. 서울의 유명 사립대학 영문학과 졸업 예정자였다. 그에게 먼저 미국 대학원에 보낼 자기소개서를 나에게 보내달라고 했다. 유아교육학을 전공하려는 동기를 설명하며 아이들과의 ‘skinship’을 즐긴다고 했다. 영문학도조차 영어처럼 생긴 잡탕말을 영어로 착각했던 것이다. 미국에서 석사.박사 과정 잘 마치고 지금은 훌륭한 교수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요즘 많은 사람이 건강 챙기느라 ‘헬스클럽(health club)’에 나가 ‘러닝머신(running machine)’ 위에서 운동하는 모양이다. 영어권에도 호화로운 ‘health club’이 있긴 하지만, 실내 운동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일반적 영어 표현은 우리가 흔히 ‘체육관’으로 번역하는 ‘gymnasium’의 준말 ‘gym’이다. 아파트나 호텔 등에 있는 운동시설은 대개 ‘fitness center’라 불린다. ‘gym’이나 ‘fitness center’에서 사람이 달리는 운동기구는 영어로 ‘running machine’이 아니라 ‘treadmill’이다.
이 밖에 ‘부정행위(cheating)’를 뜻하는 ‘커닝.컨닝(cunning)’, ‘격려.응원(Good luck, Let’s go)’을 가리키는 ‘파이팅(fighting)’, ‘공짜.무료(free)’를 의미하는 ‘서비스(service)’ 등 영어처럼 생겼어도 영어가 아닌 잡탕말은 아주 잘 알려져 있기에 설명은 생략한다. ‘휴대전화’, ‘운전대’, ‘공짜.무료’ 같이 쉬운 우리말을 쓸 수 있다면 굳이 잡탕말 만들어 쓰지 말자. 국제화 또는 세계화 시대에 한마디라도 영어 쓰고 싶으면 ‘cell phone’이나 ‘mobile phone’, ‘'steering wheel’과 ‘free’ 같은 진짜 영어를 정확하게 발음하는 게 바람직하다. 영어를 제대로 알거나 발음하지도 못하면서 유식한 체 쉽고 순수한 우리말을 촌스럽다고 비웃거나 폄하하는 짓이야말로 조롱과 경멸을 받아야 할 한심스러운 일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