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북한)의 언어정책, 외래어 오용: 기막힌 조어, 잘못된 순서, 엉뚱한 줄임, 불필요한 중복(이재봉)
1) 기막힌 조어
난 많은 사람이 열광하는 축구나 야구 경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월드컵 경기나 올림픽 경기도 거의 보지 않는다. 그러나 신문.방송 머리기사 등을 통해 축구선수 손흥민이 ‘멀티골’을 터뜨리고, 야구선수 이정후가 ‘멀티히트’를 기록하는 등의 활약은 대충 안다. 이런 기사를 접할 때마다 ‘멀티(multi)’라는 말에 짜증이 난다. ‘multi’는 ‘many’의 뜻을 지닌 접두사다. 하나나 둘이 아니라 셋 이상의 다수를 가리킨다. ‘두 개의 골’을 ‘멀티골’이라거나 ‘두 개의 안타’를 ‘멀티히트’라고 하면 어색하다. 마치 진짜 영어처럼 보이는 잘못된 조어(造語)를 쓸 게 아니라, ‘두 골’이나 ‘세 골’을 넣었다든지, ‘두 개의 안타’나 ‘세 개의 안타’를 기록했다는 등으로 쉽고 정확하게 보도할 수 없을까? 세 개 이상의 골이나 안타를 진짜 영어로 표현하면 ‘multiple goals’나 ‘multiple hits’가 될 것이다. ‘multiple’ 대신 ‘several’을 써도 될 것이고.
몇 년 전 한 길거리의 현수막을 보고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어느 단체에서 두 번째로 무슨 체육대회를 여는 모양이었다. ‘제2회 체육대회’라고 쓰면 좋을 걸 영어로 멋 좀 부리려 했는지 ‘2th 체육대회’라고 표기했다. ‘2th’는 기막힌 조어다. 첫째(1회), 둘째(2회), 셋째(3회) 등 순서를 영어로 쓸 때는 first, second, third 등으로 표기하는데, 이를 1st, 2nd, 3rd 등처럼 줄여 쓰기도 한다. fourth, fifth 등 넷째부터는 대개 뒤에 ‘th’로 끝나기 때문에 4th, 5th 등처럼 숫자 뒤에 ‘th’를 붙여 쓴다. 11회(eleventh)는 11th, 12회(twelfth)는 12th, 13회(thirteenth)는 13th이지만, 21회(twenty-first)는 21st, 22회(twenty-second)는 22nd, 23회(twenty-third)는 23rd로 표기하는 식이다. 내 세대에선 중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요즘은 아마 초등학생 때 공부할 초보적 서수(序數)조차 모르면서 잘못된 영어로 유식한 체하고 싶을까.
2) 잘못된 순서
요즘 웬만한 사무실이나 가게 또는 식당 등의 출입문엔 문 여는 시간과 문 닫는 시간을 표기해놓는다. 친절해서 좋은데, ‘오전’과 ‘오후’를 왜 굳이 ‘AM’과 ‘PM’으로 잘못 표기할까. ‘AM’은 ‘before noon’이라는 뜻의 라틴어 ‘ante meridiem’의 약자고, ‘PM’은 ‘after noon’을 가리키는 ‘post meridiem’의 약자인데, 시각을 나타내는 숫자와 쓰려면 뒤에 붙인다. 한국어로 ‘오전 9시’가 영어로는 ‘a.m. 9’이 아니라 ‘9 a.m.’이고, ‘오후 6시’는 ‘p.m. 6’이 아니라 ‘6 p.m.’이다. 어려운 라틴어를 잘 못 쓸 것 없이 쉬운 우리말 ‘오전’과 ‘오후’로 쓰면 좋지 않겠는가.
이와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다. 책의 쪽수를 가리킬 때 우리말로는 ‘7쪽(페이지)’이라 써도, 영어로는 ‘7p’가 아니라 ‘p.7’으로 표기하는 게 옳다. 책 ‘3장(章)’은 ‘3 chapter’가 아니라 ‘chapter 3’로 써야 정확하고. 테니스, 배드민턴, 탁구 경기 등을 중계할 때 ‘첫 번째 경기’나 ‘두 번째 경기’를 ‘1 game’이나 ‘2 game’으로 표기하는 것도 어색하다. ‘game 1(one)’이나 ‘game 2(two)’라고 써야 바르다. ‘제1차 세계대전’을 영어로 ‘the first world war’로 쓰거나 ‘world war one(I)’으로 표기하듯 말이다. 100달러를 ‘100 dollars’로 쓰지만, 기호를 쓰려면 ‘100$’가 아니라 ‘$100’가 더 좋다.
3) 엉뚱한 줄임
우리는 줄임말을 좋아한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놈’이란 뜻의 ‘듣보잡’과 ‘갑자기 툭 튀어나오다’를 줄인 ‘갑툭튀’도 국어사전에 버젓이 올라있다. 언어의 경제학이라고 해야 할까. 외래어 역시 마찬가지다. 영어로 돼 있기에 진짜 영어로 착각하면 곤란할 뿐이다. 요즘 웬만한 식당에 가면 “추가 반찬은 셀프입니다”라는 글귀를 보게 된다. 정수기 위에 ‘self’라고만 써 붙여놓기도 한다. ‘셀프 주유소’도 많다. 종업원 부르지 말고 자기가 갖다 먹거나 자신이 직접 기름을 넣는 등 ‘자기 스스로 봉사하다’는 뜻의 ‘self-service’란 말에서 ‘봉사(service)’는 떼버리고 ‘자기(self)’만 남긴 말이다.
한국엔 현수막이 넘친다. 무슨 행사엔 필수품처럼 돼버렸다. 선거철이면 큰 건물은 현수막으로 도배되다시피 한다. 많은 사람이 ‘현수막’이란 우리말 대신 이상한 영어 ‘플랑’을 많이 쓴다. 진짜 영어로는 ‘placard’이니 ‘플래카드’로 쓸 수 있다. ‘placard’엔 ‘n’이나 ‘ng’가 없는데 ‘플랑카드’, ‘플랜카드’, ‘프랑카드’ 등으로 부르는 이유를 모르겠고, 이런 엉터리 말조차 ‘플랑’이나 ‘프랑’ 등으로 줄여 쓰고 있으니 너무 엉뚱하다.
줄여 쓰는 것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남자 화장실 입구에 ‘gentle’이라는 글까지 본 적이 있다. ‘gentleman(신사)’이라는 말에서 ‘남자(man)’를 빼고 ‘부드럽거나 점잖은’ 뜻의 ‘gentle’만 써놓은 것이다. 줄이려면 ‘man’이나 ‘men’으로 쓰고, 공간이 부족하면 남자 모습만 그려놓으면 되는데. 요즘은 재봉틀을 구경하기 쉽지 않은데, 재봉틀을 ‘미싱’이라 부른다. ‘재봉.바느질 기계’를 의미하는 ‘sewing machine’에서 ‘재봉.바느질’을 가리키는 ‘sewing’은 없애버리고, ‘기계’를 가리키는 ‘머신(machine)’만 남겨 ‘미싱’이라 부르는 것이다. 일본어 영향 때문인데, 일본어 잔재나 악영향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아파트먼트(apartment)’를 ‘아파트(apart)’로, ‘침실 하나짜리 아파트먼트(one-bedroom apartment)를 ’원룸(one-room)’으로, ‘에어 컨디셔너(air conditioner)’를 ‘에어컨(aircon)’으로, ‘리모트 컨트롤러(remote controller)’를 ‘리모컨(remocon)’으로,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를 ‘인프라(infra)’로, ‘원피스 드레스( one-piece dress)’를 ‘원피스(one-piece)’로, ‘스킨 로션(skin lotion)’을 ‘스킨(skin)’으로 엉뚱하게 줄여 부르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4) 불필요한 중복
언어의 경제학은 좋지만 외래어를 엉뚱하게 줄이는 것은 곤란한데, 거꾸로 불필요하게 늘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게 ‘풀장’이다. ‘pool’은 ‘수영장’이란 뜻이다. ‘수영장’이란 우리말이 맘에 들지 않으면 영어로 ‘풀(pool)’로 부르면 된다. ‘풀’만 쓰기 허전하면 ‘스위밍 풀(swimming pool)’이라 하든지. 쓸데없이 ‘장(場)’을 붙일 필요 없다는 뜻이다. ‘프린터(printer)’가 ‘인쇄기’라는 뜻인데 ‘프린터기(機)’라고 부르거나, ‘머그(mug)’가 ‘손잡이 달린 컵.잔’을 가리키는데 굳이 ‘잔(盞)’이란 말을 덧붙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불필요한 중복은 ‘역전앞’, ‘초가집’, ‘고목나무’, ‘해변가’, ‘야밤’ 등 한자어로 된 우리말에 많은데 이 역시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