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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다루는 역사가의 태도에는 두 극단이 있다. 하나는 역사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깎을 것은 깎고 보탤 것은 보탠 공자의 ‘춘추필법’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 그 자체가 말하게 함으로써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보여준다는 ‘랑케필법’이다”(232면)
저자가 말하는 ‘춘추필법(春秋筆法)’이란 공자(孔子)가 저술한 <춘추(春秋)>에 반영된 역사 서술의 방법으로, 엄정하고 비판적인 태도로 대의명분을 분명히 밝히는 서술태도를 일컫는다. 문제는 공자처럼 엄정한 태도를 지닌다면 이러한 서술이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역으로 ‘역사가에게 해석이라는 칼로 사실을 난도질할 권리’를 부여했다는 주정적 평가도 제기될 수 있다. 대체로 동양에서는 이러한 태도가 역사를 인식하고, 서술하는 방법론으로 일찍부터 자리를 잡아왔다. 이에 반해 ‘랑케필법’은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다양한 문헌에 근거를 두고 역사를 서술하기에 저자는 ‘실현불가능하며 설사 가능하다 해도 의미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실상 역사를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역사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흔히 역사를 인지하고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을 일컬어 '사관(史觀)'이라고 하는데, 동일한 사건이라고 해도 그것을 하나의 역사로 기술할 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의해 전혀 상반된 평가가 내려질 수가 있다. 역사 해석의 문제는 단지 서술의 차이에 그치지 않고, 후대에까지 지속적으로 그 영향력이 미치기 때문에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경제 발전을 위한 일본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관점과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 투쟁의 과정’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지금의 우리의 현실을 인식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를 인식하고 바라보는 역사관은 단지 역사가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역사 서술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하여 동양과 서양의 중요한 역사서에 대해 소개하면서, 모두 15명의 역사가와 그들이 남긴 역사서들을 모두 9개의 항목에 걸쳐 서술하고 있다. 제1장은 ‘서구 역사의 창시자’로서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중심으로 논하고 있다. 저자는 이들이 서양에서 역사의 창시자 대접을 받는 이유가 그들의 저서 속에 담긴 ‘서사의 힘’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들의 저서에는 ‘독자가 지적 자극을 받고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서사’가 담겨있기에, ‘그렇게 오래 그리고 널리 읽혔을’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2장에서는 사마천의 <사기>를 대상으로 ‘사마천이 그린 인간과 권력의 시대와 풍경화’라는 제목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전까지 역사는 시간의 순서대로 기록하는 ‘편년체’로 기술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사마천은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기술하는 ‘기전체’로 역사를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히 사마천의 <사기>는 단순한 역사기록이 아니라, 사료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문학적 상상력’을 더해 인문학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유가(儒家)에서는 공자의 <춘추>를 하나의 경전으로 다루고 있지만, 동양을 대표하는 역사서로써 사마천의 <사기>를 내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3장에서 아랍 출신 역사가인 이분 할둔을 다루면서, 그가 ‘최초의 인류사를 썼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논하고 있다. 이와 함께 4장에서는 ‘랑케필법’으로 지칭되는 랑케를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기술한 점을 특징으로 들고 있다. 또한 역사가는 아니지만 ‘역사적 유물론’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도 저자의 서술 범주에 포함되며, 5장에서 ‘역사를 비껴간 마르크스의 역사법칙’이라는 제목으로 다루고 있다. 마르크스의 저술은 역사서가 아니지만, 그가 네세웠던 ‘유물론, 변증법, 유물사관’ 등은 지금까지도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다. 즉 그동안의 역사서가 기존의 사건들을 ‘해석’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마르크스는 오히려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6장에서는 박은식과 신채호 그리고 백남운을 대상으로 근대에 활동했던 우리의 역사가들을 ‘민족주의 역사학의 고단한 역정’이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이들은 한말로부터 일제 강점기 동안에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민족주의 역사학’을 체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인식한 신채호의 역사관은 당대의 현실을 바라보는 매우 유효한 인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7장에서는 여전히 학생들의 필독도서 목록에 올라있는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저자는 이 책이 ‘평범한 역사 이론서가 아니’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지식인 사회가 도달한 최고 수준의 지성을 보여’주는 책이라 설명한다. ‘역사란 역사가에 의해 선택된 사건의 기술’이라는 내용은 지금도 역사에 대한 금언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때문에 ‘수많은 과거의 사실 가운데 어느 것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지, 그 사실에 얼마나 중요한 지위를 부여할 지는 역사가의 주관적 평가와 해석에 달려 있’는 것이다.
8장에서는 주로 ‘문명의 역사’를 다룬 슈펭글러와 토인비, 그리고 헌팅턴 등의 저서를 대상으로 서로 다룬 문명이 충돌하는 근대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도전과 응전’이라는 토인비의 견해나 인류 문명들 사이의 충돌로 설명하는 헌팅턴의 역사에 대한 관점이 중요한 논점으로 제기되고 있다. 마지막 9장에서는 <총 균 쇠>의 다이아몬드와 <사피엔스>의 하라리를 다루면서, ‘역사와 과학을 통합하다’라는 제목으로 이들의 저서와 관점들이 분석되고 있다. 비록 역사 전공자가 아니기에 전반적으로 깊이 있는 분석이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저자의 역사에 대한 관점이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여겨졌다. 이 책에서 역사가들의 저서를 분석하면서 다양한 역사 이론들을 소개하고 있기에, 적어도 나에게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고민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할 수 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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