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영에 모신 시아버님 성묘 길이었다. 떠날 때는 장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지더니 추풍령을 넘으면서부터 거짓말 같이 날이 활짝 개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논과 밭들이 그렇게 싱싱하고 푸를 수가 없었다. 내 마음조차 비에 씻긴 듯 상쾌했다.
마산에 이르렀을 때는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고향 고성까지 가려면 예전에는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러나 지금은 높고 굴곡이 심하던 고개에 시원하게 터널이 뚫려 20분도 채 걸리지 않고 고향 마을까지 갈수 있었다.
동구에 이르니 넓은 저수지가 여느 때처럼 우리를 맞았다. 이 저수지 자리는 원래 우리 땅이었다. 그러던 것을 오래 전에 그 밑에 있는 천수답을 위해서 시아버님이 마을에 희사한 것이다. 그와 같은 뜻으로 시아버님이 처분하신 전답과 임야가 한두 곳이 아니었다. 좋은 뜻으로 하신 일이긴 하지만 후손인 우리들로서는 한 가닥 아쉬움이 없을 수 없다. 땅 마지기라도 남겨 놓으셨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서운한 마음이 고개를 들곤 했다.
시아버님은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남겨 놓은 것이라고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족자 한 틀이 전부였다. 고향이란 말뿐이지 근거가 될 만한 땅 한 뙈기 없는 것이 섭섭해서 몇 해 전에 옛날 집 앞에 대지 한 필지를 사 두었다. 고향에 돌아와 산다는 것보다는 마음의 근거나마 마련해 두자는 생각에서였다.
갔던 김에 그동안 밀렸던 토지세를 내려고 면사무소에 갔다. 장부를 들치던 면직원은 다른 면에도 토지가 있으니 그곳에 가서 함께 내라고 했다. 너무 뜻밖이었다. 달리 토지가 있을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의아해 하면서도 면직원이 시키는 대로 이웃 면사무소로 갔다. 직원이 내보이는 토지세 고지서에는 시아버님 명의로 된 임야와 대지가 있었다.
등기부 등본을 떼러 고성 군청으로 향했다. 뜻밖의 유산이 생겨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말이 남의 이야기인줄만 알았는데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 되다니 가슴이 벅찼다. 큰 집은 기울어도 삼 년이라지 않는가. 몇 천 석씩 하던 살림인데 그 정도의 유산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싶었다. 그리 멀지 않은 군청까지의 거리가 지루하게 느껴졌다.
군청 직원이 내미는 등기부 등본에 시아버님의 명의로 된 것은 대지뿐이고 임야는 지난해 12월에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이전되어 있었다. 아니, 자손도 모르게 넘어가다니! 나는 명의 이전한 사람을 찾아 나섰다.
면사무소 뒤에 있는 산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보니 양지쪽 언덕에 농가 한 채가 나왔다. 찾아온 까닭을 얘기했더니 주인은 장롱에서 서류를 꺼내 보여 주었다. 누렇게 바랜 한지에는 붓글씨로 쓴 ‘단기 4289년’이란 낯선 연대가 나왔다. 그리고 ‘육십 환에 매도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주인은 시아버님께서 어려운 종중 살림에 보태 쓰라고 내놓으셨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돌아서는 내 발길은 힘이 없었다. 시아버님의 높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섭섭하긴 마찬가지였다. 임야는 그렇다 치고 대지가 남아 있지 않는가? 나는 마지막으로 대지에 기대를 걸었다. 몇 평이나 될까? 텃밭도 딸려 있을까? 순간 넓은 뜰에 감나무가 서 있는 반듯한 고가 한 채가 떠올랐다.
그러나 여직원이 내미는 지적도에는 ‘17평방미터’라고 찍혀 있었다. 평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계산기를 두드리던 여직원은 ‘다섯 평인데요.“라고 했다.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다. 여직원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두 손으로 움켜쥐었던 보석이 금세 모래가 되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면사무소를 도망치듯 나와 버렸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꽤 오랫동안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차츰 가라앉아 갔다. 그 ‘다섯 평의 유산’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볼 만큼 마음이 안정 되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 자투리땅의 위치라도 알아두고 싶었다. 면사무소 직원이 가리켜 준 위치는 놀랍게도 저수지 바로 밑이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큰길 옆이어서 나그네가 쉬어가기에 알맞은 장소였다. 나는 잠시 그곳에 서 보았다.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여기에 정자를 하나 지어 놓으면 꼭 알맞을 것 같았다. 거기에 시아버님이 남기신 ‘백세청풍’이란 현판을 걸어 놓으면 금상첨화일 것 같았다. 비로소 마음이 환히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시아버님이 남기신 다섯 평의 유산이 주는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푸른 들판을 지나 저수지 물 위를 넘어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유난히 시원하게 느껴졌다.
언제나 유쾌하고 넉넉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넓은 품자락에 넘치는 끼와 흥, 그리고 누구에게나 보여주시던 친화력 새삼, 아쉬운 마음과 그리움에 가슴 한쪽이 아릿해옵니다. 좀더 우리 곁에 계셔주시기를 바랐는데 이제 그리도 그리워 하던 한계주 선생님 만나 회포를 나누시고 계실까요?
첫댓글 선배님의 시아버님께서 남겨주신 다섯 평의 땅이 '백세청풍'의 풍경으로 남았듯이
윤선배님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환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도 한 마리 나비처럼 춤추고 노래하며 즐겁게 사시리라 믿습니다.
언제나 유쾌하고 넉넉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넓은 품자락에 넘치는 끼와 흥, 그리고 누구에게나 보여주시던 친화력
새삼, 아쉬운 마음과 그리움에 가슴 한쪽이 아릿해옵니다.
좀더 우리 곁에 계셔주시기를 바랐는데 이제 그리도 그리워 하던 한계주 선생님 만나
회포를 나누시고 계실까요?
글을 읽으니 평소 선생님의 모습처럼, 귀에 들리는듯 합니다.
넉넉하고 소탈한 웃음, 재치있는 춤이 또렷이 그려집니다.
사람은 가도 아름다운 글은 이렇게 보란듯 남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