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를 치다
김종웅
너를 만나러 가는데 무슨 정석의 길이 필요하랴
길 없는 길도 만들어 가는 게지
모든 건 핑게에 불과할 뿐
너와 나의 틀 안에 갇힌 저 사각의 우주
면과 면이 마주하고 있는 한
넉넉잡고 서너 번만에 너를 만날 수 있다
어느 행성에 네가 있다는 걸 알기만 하면 기꺼이
찾아갈 길 묻지 않으리라
나의 눈은 둥글어
안테나 없이도 찾아낼 테니
사랑은 이렇게 둥글어 공식보다 미묘한 방식으로
오. 그러나 세심함이여
다음에 올 길마저 마련해 두어야 하는 것을
사랑이란 늘 통증 같아
언제고 어디서고 아플 수 있다는 걸
나는 밤마다 천장에다 너를 올려놓고
너를 찾아가기 위해 각을 재며
너를 껴안을 힘 조절의 무게에 신경울 곤두세우며
정석의 길을 해체한다
시인(화자)은 당구에서 사람 살이의 이치를 깨쳐 얻는다. 사각의 당구대 안이 하나의 우주를 이루고, 거기에는 우주의 별들처럼 당구공 운행의 질서와 이치가 들어있다.
‘너를 만나러 가는데 무슨 정석의 길이 필요하랴/ 길 없는 길도 만들어 가는 게지’
당구대 안에는 공을 어디로 보내라고 표시해 주는 금이 없을 뿐더러 일정하게 정해진 정석의 길이나 방법도 없다. 그러나
‘너와 나의 틀 안에 갇힌 저 사각의 우주/ 면과 면과 면이 마주하고 있는 한’
다시 말해서 당구라는 우주에 들어, 우주의 별인 공과 맞선 사람들은 끝내 그 길의 이치와 방법을 깨쳐 얻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지만 내가 찾아내고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은 찾아내고야 만다.
사람 살이의 이치가 거기에 있다. 목표가 있는 곳에는 틀림없이 거기에 이르는 길이 있게 마련이고, 뜻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열리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느 행성에 네가 있다는 걸 알기만 하면 기꺼이/ 찾아갈 길 묻지 않으리라
나의 눈은 둥글어/ 안테나 없이도 찾아낼 테니‘
어쩌다 텔레비전에서 당구의 고수들이 이른바 스리쿠션(Three cushion)이란 걸 치는 걸 보면 그 구력이 참으로 대단하다. 신비할 정도이다. 무뇌한으로선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 길을 적중해낸다. 그건 정말 ‘어느 행성에 네가 있다는 걸’ 알고 있듯이 우주의 운행 이치를 꿰뚫고 있는 눈이 아니고는 그 길을 보아내지 못할 것 같다. 그 눈은 이미 날카로움을 넘어 우주와 통하는 둥근 눈이다. 안테나 같은 인위적인 지시나 도움 없이 스스로 그 길을 터득해 낸 것이다. 사랑의 길은 그러하다. 오묘하고 깊은 영혼에 의해 이끌어진다.
‘오 그러나 세심함이여/ 다음에 올 길마저 마련해 두어야 하는 것을/
사랑이란 늘 통증 같아/ 언제고 어디서고 아플 수 있다는 걸‘
당구를 치는 사람들은 단지 그 공을 맞추는 데만 급급하는 게 아니라, 다음 공을 칠 때의 여건을 감안해서 공을 몰아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사랑이란 늘 일회용이 아닌 영원한 것, 다음을 또 기약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을 망가뜨린 공과 앞날을 기약하지 못한 사랑은 너무도 마음 아픈 것이다. 뜻하지 않게 이러한 아픔은 ‘언제고 어디서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유념해야 하리라.
‘나는 밤마다 천정에다 너를 올려놓고/ 너를 찾아가기 위해 각을 재며/
너를 껴안을 힘 조절의 무게에 신경을 고두세우며/ 정석의 길을 해체한다‘
하루 종일 바둑을 두면 밤에 잘 때에 천정에 바둑판이 그려지듯이 당구도 그러하다. 화자는 천정의 당구대에서 당구를 친다. 각을 재고, 힘 조절을 한다. 그러나 전 신경을 몰입시키지만 기존의 방식은 다 버린다. ‘정석의 해체’다. 사랑에는 정석이 없다. 오직 진정한 참마음이 있을 뿐이다. 화자는 사랑의 길에 몰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