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하게 관심없어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아니, 내가 관심을 가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영향력 1도 없는데? 귀가 시끄럽다 못해 주가 날 지경이다. 뉴스 체널은 그냥 통과다. 어젠, tv도 재미없고, 소설 읽는데도 싫증이 나서 자꾸 서성였다. 심심한 것이다. 다른 노인들은 어떻게 하루하루를 사는지 궁금해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옛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한살 더 먹을 준비가 됐느냐고 물었다. 긴 통화는 내 쪽에서 사양이다. 그럼에도 10분넘게 수다를 떨었다. 친구도 내 필요에 의해서만 찾는다. 교회도 그렇다. 노인네가 꾸역꾸역 출석하는 것도 보기에 좋지 않다는 생각이 더 강하면 방학이다 뭐다하며 빠지고, 아니다 싶으면 불필요한 성실을 내세운다. 나야말로 변덕이 심하고, 꼬일대로 꼬여서 대책이 없는 사람 아닌가 싶다. 나는 외로워 하면서도 남의 외로움에 대해서는 주책이라고 성숙하지 못하다고 비난한다. 이정도면 그야말로 가관아닌가. 나야말로 헛살았다. 누군가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안되고 있다. 사실 내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아니, 지금이라고 해서 온전히 이해한다고 할수도 없다. 그저 간신히 넘겨짚고 있을뿐이다. 간밤에도 꿈에서 남편을 보았다. 내것을 숨기거나 움켜쥐는 나와, 그내것을 훔치려는 남편과의 신경전은 여전히 진행형인가. 절대로 용서되지 못할 정도인가. 어머니, 나, 그리고 아이들의 희생까지 얼켜있어서? 내 인생과 어머니의 인생과 아이들의 미래까지 포함해서 야금야금 갈아먹고 털어먹은 행위는 용서가 아니라 이해불가다. 아니,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곳곳에 있는듯 싶다. 마누라나 처가 등처먹고 사는 못나고도 염치없는 존재들은 항상 어디에나 있어왔다. 그런 남자가 하필이면 내 남편이었다는게 재수없는 일이었을 뿐이다. 남의 일이라면 뭐, 얼마든지 지나칠수도 있었을게다. 그런데 그게 내 일이니까 잊을수도 용서할수도 없는 일이 되고 만것이다. 한푼도 넉넉하게 써본적이 없는 절대 빈곤이 일상이었던, 남편의 돈이라고는 단돈 1원도 보탬이 되지 않앗던, 딸 통장을 털어서까지 용돈아닌 용돈으로 쓰고서도 갚지않고 말았던 무개념 남편을 어떻게 이해하고 용서가 될수 있겠는가. 온 가족의 심혈인 아파트를 저당잡혀 용돈으로 쓸 생각을 할수있었던 남편은 기인인가. 꿈속에서 나는 남편을 비틀고 뭉퉁거려서 집 밖으로 내모는데 성공했다. 옷가지를 가방에 싸서 넘겨주고도 이혼까지는 못갔던 현실과는 달랐다. 그때 나는 남편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남아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 지금도 한심하고 못나고 무능한 남편이 인간적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다. 자신의 처자식마저 돌보지 못하고 평생을 낭비해버린 한 남자의 인생이 가련했던 것은 틀림이 없었다. 남편도 사람인데, 남편은 무슨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한탕이면 다 되는데, 그 한탕이 뭐였을까. 남편은 끝까지 그 한탕에 미련이 있었을까. 그런 남편을 남편이라고 믿고 살아야 했던 내가 더 한심한 인생은 아니었을까. 화들짝 깨어나서 이런 저런 생각에 쉬이 잠들지 못했다. 죽기전에는 털고 용서해야 할탠데,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사위가 주식으로 손실을 입었다는 얘기에 잊혔던 상처가 되살아 난것인가. 사위는 자기가 번 돈이기는 했다. 어쩌면 사위가 더 타격을 받고 있는 중일게다. 그런데도, 알뜻 살뜻 아끼고 또 아끼며 살아온 딸이 마음 아플걸 생각하면 가슴이 찡하다. 딸을 위로해주고도 싶다. 그런데 내가 뭘 할수 있겠는가.
스스로를 돌보며 살아가는 것도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생각이다. 더는 투덜거리지 않겠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감사하다고 거침없이 말할수 있지않을까 싶다. 반짝이는 것들은 위험하다는 게 맞는 말인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