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울고
오늘도 종일 울었다는 세영은
내 근무시간을 모르겠어서
혹시나 쉬는데 방해될까봐
늦은 저녁에나 전화를 걸어왔다.
그 숱한 시련들에 대해
묵묵히 성실히 버텨왔고,
어떻게든 절망하지 않고
신에게 기도하며 살아왔는데
운명은 왜이리 가혹한 것이며
타고난 사주팔자 또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진장 운도 없다고..
남들은 잘 써먹는
뒷통수치기나 사기 기질이
왜 자기에겐 주어지지도 않느냐는
불만을 토해냈다.
당신에게 사기꾼 기질이 풍부하다거나
뒷통수치기의 달인이었으면
과연 당신은 떳떳할 수 있겠나?
우리가 자식을 키우는 이상
우리는 올바를 수 밖에 없지.
한 가지 얘기해줄까?
오늘 아침 7시 반부터 나와서
병원에서 두시간을 서성였던 일이나
학교에서 짐싸들고 나오는 시간,
이웃아저씨께 들러 인사드리며
잠시 머뭇거린 시간,
마트에 들러 두부를 집어들고
벽시계에 넣을 배터리 D사이즈를 확인하느라 갸우뚱했던 몇 분간이
모두 단 1초도 빠짐없이
거쳐야 할 일이었어.
스타벅스 사거리에서
30년만에 여고동창생을 마주치기 위해선...
그친구는 때마침 내게 옆모습을 보이며 신호등 앞에 서있었고
나는 한 6미터 정도 거리에 있었는데,
내가 마트에서 좀더 일찍 나왔다던가,
아니면 아예 마트를 안들렀다던가,
학교에서 일일이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고
후다닥 나와버렸다던가
그렇게 뭔가 하나라도 빠졌더라면
나는 그 친구를 거기서 보지 못했을거야..
지나왔으니 하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이 모든 순간들이
당신에게는 어찌됐든
거쳐와야 할 시간이란 거지.
그렇게 지나고나서 훗날의 당신에게는
오늘 내가 친구와 마주친 것처럼
굉장히 놀랄 만한 시간이 주어질테고 말야.
매순간이 우리에겐
우리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거쳐가야 할 시간인 거지.
그속에서 자기성찰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면
아마도 우리는 헛 산 건 아니게 될거야..
적어도 후회는 덜 할거고..
세영은 또다시 감탄하고 있었다.
와..김가야.
당신 어쩜 이렇게 제대로 영글었어?
5년간의 세월동안
무거운 삶들이 당신을 이렇게까지
변화시켰다면
대체 그 무게가 얼마만했단 얘기니?
나는 그래서 한 강의 글을 안 읽고
류시화의 산문집을 읽었어.
직접 그속에 뛰어들어서
같이 호흡하고 살아낸
진짜 생동감있는 본인의 이야기를
류시화는 써내거든.
근데 한 강이 제주도의 그 사건을 배경으로 쓴 소설을 보면
그냥 말놀음으로밖에 안느껴져.
당신은 내게
당신이 겪어낸 세월을 두고
얘기를 하니까
내겐 가슴으로 들린다..
나는 소주 두 병째 마시는 세영의 얘기를
그의 발음이 슬슬 꼬이기 시작할 때까지 들어주었다.
월정사에 가지 않겠냐는 제안에
나는 또 농담을 걸었다.
와..당신은 내키면 절도
멀리로 가는구나.
나는 그냥 가까운 백련사로 가는데.
하긴 귀족과 민초가
같을 수가 있나..
구황작물은 그냥 뭐
강화를 벗어날 일이 읎지 뭐..
우린 역시 또 낄낄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