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의 우리말 바로 쓰기] 8. 외래어 남용과 오용(3) 지식인의 외래어 중독
1990년대 후반 새내기 교수 시절 <한겨레>에 시사평론을 종종 기고했다. 글이 실리면 며칠 후 편지를 받기 일쑤였다. 이수열이란 분이 내 글이 실린 신문지를 오려 여기저기 빨간 줄을 긋고 고쳐 보내주는 것이었다. 1980년대 미국에서 멀리 떨어져 살던 아내 될 사람과 연애편지 주고받을 때 그가 보낸 글에 맞춤법 오류가 있으면 빨간 줄 긋고 바로잡아 돌려보낸 걸 생각하며 고맙게 받아들였다.
이수열 선생에게 지적받은 것은 주로 영어식 또는 일본어식 글투나 수동태 문장이었다. 예를 들면, ‘(으)로부터’는 ‘에게서’로 고치고, ‘(으)로 인해’는 ‘인해’ 없이 쓰라는 것이었다. 난 예나 지금이나 국어사전 뒤적거리며 맞춤법에 신경 쓰고 앞뒤 문장에 같은 토씨(조사)가 반복되지 않게 글 쓰는 버릇을 들여왔는데, 신문에 글 실을 때마다 빨간 줄이 줄어들지 않았다.
거의 30년이 지나 이수열 선생을 다시 만나게 됐다. 주간 <교수신문>에 2025년 9월부터 연재되고 있는 ‘손수호의 칼럼쓰기 강의’에서다. 시사평론 쓰기를 즐기는 내가 매주 <교수신문>을 받으면 꼭 읽어보는 글이다. 글쓴이는 <교수신문> 편집인 겸 언론학박사라는데, 글을 읽어보니 신문 논설위원과 대학교수를 지낸 듯하다. 그가 2026년 1월 12일, 14번째 연재를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어문의 질서’라는 토픽을 정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이수열 선생(1928-2021)이다. 2000년 전후로 신문에 실린 대학교수들의 칼럼에 거침없이 빨간 줄을 그은 분이다. 당시 논설위원들끼리 만나면 “이수열 선생 편지 받았나?”고 묻는 게 인사였다. 나도 두어 번 받았는데 ‘케이스’를 ‘경우’로, ‘생성된다’를 ‘나온다’로..... 일본어 잔재를 청산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두었고, 무분별한 영어 사용을 영 못마땅해했다..... 나도 선생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문의 질서가 무너진 글을 보면 빨간펜을 대고 싶어진다.”
그런데 난 그의 글에 빨간 줄을 그어놓은 대목이 많다. 외래어다. “무분별한 영어 사용을 영 못마땅해했던” 이수열 선생에게 지적받기도 하고 영향받았다는 분이 더구나 대학교수들을 상대로 ‘칼럼쓰기’를 강의하면서 외래어를 남용하는 게 영 못마땅하다. 과거엔 수많은 신문 독자와 대학생들, 지금은 적지 않은 교수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우리말을 어지럽히는 데 앞장서는 것 아닌가. 내가 앞에서 “지식인 가운데 영어단어 몇 개 사용하지 않고 말 한마디나 글 한 줄 제대로 끝낼 수 있는 사람 만나기 어렵다”라고 썼는데, 생생한 사례다.
연재 제목부터 거슬린다. ‘칼럼’ 때문이다. 앞에 소개한 2026년 1월 12일자 글에서는 첫 문장에서부터 영어가 튀어나온다. ‘토픽’이다. ‘인터뷰’, ‘핸드폰’, ‘메시지’, ‘치킨’, ‘콘텐츠’..... 물론 국어에서 널리 쓰여 우리말처럼 돼버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는 외래어들이지만 찜찜한 기분을 달래기 어렵다.
지난주 받은 <교수신문> 2026년 3월 2일자에 실린 그의 글을 읽으면서는 꽤 짜증나고 부아가 돋기도 했다. 글 시작부터 외래어 범벅이다. ‘필사 노트를 모은 독립 코너’, ‘루틴형 구성도 있고’,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에세이를 출간할 때’, ‘묶어 세트로 낸다’, ‘SNS에도’, ‘해시태그 아래에는’,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로’, ‘디지털 환경에’, ‘모니터를 바라보던’, ‘발레학원을 찾는’, ‘AI 글이’, ‘LP판이나 필름 카메라, 뜨개질과 다이어리 같은 아날로그 감성’, ‘모터사이클 정비소’, ‘대가들의 드로잉을 카피하며’, ‘리듬과 균형’, ‘간결한 스트레이트형 문체’, ‘냉정한 스타카토 문장’..... 신문 편집인과 언론학박사라는 직함을 내걸고 ‘칼럼쓰기’를 강의한다는 사람이 이렇게 글을 쓰는가 싶다.
팔불출 중에서도 으뜸 상불출이라는 소리 듣거나 국수주의자로 비난받더라도 내 자랑 좀 한다. 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영어 회화 책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2학년 때는 박정희의 국민교육헌장을 영어로 외웠다. 3학년 때는 교내 웅변대회가 열리면 난 영어로 웅변했다. 미국에서 대학원 다니며 영어 논문 많이 썼다. 당연히 수백 쪽짜리 박사논문도 영어로 썼다. 서툴지만 영어로 강의도 했다. 그러나 귀국 후 우리말로 글 쓰거나 강의.강연할 때는 영어단어 하나도 쓰지 않으려 신경 쓴다. 많은 사람을 상대로 글 쓰거나 말하는 언론인과 정치인, 교직자와 성직자 등 많이 배우고 교양있다는 소위 지식인들부터 쉽고 정겨우며 아름다운 우리말 지키며 빛낼 수 없을까.
편집: 박춘근 편집위원
첫댓글 부끄럽습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정작 자각도 하지 못한채 남발했을걸 생각하니 말입니다.
자제하기는 커녕 너무나 당연히 사용하고 의식도 못했을겁니다.
우리말이 얼마나 예쁘고 정겨운지는 잘 알고있답니다.
제주에는 그런 고운 말들이 많이 있어요.
아름다운 우리말,
빛내고 또 빛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