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조항범)
‘민족주의’가 대학가를 휩쓸던 1990년대 초에 한 학생에게서 ‘민족’을 뜻하는 고유어에 ‘겨레’ 말고 또 다른 단어가 없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겨레’ 하나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그 질문에 ‘겨레’ 이외의 단어는 없다는 대답과 함께, ‘겨레’조차도 본래부터 ‘민족’을 뜻하던 단어가 아니라는 대답을 한 기억이 난다. 그때 공부가 부족해 ‘겨레’의 어원이나 의미 변화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려주지 못했던 것이 늘 부담으로 남아 있었는데, 최근 ‘겨레’의 어원을 묻는 학생이 있어 그 못다 한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겨레’라는 말은 16세기 문헌에 ‘결에’로 처음 보인다. ‘결에’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아직 명쾌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다만 ‘결에’가 ‘결개’로 소급하며 이것이 ‘결애’ ‘결에’를 거쳐 ‘겨레’로 변했다는 것 정도는 밝혀졌다. 좀 더 나아가 ‘결개’의 제1음절 모음이 본래 양성모음이었다는 것, 그리고 ‘결’은 ‘결찌(어지어지하여 연분이 닿는 먼 친척)’의 그것과 같다는 것까지도 추정할 수 있다.
‘겨레’의 의미 변화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말할 수 있다. 16세기의 ‘결에’는 중세국어 이래 20세기 초까지도 ‘친척(親戚)’을 뜻하다가 1910년대에 와서 ‘집단, 집합’의 의미를 거쳐 ‘민족’의 의미로 확대됐다는 사실을 실제 예를 통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규영의 ‘온갖것’(1911∼1913)에 나오는 “우리 결에 말과 글이 이 땅 우에 첫재가옵네.”의 ‘결에’가 ‘민족’의 의미로 쓰인 최초의 예이다. 1910년대는 서구에서 ‘민족’ 개념이 들어와 광범위하게 유포되던 시점이다. 이런 시기에 ‘겨레’가 ‘민족’이라는 의미로 변한 것은, ‘민족’을 뜻하는 단어를 요구한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 ‘겨레’가 지니던 ‘친척’의 의미는 ‘겨레붙이(같은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라는 단어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충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