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옥연은 1950년대 이후 언제나 우리 미술계의 대표적 작가로서 자리해 왔다. 그렇지만 그의 화력 50년을 살펴볼 때, 그가 미술계의 어떤 사조나 운동 또는 단체활동 등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흔적을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그는 언제나 홀로 존재하는 그런 작가의 한 사람이다. 이 말은 그의 작업이 여러 관계의 얼개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권옥연은 사물을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의 내면속에서 걸러내어 이를 화면위에 개성적 이미지로 발현시키는 개인양식을 심화시켜 온 작가이다. 이와 같은 개성은 박수근, 이중섭, 장욱진 등 그의 선배화가들이 이룩해 낸 독창성과 연결되어 있다. 자신들의 성정(性情)에 기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들은 모두 고독 속에서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였다. 권옥연은 이들에 대해 회상하면서, “이들은 전람회장에 들어갔을 때, 작품보다는 사람이 먼저 보이는 몇 안되는 작가들이었다. 나도 이들과 같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토로했다.
권옥연의 이러한 내성적인 면모는, 이 작가가 우리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도록 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왔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올해의 작가 2001」전에 원로작가로서 권옥연을 선정하여 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1995년부터 시작된 이 전시는 그 동안 탁월한 예술적 성고를 이룩한 작가를 해마다 1~2명씩 선정해 그들의 작업세계를 집중 조명해 온 전시이다. 그렇지만 그 대상이 중, 장년층 작가에 머물러 작가선정의 한계를 드러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국립현대미술관은 근대 미술관의 역할을 갖고 1998년에 출범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에서 원로작가를 대상으로 「올해의 작가전」을 새롭게 구상하게 되었고, 권옥연이 그 첫 번째 작가로 선정 된 것이다. 이 전시를 통해 우리는 권옥연의 구작과 신작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여 권옥연의 작품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어 어떠한 변화과정을 거쳤으며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조형의식의 핵심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평생을 회화의 영역안에서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실천한 한 화가의 의지와 노력을 되새겨 보고자 하는 것이다.
권옥연이 화가의 길에 들어선 계기는 서울 제2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중학교) 재학시 미술교사였던 사토 구니오를 만난일이다. 당시 15세이던 권옥연은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스승의 가르침과 선배인 이대원, 유영국, 장욱진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화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18세이던 1940년에는 「선만학생미술전람회(鮮滿學生美術展覽會)」에서 <정물>이라는 작품으로 입선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서 <꽃>이라는 작품으로 입선했다. 권옥연은 1942년 동경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함으로써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받았으며 동물들로 구성된 백우회(白牛會)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54년에는 <고향>이라는 작품으로 제 3회 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하였다. 권옥연의 초기작품경향을 살펴보면 종합주의, 상징주의, 입체주의, 야수파, 추상주의 등의 서구 미술사조를 다양한 각도에서 스스로 실험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조형세계를 탐구하는 노력을 기울여 나간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고갱의 상징주의에 강한 영향을 받은 권옥연은 작가의 주체성에 기반을 둔 형태와색채에 주목하였다. 즉 작가의 주관에 의해 대상이 얼마든지 변형되어 재창조될 수 있다는 신념을 보여주고자 하는 태도는 권옥연의 초기작품부터 현재까지 제작된 작품전체에 일관하여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특성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그리는 인물, 정물, 풍경등은 대부분 대상의 재현이라는 측면에 머물지 않는다. 어떤 대상이건 그가 그리는 대상물들은 그의 마음 속에서 다시 구성되어 그만의 스타일로 전형화되어 나타났다.
1957년 35세 되던해에 권옥연은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파리 유학을 통해 권옥연은 그 이전의 구상적 회화를 벗어나 반구상 나아가 추상회화를 시도한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앵포르멜의 열기를 현지에서 체험하며 변화를 모색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기존의 모더니즘 미학을 철저히 파괴하면서 극단적인 앵포르멜을 추구하던 작가들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체질을 지녔음을 자각한 권옥연은 자기 나름의 조형실험에 몰두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떠나온 한국 땅에 스며있는 기억들에서 비롯된다. 고분벽화, 낡은 대문, 목기와 토기 그리고 할아버지 아래서 배웠던 한자 습자(習字)의 기억들이 화면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권옥연은 스스로 ‘정적인 앵포르멜’을 추구했다고 이야기하였다. 동양인으로서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바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으로 서양적 모티브와는 전혀 다른 상형문자의 이미지를 선택하였다. <절규>, <신화> 등의 작품은 파리에서 열린 「살롱 도톤느」와 「레알이떼 누벨전」에 출품되었다.
3년간의 파리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후 권옥연은 민속적인 소재에 관심을 더욱 기울이면서 목기와 토기등을 적극적으로 수집하여 이것들을 작품의 주요 모티브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모티브를 통해서 권옥연은 어떤 환상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앵포르멜 시기의작품들에서 포기되었던 형상성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제작된 <우화>, <전설>, <비전>, <부채>등의 시리즈에서는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또 다른 차원의 세계로 확장된 것이다. 앵포르멜로부터 시작된 권옥연의 새로운 조형성에 대한 탐구는 민속적 소재에 대한 관심과 거기에서 얻어낸 순수원형에 대한 탐구로 전혀 다른 차원의 현실, 즉 초현실적 환상의 세계, 각각의 조형요소들이 특별한 상징성을 갖는 그런 세계로 연결되어지나.
특히1970년대 이후 제작된 환상적 풍경화에는 권옥연이 오랜 세월 민속품들과 함께 하며 천착해 온 신화와 설화의 문학적 이미지가 살아있다. 이 중에서도 1970년작인 <사랑>, 1975년작은 <부석사에서>, 1986년적안 <달맞이꽃>등은 권옥연의 회화의문학적 상상력이 고조되어 있는 작품이다. 화면에는 나목(裸木)과 고옥(古屋), 해와 달, 별, 새, 나비, 꽃 등 농밀한 상징성을 지닌 대상들이 등장한다. 권옥연의 창조성은 그가 선택한 소재의 자유로운 배치와 변형을 통해 그 만의 색, 선, 면을 구성하고 나아가 독자적인 종합적 구성을 이룬데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작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재의 한계와 공간의 유한성을 초월한 초현실주의적 화면을 창출해 내고 있다.
권옥연의 회화에서 또 한가지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권옥연 회화에 나타나는 ‘성적(性的)이미지’이다. 권옥연의 작품중에서 <선(扇)>, <비전(秘傳)>, <우화>, <태동>, <회고> 등에는 여성과 남성의 성적이미지를 암시하거나 진화하지 않은 자연의 상태, 즉 원형을 암시하는 형태들이 종종 등장한다. 1970년대 후반 이후 구상화로 전환하면서 권옥연은 다수의인물화를 제작하는데 이들 작품에서도 권옥연 특유의 이미지와 상징성을 확보하고 있다. 권옥연이 그려낸 여인들은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잉태하고 있는 자연 전체의 상징적 존재로서 나타난다.
권옥연의 작업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초기에는 구상적 화풍을 띄었다가 1950년대 후반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는 추상적 경향과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결합한 실험적이고 개성적인 양식의 화풍으로 회귀하는 변화의 과정을 거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 때문에 권옥연은 어느 경우에는 구상작가로서, 또 다른 경우에는 추상작가로서 여겨지고 각각의 잣대에서 각기 다른 평가를 받아왔다.
권옥연의 작품들은 그것이 구상적이든, 추상적이든 간에 독특하면서도 일관된 특징들을 드러낸다. 권옥연 회화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의 감수성에 바탕을 두고 그만의 시각과 기법을 통해 창출된 회화적 이민지라고 할 수 있다. 권옥연은 그의 마음속에 잠재하는 형상이나 환상을 그리기 위해 여러 가지 사물을 변형시키고 조립함으로써 독특한 이미지를 표현해 왔다. 권옥연 회화를 두고 흔히들 ‘시적’, ‘신비주의적’, ‘설화적’ 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권옥연의 작품세계를 온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의 회화에는 인물과 풍경, 정물 등의 구상적 세계뿐만 아니라 대상을 알 수 없는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비구상의세계 역시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가 창출해 낸 이미지들은 작가가 부여한 독특한 상징적 체계를 지니고 있으며 그로 인해 그의 그림들은 보면 볼수록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권옥연에 대한 화단의 분류와 평가가 분반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권옥연 자신이 세속적인 잣대에 무심하다는 사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넘어서서 화가의 본분을 다해 자신만이 그려낼 수 있는 이미지를 찾아 자유롭게 유영(遊泳)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개성적 화풍이 완성한 개인양식은 ‘이미지’와 ‘상징성’으로 압축되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권옥연이라는 한 사람의 작가가 이룩한 이 예술세계는 고독하지만 어떤 다른 이와도 비견될 수 없는 고고한 독자적 경지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권옥연을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한 사람의 작가로서 우리 마음속에 각인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