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몇 해 전 박민규의 ‘카스테라’ 라는 소설로 책모임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소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왜 냉장고에 카스테라를 넣는지, 그래서 뭐하자는 건지... 멤버들 중 그렇게 난감해 하는 사람은 저 밖에 없었습니다. 모두들 너무 재미있다고, 왜 요새 박민규가 뜨는지 알겠다고 했습니다. 나름 활자의 이해에선 할 만 하다고 생각하는 제게 그 날이 선명히 남아있습니다. 대체 소설을 이해 못하다니..그 날 이후로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뭔가 비유하고 암시하는 것을 잘 이해를 못하는 구나..그러고 보니, 전 추리소설, 스토리중심의 영화, 드라마..이런 것의 맥락을 잘 파악 못하고 늘 같이 보는 사람에게 묻는 것 같습니다.
짜라..이 책도 그와 비슷합니다. 애초에 교수님이 읽기 쉽지 않을 거라 하셨지만, 제가 느끼는 난해함, 핵심이 잘 드러나지 않는 느낌..이것은 다시 읽어봐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2. 그래서 일까요? 저는 이 책, 나아가 니체가 별로 맘에 들지 않습니다. 신을 조롱하고 죽었다고 선언하는데서 오는 시원함, 의지를 강조하는 데서 공감되었던 불끈 주먹이 쥐어지는 느낌들을 제외하면 전 왠지 계속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뭔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첫째, 저는 이 책이, 나아가 니체가 풍기는 사람에 대한 시니컬한, 경멸조의 어떤 느낌..이 싫습니다. 보통사람이 원하고 바라는 어떤 삶을 가장 경멸스러운 말종 인간이라 하고, 인간은 그 자체가 아니라 파멸되어야 할 다리일 뿐이라 하며, 자신이 드리운 낚시줄을 타고 심연에서 자신에게 올라와야 하는 어떤 대상.. 그게 니체에게 보통의 인간 인 듯 합니다.
저는 <짜라>의 말종인간부분의 서술을 읽을 때 정말 저의 얘기라 공감했습니다. 그런 인간을, 저를 니체는 말종인간이라 비웃습니다. 물론 이해 갑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성, 초인을 설명하기 위한, 그것의 필요성을 좀 더 극단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도움닫기일 겁니다. 하지만, 그러더라도 전 그렇게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이 불편합니다.
3. 좀 더 확대하자면, 전 인간의 평등에 대해 반대했다는 니체와 사람을 보는 눈이 근본적으로 다름을 느낍니다. 저보고 인간의 역사를 한마디로 표현해 보라면, ‘인간이 스스로의 존엄성을 확대해 가는 과정’ 이라 할 것 같습니다. 홍수와 가뭄과 맹수와 전염병으로부터의 위협을, 국가권력과 돈으로 부터의 소외를 숙명이라 여겼던 데서, 조금씩 조금씩 자유로와지며, 인간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음이 점차 분명해 지는 과정. 니체 훨씬 이전에 이미 평등이란 개념이 나온 것도,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그게 가능함을, 가능해야 함을 예민한 계몽주의자들의 촉수에 걸렸기 때문에 가능했을 겁니다. 니체이후 20세기의 생산력의 발달과 그를 바탕으로 한 여러 사회복지의 확장은 인류가 전쟁의 가능성과 빈부격차의 확대등 여러 문제가 여전히 있을 지언정, 존엄성의 확대과정역시 여전히,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생각합니다.
4. 초인에 대해서도 불편합니다. 다시 읽어봐도 초인에 대한 개념이 분명히 잡히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신에 의해, 신의 지적질에 수동적으로 순응하고 반응해 왔던 것을 깨고, 인간 스스로의 이성에 의해 추구하고 도달해야할 의지의 인간..정도...일 듯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여기서도 저의 불편함에 걸리는 건, 초인이란 보통사람, 말종인간, 저 와는 아주 다르게,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대비되는 어떤 상...인 듯 합니다.
물론 인간 일반에게, 저에게도 추구해야할 좀 더 나은 인간의 상이 필요합니다. 좀 더 이성적이고 좀 더 표용적이며,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의지를 분명히 하는..뭐 이런. 하지만, 저는 그 상이, 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어떤 경지에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저의 일상 안에, 제가 만나는 여러 말종인간들 안에, 제 내면안에 인간이 추구해야할 많은 것, 모든 것들이 담겨있다 생각합니다. 더구나 그것들이 어떤 특출한 개인, 초인에게 담겨있다기 보다는 불완전한 모든 말종인간들이 조금씩 그 맹아적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서로 느끼고 배우면서 조금씩 초인의 경지에 함께 다가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물리학의 위대한 발견자 뉴톤 마저도 자신은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탄 작은 아이에 불과하다고 느낀 것처럼, 저도, 니체도, 귀쫑의 모든 말종인간들도 서로간 기대면서 초인의 경지에 다가가고 있다 느낍니다.
4. 그러면 왜 니체에게 초인이 필요했을까... 저는 니체는 구체적으로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그래서 신은 극복했을지언정, 신의 시대의 사고의 패러다임.(인간과 신의 이분법적 분리라는, 즉 인간과 신=말종인간과 초인) 자체는 극복하지 못하고 그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리고 그런 니체의 한계는 그의 시대의, 아직도 자연으로부터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그래서 일상의 여러 궁핍을 해결하고 신과 돈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인간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상의 말종인간과는 다른 차원 어떤 존재가 필요했던 시대의 상상의 산물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국가권력이 어디에 있을까? 저는 저한테, 제손안에 있다! 생각합니다. 주권제민의 민주국가에서 저만 정당하다면 그 대상이 대통령부터 그 누구든, 저의 자유로움을 제약하지 못합니다. 역으로 저의 자유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권력이나, 혹은 그 반대편의 시민권력(?)..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권력의 힘이나, 전문가의 지식독점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시간의 흐름은 일부에게 독점되어왔던 그런 힘들이 존엄한 인간 모두에게 고르게 분배되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나름의 자신감은 니체 이후 20세기동안 생산력의 발달, 투표권의 확대, 시민사회의 성숙, 법치의 형성 등등 그동안 쌓아온 경험의 산물이지 않을까..생각됩니다.
여하튼, 저에겐 니체의 초인 개념은 신의 대체품으로, 신이 그동안 인간을 소외시켰음에 그렇게도 격렬히 분노하면서도, 실은 인간과는 다른 차원의 초인에 의해 말종인간들을 구원하려 한다는 면에서 니체 역시 신의 시대의 한계안에 머물러 있다 느낍니다.
5. 저는 니체 개인의 성깔도 맘에 안듭니다. 자신에 대한 묘사만 해도,
인간을 낚는 모든 어부들 중에서 가장 악의적인 어부, 더욱 멋진 고슴도치인 짜라투스트라, 위대한 양심의 거머리 짜라 등등 너무 양극단의 묘사가 많습니다.
한 대상에 대해 그렇게도 양 극단의 묘사가 많다는 것은, 실은 자기 본성의 반영입니다. 이미 알고 있듯, 그 만큼 그의 내면이 불안정하고, 자기 도취의 가능성이 있었다는 걸 보여줍니다.
모르긴 해도 진리 추구의 방식, 이 세계에 대한 의미부여의 방식은 사람의 수 만큼 많을 겁니다. 누구는 책과 실험을 통해, 누구는 스포츠나 음악을 통해, 누구는 인간 극단에 도전하는 익스트림을 통해서 등등 말입니다. 니체 스스로 얘기하듯, 그 모든 것에 주체의 의지만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옳고 존중받아야 하며, 저도 그 모든 것을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그 모든 것의 과정에 나와 타인, 나와 인류, 나와 자연, 나와 우주의 순환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일 겁니다. 그럴려면 최소한 자기도취의 가능성은 최대한 배제되어야 하지 않을까..싶습니다.
6. 낙타, 사자, 아이...의 대목이 기억에 남습니다. 요새 드는 생각중 하나는 한 사람의 인생이 참 역동적이구나 하는 겁니다. 그것을 공자는 40대 불혹, 50대 지천명, 60대 이순 등으로 표현했을 거고, 니체는 저렇게 세 부류로 표현했을 겁니다...
저 비유에서 나는 어디쯤일까?...
그것도 나중에서야 할 일이지만, 스스로 느끼건데 사자의 정점은 지난 듯 합니다. 세상 일반에 대한 관심과 열의에서, 좋은 병원을 만들어 보고자 열심히 직원들을 끌고자 했던 데서, 이제는 조금은 한걸음 뒤로 하고 많은 세상사보다는 스스로와 주위에 좀 더 집중하며 객관화 시켜보려 합니다. 직원들을 앞서서 끌기보다 그들의 서포터가 되기를 원하는 저를 느낍니다.(직원들이 그렇게 느껴줄려나 모르겠네요..ㅋ) 불과 한두해 전만해도 이런 느낌과는 많이 달랐었는데...정말 인생은 참 역동적인 듯 합니다. 그렇게 사자의 피크를 지나, ‘순진무구하며 새로운 출발, 놀이, 성스러운 긍정’ 인 아이로 까지 가 보았음 좋겠습니다.
그런데, 저 아이 에 대한 표현 안에 니체는 초인의 개념을 겹쳐놓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낙타에 말종인간을 겹치놓듯이. 아이와 초인.. 이 둘도 참 양극단의 표현들인데, 여기서도 그만큼 니체 심정의 불안정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니체 싫어!! ^^
7. 인간의 선함과 진보를 믿습니다.
뭔가를 의지를 가지고 강하게 신념화 하려는 니체 때문일까요? 몇일전 그냥 이런 표현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인간의 선함과 진보를 믿습니다. 저는 각론적인 인간 군상의 여러 갈등과 부침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또 그런 갈등의 소용돌이 안에 제가 있는 상황은 가능한 피하고 싶으면서도, 총론적으로 인간의 선함과 진보를 믿습니다. 세상을 그렇게 보고 느끼며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그 다음날, 업데이트된 다음의 표현이 또 떠올랐습니다.
나 김혜성은 인간의 선함과 진보를 믿습니다...
마음에 든 5 개 구절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38)
보다 위대한 것은, 믿고 싶지 않겠지만, 그대의 몸이며 그대의 몸이라는 거대한 이성이다. 이 거대한 이성은 자아를 말하지 않고 자아를 행동한다. (51)
그대들이 세계라 부르는 것, 그것은 우선 그대들에 의해 창조되어야 한다. 이 세계는 그대들의 이성, 그대들의 심상, 그대들의 의지, 그대들의 사랑안에서 만들어 져야 한다.(147)
참다운 지식의 양심에 있어서 크고 작음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정직함이 끝나는 곳에서 나는 장님이 되고 또 장님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내가 알고자 하는 경우라면 나는 정직하고자 한다. 냉정하고 엄격하고 정밀하고...(437)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자. 그렇지 않다면 아예 살지도 않겠다.(480)
첫댓글 오우!
혜성님
대단하십니다
저는 혜성님의 솔직하고 분석적인 사고가 부럽습니다
"니체 싫어!" 나도 싫어요~~^^그러나 엄청난듯하고 스스로 위대한 듯한 글을 쓴것처럼 했는데도
그 글안에 보이는 드러나는 양 극단의 감정들(찌질하게 울었다가, 외쳤다가- 초인을 주장했다가, 동정(사랑)을 말하다가) , 오히려 인간적이고 안타까움마저 느껴서서 다 읽고난 지금은 싫어할 수만은 없는 듯합니다.
ㅋ~ 짱..현재 접속중~^^ 안그래도 너무 싫어했나..하구 좀 찔리고 있다우~^^
시인님도 감사... 저도 시인님 자료 잘 보고 있답니다.~^^
사실 나도 짜라 별룹니당^^
예리한 통찰력! "니체 싫어"가 몰락의 시작이지 않을까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몰락의 시작입니다.
저..저 몰락도 싫어요~ㅋㅋ
이제야 읽었습니다.
다른 분들 쓴 글을 읽고서는 저의 숙제를 못할 듯해서 외면했었지요.
김혜성님처럼 저도 짜라가 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ㅋㅋㅋ 눈만 깜박이고, 미적지근하고 ....
눈물이 핑돌 지경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갔으니, 이제는 애증의 관계로 넘겨야겠죠.
숙제를 한곳에 모아야 겠고~~질문가 답변란에 안 맞는 듯해서 이곳으로 올리신 시각에 맞춰 옮깁니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 큰 바위 얼굴' 이란 나다니엘 호돈의 소설을 중학교 때 아주 감동깊게 읽은적이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겸손하게 큰바위 얼굴을 닮은 초인을 기다리고 있지요........ 귀쫑은 가슴이 따뜻한 사람에게 훌륭한 인문학 모임으로 성장해가고 있고, 사과나무 치과는 행복한 공동체로서 조심스러운 발돋움해가고 있지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반응을 지켜보면서..... 이렇게 구원은 항상 우리옆에 있으며, 초인은 이제 더 이상 광야에서 목놓아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수 있는 작은 것들을 수행해가지요. 모두들 할수 있는 것도 하지 않지요. 니이체가 돌아버리지요.
'김혜성님'의 해박한 지식과 폭넓은 관심에 새삼 감탄합니다.
이렇게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치과의사 선생님!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moveo님은 치과의사 선생님이시라 이빨 쎈거라고 하겠지만..ㅋㅋ)
어떠한 주제를 놓고 자신의 사유를 펼쳐 보는 혜성님의 모습!
참 멋있어 보입니다. 저도 닮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