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다만 그게 가능하다는게 한심한 일이다 싶어서다.나 말고도 이렇게 시간 낭비를 일삼고 사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 잠자는 시간도 아깝다며 분 단위를 셈하고 따지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한심하고 또 억울할까. 하나님의 공평이 의심받지 않을까. 촌음을 제고 따지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시간을 주시는게 맞지않을까. 시간을 줘봐야 낭비밖에 못하는 쓸모없는 사람들의 시간을 다른 유용하게 쓸 사람들에게 주는게 맞지않을까. 나라면 아마 얼마든지 그렇게 했을텐데. 사실 누군가는 시간이 금이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지옥일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 것도 아닐텐데, 굳이 지옥을 선물하시는 것은 또 왜일까. 생존을 위해 일했을때는 당연히 시간은 유익했다. 그때는 나도 낭비하지 않았다. 효율적으로 활용했다고는 할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내 깜량대로 성실했다. 당연히 버거워 했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대는 온힘을 다 했고, 어디선가 도움이 오기를 도움의 손길이 있기를 바라고 원하면서 견디는 날들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가? 아니, 그때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발적인 삶이 아니라 늘 끌려다니는 꼴이었으니까. 지금 내게는 시간이 넘처나고 있다. 그 넘처나는 시간에 뭔가 해야하는데, 내가 하고있는 것은 판타지 소설이나 읽고 있고, 아님 판타지 중국 무협물이나 정주행하고 있다. 사용할줄 모르는 쿠폰을 한주먹 쥐고 있는 샘이다. 아니, 연화리도 가 보고 싶다. 아니, 안가고 싶다. 가고 싶기도하고 안가고 싶기도하고, 친정 식구들이 보고 싶기도하고, 안보고 싶기도하고, 외가 식구들이 보고 싶기도하고 안보고 싶기도하다. 보고싶다, 안보고 싶다, 간밤에도 그 생각에 몰입하다가 잠이 들었다. 이미 아무것도 없는 연화리, 이미 스스로는 가지도 오지도 못하는 늙어버린 옛날 가족들, 사랑한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다시 꺼내기에는 생뚱맞는 것일까.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다. 사실 나도 더는 기회가 없다고 봐야한다. 그럼에도 마음속에서는 한가닥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철없던 그 시절에 나를 많이 사랑해주신것 너무너무 감사하다는 말이 세삼스럽고 낫 뜨거울수도 있다. 나보다 나이어린 삼촌이나 이모는 어쩌면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나를 부려워 했다는 친구의 얘기 때문이긴 하지만, 또 또래였던 인척들이 내 뒷담화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들었을때서야 그럴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나야말로 특혜를 받고 자랐다고 할만했다. 작은 손자가 불공평을 열심히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럴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특혜를 받았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오히려 아버지 없는 손실이 막대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는 아버지도 아버지 나름이라는 생각은 못했으니까.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칭하는게 생경하다. 또 이땅위에 얼마나 그릇된 아버지들이 있는가를 생각하면 한나님을 아버지라 호칭하는 것도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도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더 적합한 것 아닐까. 내게는 그렇다는 말이다. 호칭이야 뭐가 됬던 무슨 상관이랴. 아마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게다. 또 오늘하루를 살고있다. 좋은하루 감사가 있는 하루이길! 오늘은 또 다른 드라마를 찾아서 정주행을 시도해 볼까나,,, 이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낭비이니까 잘 사용해야하지 않을까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