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 것은 복되고 영광스럽고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히게 신비스럽고 이해하기가 심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르게 만난 분들은 그 복됨과 감사함을 전하기 위하여 설교를 하고 책을 쓰고 전도를 하였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좋은 선생님들의 책들을 어느 때보다 더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 놀라운 가르침들을 대하면서 깜짝깜짝 놀라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왜 이런 것들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살면서 구원의 즐거움도 없고 감사와 찬송도 없는 사람들이 많은지 안타까움을 느낀다. 불신자들보다도 더 괴로운 삶, 문제 투성이의 삶을 살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 것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들의 앞날에 대해 염려와 두려움도 생긴다. 몇 분의 책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어떻게 믿고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기를 소원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선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좋으신 분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과, 참으로 의로우사 심판을 행하시고 상과 벌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보며, 좋은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가까이하면서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고, 그리하여 우리의 삶도 고쳐가기를 소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하는 태도가 어떤 기초 위에 서 있는지를 확실하게 배우기를 소원한다.
다시 말하건대, 하나님이 모든 선한 것의 샘과 기원이(참조. 렘 17:13) 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를 명확히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사람의 사악함이 마음을 유혹하여 올바른 통찰을 가로막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붙어 있으려는 열망과 그에 대한 확신이 이러한 지식으로부터 생겨날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경건한 마음은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몽상하지 않고 한 분 참 하나님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좋아 보이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덧붙이려 하지 아니하고, 그가 친히 자신을 드러내시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만족한다. 그리고 무모한 만용을 부려서 그의 뜻을 넘어서서 잘못된 길로 나아가 방황하지 않도록 모든 심혈을 기울여 항상 주의한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경건한 마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위한 교사요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믿으며,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전부를 그를 믿는 믿음에 드린다. 경건한 마음은 하나님이 모든 선한 것의 조성자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만약 무엇이 짓누르거나 무엇이 부족하면, 곧바로 그로부터 능력을 기대하며 그의 도움을 받는 자리로 피한다. 경건한 마음은 하나님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에 감동이 되었기 때문에, 확실한 신뢰를 가지고 그를 의지하며 그의 자비 속에 모든 악한 것을 치료하는 약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경건한 마음은 하나님을 여호와와 아버지로 인식하고 또한 그를 고귀하게 세우기 때문에, 모든 것 위에 주어진 그의 명령을 헤아리고, 그의 엄위를 바라보고, 그에게 영광을 더하도록 마음을 쓰고, 그의 명령들을 순종한다. …… 보라, 순수하고 참된 종교, 즉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경외와 결합된 믿음이 여기에 있다. 이 경외는 그 자체 안에 자발적인 경배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체에 율법의 규정을 따르는 합법적인 예배가 수반된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의식(儀式)의 외양은 거창하지만 심중의 진지함은 거의 결여된 채로 하나님을 모호하게 경배하고 있으며,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올바로 경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더욱 주의 깊게 마음에 새겨야 한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문병호 옮김, 175-177.
이 전체의 인물들(히브리서 11장의 인물들)이 믿음의 그림자로서 중요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은 첫째,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신뢰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그런 자들에게 상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기본적으로 그의 존재를 시인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존재를 시인 않고서는 믿음이고 무엇이고 따질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한 다음에 “그를 찾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어떻게든지 그 뜻을 잘 받들어서 세상에서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건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가, 즉 어떤 방향을 취하고 인생의 행진을 해나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주 좁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서 결국 하나님을 찾는 데로 들어가는가, 아니면 자기 마음대로 이상을 정하고 자기 스스로의 종교에 의해서 다른 방향으로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찾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는 결국은 상을 주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사람에 따라 여러 등급이 있는 것입니다. 훨씬 빨리 자라는 사람도 있고 느리게 자라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김홍전, “신앙의 용사들” 『신앙의 자태 I』, 242
그러므로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보거든 ‘이렇게 아름답고 위대한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은 그 얼마나 위대하시고 아름다우실까?’를 생각하십시오. 자기보다 강한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해와 달을 연구하여 수년 전부터 미리 일식과 월식을 알아내는 인간의 지혜를 보거든 ‘피조물인 사람을 이렇게 지혜롭게 만드신 하나님은 그 얼마나 지혜로우실까?’를 생각하십시오. 고래와 코끼리의 힘, 폭풍우와 천둥의 위력을 보거든 ‘이렇게 강하고 두려운 것들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 얼마나 강하시고 위대하시고 두려운 존재이실까’를 생각하는 지혜를 가지십시오. 달콤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거든 ‘이렇게 달콤한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얼마나 사랑스러우실까’를 생각하십시오. 꽃과 새들이 지닌 고운 색깔과 사랑스러운 자연의 광경을 보거든 ‘이것들을 만드신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실까’를 생각하십시오. 루이스 베일리, 『청교도에게 배우는 경건』, 조계광, 안보현 옮김. 126-127.
네 분의 선생님들은 아무리 보아도 선하신 하나님을 잘 알고 믿으며, 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던 분들임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드렸던 분들임을 알 수 있다. 육체로는 이 땅에 계시지 않는 분들이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책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전해지며, 우리에게도 이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도록 인도한다. 그리고 우리는 주변의 작은 것 하나를 볼 때에나 우리의 가정과 직장에서 일을 할 때에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감동하며 찬송하며 즐거워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복잡하고 문제가 많다고 하지만,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기쁨도, 감사도 경험하기가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저분들이 살던 과거에도 나름의 어려움들이 많았고, 그래서 생활하기가 더 힘들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나 오늘에나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고 위대하시고 아름다우신 분임을 믿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직접 경험하며, 그것을 증거하는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