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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다음 글은 지난 6월 22일 전남노인상담사과정 수강생들에게 들려준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톨스토이)
이반 일리치는 십 등 문관의 자격을 부여받고 법률학교를 졸업한다. 처음 부임지에서 꽤 모범적이고 예의바르게 관리의 생활을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정받는다. 예심판사가 되어 간 도시에서 이반 일리치는 아내를 만나게 된다. 그가 아내와 결혼을 한 이유는 그녀가 훌륭한 가문의 아가씨인데다 고위층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일을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른바 조건에 맞추어 결혼을 한 것이다. 결혼생활은 그가 추구했던 유쾌함과 품격이 있는 삶이 아니었다. 그래서 결혼생활에 일정한 원칙을 정하고 아내에게 바라는 것은 따뜻한 식사와 집안관리, 잠자리 딱 세 가지였다. 혹시나 그 원칙에 문제가 생기면 그는 일에 파묻혀 보람을 찾았다.
남편이 집안일에 관심이 없거나 바람을 피거나 일에 매달려 가정을 등한시 하면 "남자가 밖으로 도는 것은 여자 때문이다." 라고들 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반 일리치는 일로 도피를 한 것이다. 일을 하거나 아니면 친구들과 카드게임에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이 같은 일이 꼭 남자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고 본다. 남편과 의견이 맞지 않거나 계속 문제가 생기면 아내도 가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위안을 받고 몰입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다 그의 몸에 이상증후가 나타나며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병이 들거나 죽음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단계적으로 감정의 변화가 있다.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다음엔 내가 잘못 살았던가 자책하기도 하다가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고 했다. 이반 일리치도 꼭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72쪽
하지만 왜인지, 왜 내가 이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알아야 하는 건 아닐까? 그것도 불가능하다.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한다면 설명이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것만은 절대 인정할 수 없어.
108쪽
그는 그들에게서 바로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모든 것이 삶도 죽음도 가려버리는 하나의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기만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깨달았다.
112쪽
결국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 자신이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족들이 모두 안쓰럽게 여겨지고 모두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다. 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신도 벗어나고 가족들도 다 벗어나게 해주어야 했다.
118쪽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을 때 그는 살아있는 있는 아내와 아들을 불쌍하게 느낀다. 곧 죽음의 공포는 사라지고 대신 빛을 느끼고 기뻐하며 생을 마감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죽음을 앞두었을 때 "참 잘 살았다." 라는 생각이 드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 얇은 책 한 권에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고민하고 질문했던 것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인간의 내면을 어쩜 이리도 정확하게 꿰뚫어볼 수 있는지 역시, 톨스토이다.
짧은 한 권의 책으로 한 사람의 인생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훑어볼 수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우리 모두를 대변하는 인물일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나도 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를 통해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살고 있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죽음까지도 생각해본다.
자서전 쓰기
1. 왜 자서전인가?...87
자서전이란, 자신의 생애를 뒤돌아보며 자신이 직접 쓰는 것으로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임을 생각하며 기록하여야 한다. 자서전을 쓰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내가 누구인지를 인식하게 해준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나의 미래를 설계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나'이다. 그 설계도의 주인공인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제대로 된 설계를 할 수 있다.
2) 나 자신과 화해하는 치유 효과가 있다.
살다 보면 누구나 맘속에 풀지 못한 응어리를 하나둘씩 지니게 된다. 사람들은 이걸 흔히 한(恨)이라고 표현한다. 환자는 정신과 의사와 만나 살아온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상담에 응한다.
이 과정에서 환자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응어리를 찾아내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비롯되었고, 어떤 영향을 미쳤고,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된다. 감정을 바깥으로 분출하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카타르시스'(淨化)를 느낄 수 있다. 자서전 쓰기는 나를 이해하고 나와 화해하는 심리적 치유 방법이다.
3) 후손들에게 물려줄 정신적 유산이다.
자식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의 삶을 고스란히 닮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 집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동화되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제대로 알려주는 것은 의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긴 시간, 최선을 다해 살아온, 부모의 삶 자체가 자식들에겐 소중한 유산이다
2. 자서전 쓰기 요령
1) 카톡이 글이다.
글쓰기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카톡'할 줄 알면 누구나 한다.
2) 글은 무엇으로 이루이지나.
글쓰기는 노동이며 숙련된 기술을 배우는 것과 같다.
3) 문장의 조건 - 낱글자가 단어가 되고, 단어가 의미 있는 문장이 된다.
4) 말을 글로 전환하기 연습
읽기, 말하기, 듣기, 쓰기와 같은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5) 좋은 글이란
① 글이란 의사전달 과정이며 자신이 의도하고자 하는 것을 독기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
② 자연스러운 글이 좋다.
③ 문장의 끝을 하나(동일하게)로 표현하라.(~다. ~니다)
6) 연보 작성하기
나를 설명하는 키워드이다. 담아야 할 내용은?
① 언제 어떤 일이 있었을까?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연대별로 맞추어 본다
② 연보 작성의 실제
현재까지의 성장 과정과 경험을 연보별로 정리
유년시절, 고교, 대학 시절, 취업, 결혼, 사회활동 가족과의 관계, 교우관계, 은퇴 후 살아오면서 지켜온 자신의 좌우명, 혹은 후회 등 연보별로 구성해 본다.
7) 나를 설명하는 키워드 뽑기
① 나를 설명하는 키워드를 찾아라.
내가 살아오면서 나를 대표할 키워드를 찾기란 쉽지 않다.
② 마인드맵 그리기
8) 자기소개서 쓰기
① 자소서 쓰기로 '지금의 나'를 밝혀라
② 자소서 쓰기의 실제
9) 자서전 기획하기
① 자서전 기획의 중요성
② 편년체와 기전체
편년체는 말 그대로 연월일에 따라서 시간 순으로 기록하는 체제이고, 기전체는 임금별, 인물별, 경제, 법률, 제도와 같은 주제별로 항복을 만들어 각각의 항목에 관한 중요한 시건이나 변화 내용을 적는 것이다.
자서전을 편년체 방식으로 쓰겠다고 하면, 출생에서 시작해 오늘까지의 이이기들을 시간 순서대로 쓰면 된다. 앞에서 만들었던 연보가 그 밑바탕이 된다.
기전체로 쓸 때는 학업, 일, 가족, 인간관계 등 커다란 주제별로 내용을 묶어서 쓴다.
10) 자료 찾기 및 취재
① 문서자료 찾기
② 인터넷 검색으로 자료 찾기
③ 인터뷰의 필요성
④ 현장 답사
11) 자서전을 풍성하게 가꿔주는 기억 씨앗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인상적인 기억, 사건 등을 담아야 한다.
예) 가족과 함께 휴가를 가서 있었던 사소한 사건, 재미있는 추억, 가족 과의 일화 등을 기록한다.
<자서전 쓰기의 실제 사례>
아버지의 손재주
우지환
내가 성장하면서 바라본 아버지의 모습은 이러하다. 아버지는 남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셨다. 그리고 어떠한 위험한 일이나 부담스러운 일에는 좋은 일이 생긴다.
해도 임하지 않는 강직한 분이셨다. 그리고 늘 책을 가까이하며 무언가를 쓰고 만드는 일에 일과를 할애하셨고 밖에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어머니는 늘 불편해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없으나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려웠으므로 예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가장으로서 가정의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때로는 남과의 적절한 타협도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셨다. 그러나 자식들을 향한 그런 어머니의 애틋 함은 하소연에 지나지 않았고 불평에 가까웠다. 그런 탓에 늘 우리 가정은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어머니의 고생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셨던 아버지. 아버지는 가족에겐 어떤 사람이었나. 아버지는 어머니와 가족을 어떤 모습으로 지켜보았을까? 왜 밖에 나가 돈을 벌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회초리로 천자문을 가르쳐 주셨던 아버지. 그랬던 아버지가 왜 자식들에게 배움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지 못했을까. 유교사상의 틀에서 빠져나오기가 그렇게 힘이 들었을까. 왜 어머니를 힘겹게 했을까. 나가서 돈을 벌기가 두려웠을까. 양반 체면에 밖에 나가 일을 하거나 일을 구걸하기가 싫었던 것일까. 가장의 역할을 감당하기가 힘겨웠을까. 유년기의 풍족함에 익숙한 나머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에 자존심을 허락할 수 없었나보다. 그러나 아버지는 비록 가진 것 없어 남루하고 비루한 삶이었지만 결코 그릇되거나 부정한 일에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내가 부모로부터 받은 정직과 근면 그리고 성실한 마음가짐은 내게 가장 큰 유산이자 내 정신 속에 자리하고 있어 자식들에게 이어지고 있는 큰 뿌리다.
아버지 고향은 이북이다.
1918년 무오생인 아버지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자작리 고랑포에서 태어나셨다. 몇 해 전 나는 다행히도 아버지와 육촌 관계인 구순의 나이를 넘긴 아저씨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아저씨께 젊은 시절 아버지의 모습을 여쭈었다. 해방 전 아버지의 어 시절 고향에서는, 할아버지 식솔들은 이동 수단으로 달구지가 아닌 백마를 타고 서당에 다닐 정도로 풍족한 집안이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경전(경성전차)에서 일제 강점기 때 전차 운전사로 일했고 나중에는 작은 시계포를 운영했다. 어릴 적 우리 형제는 아버지를 통해 천자문을 익혔다. 아버지 앞에서 뒤돌아 앉아 익힌 내 용을 암송해야 했고 불분명한 발음에는 영락없이 회초리가 등에 와 닿았다. 전해 내려오는 가문의 족보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늘 지필묵을 통해 손수 집필을 거쳐 책으로 엮어 보관했다. 특히, 예의범절의 중요성도 엄격한 가르침으로 일관하셨고 특별히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출필고(出必告) 반필면(反必面)' 즉 “집을 나설 때는 반드시 어른께 고하고 집에 들어올 때는 반드시 얼굴을 대하라”
또한 제례나 장례의 절차 등은 문중의 법도와 도덕적 의의를 언제나 사유와 근거에 기초해 소상한 가르침을 주셨다.
형들과 나는 고등학교까지 이발소에 가본 적이 없었다. 늘 검소했던 아버지는 여러 종류의 바리캉으로 우리 형제의 머리를 손수 깎아 주셨고 집안에 필요한 책꽂이며 찬장, 옷장 등 가재도구나 집기의 대부분은 아버지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 유용하게 쓰였다. 어느 날 소스라치게 놀라는 일이 있었다. 무심코 방문을 열어 한 발을 내딛은 순간 엄청나게 커다란 뱀이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놀라 비명소리를 지르며 방을 뛰쳐나왔다. 그렇게 놀란 내게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이셨던 아버지. 죽은 고목나무를 다듬어 달군 인두로 비늘 하나하나를 묘사해 살아있는 것과 같이 흡사한 구렁이를 조각하셨다. 그랬던 아버지는 가족에게 너무도 근사하고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줄 뜻깊은 선물을 안겨 주었다.
60년대 중반 내가 살던 영등포구 도림동은 저지대의 후미진 곳이어서 주위에 쓰레기장과 공장들이 즐비했다. 그렇게 검소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가족 모두 함께 거주할 변변한 보금자리 하나 없었다. 그런 우리에게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는 그럴싸한 집을 한 채 가족에게 선물한 것이다. 우리가 살았던 그 집은 무허가 판자촌 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곳으로 발 딛을 틈이 없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어느 날, 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우리가 당시 살고 있던 동네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공터에 갔다. 이후 나는 줄곧 아버지와 함께 그곳에 가게 되었고 가는 날이면 아버지는 아주 조금씩 손수 집을 짓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땅 주위를 이곳저곳을 삽으로 여러 개의 사각형 모양을 돌려 판 후 그곳에 기초를 만들지 않고 담장을 쌓았다.
담장의 재료는 아버지가 그곳을 오가며 간간히 주워 놓은 깨진 시멘트 블록들을 사용했고 시멘트에 모래를 갠 담은 척척 쌓여져 올라갔다. 때때로 블록이 모자라면 나무판으로 담을 대체했다. 바깥 담장이 쌓여지자 얇은 베니다 합판 네 장이 못질을 통해 공간이 구성되었고 신기하게도 이내 방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며칠이 흘렀을까. 작은 각목들이 보와 기둥 역할을 했고 기둥과 기둥을 가로지르는 보 위에 못질해 만든 삼각형 트러스가 올라갔다.
그 위에 공장 주위에서 주워 온 슬레이트와 생철 조각들이 지붕재료가 되어 덮여졌다. 먼발치에서 바라본 우리 집 지붕은 바느질로 천을 기워 만든 총천연색 저고리를 연상하게 하여 마치 화가의 작품을 보는 것과 같았다.
아버지는 어디서 그렇게 잘 구해 오시는지 매우 크고 넓적하며 두껍고 울퉁불퉁한 돌들이 방바닥 재료가 되어 바닥에 깔리자 구들장이 만들어지는가 하더니 이윽고 그 위에 쇠흙손으로 몰탈을 바르자 훌륭한 방바닥이 되었다. 이어 두 개의 구공탄 아궁이가 만들어지고 부엌 위에는 찬장과 선반이 만들어져 벽에 걸렸다. 바깥쪽 담장 주위에는 유리를 대신한 비닐 문과 창문이 달렸다. 그런 날들이 며칠간 계속되면서 하루가 다르게 만들어져 가는 집은 어린 내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집짓기의 모든 과정이 마무리되자 아버지는 뒤편에 토끼를 기를 수 있는 조그만 토끼장과 갖가지 살림 도구와 연장 등을 넣을 수 있는 궤짝들까지 짜 놓았다. 그렇게 지어진 우리 집은 자연의 변화와 계절의 흐름에 잘 견디질 못했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세게 불라치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했고, 여름 한낮에는 더운 정도가 아니라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뜨거웠다. 그리고 생철지붕 위로 쏟아지는 소나기로 챙챙거리는 소리는 서로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요란했다.
한겨울에는 식구들이 서로 몸을 맞대어 체온을 함께 나누지 않으면 잠을 청할 수 없을 정도로 혹한의 추위를 견디기 어려운 집이었다. 비록 손대면 무너질 듯한 무허가 판자집이었고 그 집은 누군가의 토지 위에 소리 없이 지어진 것이었다. 그래도 당시 그런 집은 아무에게나 주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가장인 아버지에게 있어서 살아가야 할 굳은 의지와 스스로 집을 지을 수 있는 남다른 손재주가 없었더라면 그런 행복은 결코 우리 가족이 맛볼 수 없는 일이었다.
어렵사리 지은 집의 행복함에도 아쉬움은 없지 않았다. 집엔 화장실이 없었다. 약 50여 미터 떨어진 공동 화장실 앞에는 아침마다 큰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긴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화장실 주인은 한복 저고리에 수염을 길게 기른 동네 할아버지였다. 사람들은 그곳을 몰래 사용하려고 여간 눈치를 살피지 않았고 돈을 내고 사용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어느 날 오후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화장실을 사용하고 그 대가를 치르지 못해서였다. 할아버지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은 몇 날 며칠이 가도 밀린 화장실 사용료를 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밭 언저리에 공동 화장실을 지어 놓고 사용료를 받고 있었던 할아버지는 “돈을 내라” “낼 돈이 없다” 라는 동네 사람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말다툼을 이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공동 화장실이라 하여 너나없이 이용하는 사람들이 돈은 내지 않으면서 정작 똥을 푸는 일은 몽땅 그 할아버지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어두운 밤 나는 누군가 화장실에서 똥을 푸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 모습이 눈에 익어 자세히 보니 아버지였고 어느 날엔 그곳에 작은 형도 있었다. 화장실 앞에 있는 넓은 밭에 똥을 퍼 날라 뿌리는 것이었다. 화장실 사용료를 대신하기 위해 당시 똥을 퍼 날라야 했던 아버지와 작은형의 모습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애틋함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 먼 굴욕과 굶주림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가족의 건사를 위한다면 그 똥지게가 뭐 그리 대수였겠는가.
아! 아버지.
고강규 시인의 시 '소주병'이 가슴에 더욱 깊게 다가선다.
소주병 / 고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