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헌(幾軒) 김기용(金基鎔)
樂民 장달수
산청군 신등면 법물마을 김기용(金基鎔)이란 선비는 한말 영남의 대학자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의 드러난 제자다. 인품이 순수하고 학문이 뛰어나 세상일을 처리하는 데 절도가 있다. 선한 일을 고집하는 것은 확고한 신념이 있으니, 기개 있는 선비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족장(族丈)인 물천에게 학문을 익혔는데, 하루는 물천이 ‘기(幾)’자를 적어 보이며 이 글자로 마음가짐의 진실과 허위를 구분하라고 가르쳤다. 이로부터 무슨 일을 하며 차질이 없도록 미리 계획을 주도면밀하게 세웠는데 모두 물천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물천이 가르친 ‘기(幾)’자는 동작(動作)의 조짐으로써 길조가 먼저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일찍이 주역에서 풀이하기를, 기(幾)는 사물의 미묘한 시작의 조짐이기도 하며 그것은 너무나 미묘한 것이어서 그것을 감지하고 때에 맞춰 결단을 내리는 사람은 강건한 사람일 뿐 아니라 신묘(神妙)하기까지 하다 했다. 이를테면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얼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 ‘기(幾)’를 안다 하는 것이다. 물천에게 ‘기(幾)’ 자의 가르침을 받은 법물 선비 김기용은 이를 지향점으로 삼고 자신의 호를 기헌(幾軒), 또는 기암(幾菴)으로 정했다. 그는 1869년 법물에서 태어났는데 부친은 조심헌(操心軒) 용섭(龍燮)이며 생부(生父)는 괴정(槐庭) 우섭(遇燮)이다.
기헌은 어려서 허약하여 괴정공이 기운을 돕는데 도움 되는 물건이면 무엇이든지 구해 주었다. 그 결과 성장해서는 얼굴이 윤택하고 코가 높고 광대뼈가 우뚝하고 키가 훤칠히 컸으며 얼굴빛은 연단을 발라 놓은 듯하고 뼈대도 보통 사람과 달랐으며 기운이 굳세어 사람들이 억지로 그 뜻을 꺾지 못하였다. 또 성품이 근면하고 의지가 굳어서 어른들이 보고는 마음이 독실한 점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공부를 하는데 는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경서 사서 제자백가류 시문집 등을 읽을 때 깊이 생각하고 머리에 담아 문장이 풍부해졌다. 마을 서재에서 공부할 때 학동들의 지식을 시험하기 위해 훈장이 종종 까다로운 문제를 내기도 했는데,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학동들은 모두 기헌에게 와서 그 출처를 알려고 했고, 또 더러는 과정(課程)에 불참하기도 했으나, 기헌은 어렵고 쉬운 것을 가리지 않고 일과(日課)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억지로 좋은 시를 써서 이름을 뽐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1891년에는 과거에 응시하러 서울로 올라갔는데, 당시 부모는 비용을 아끼지 않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이는 기헌이 궁벽한 시골에서 생활하며 세상 물정에 어둡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에 가서 마음을 갈고 닦아 기가 살아나고 정신이 밝아지기를 바란 것이었으며, 모든 사물을 겪음으로써 소양을 쌓고 세속에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부터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과거도 역시 폐지되고 말았으니, 이로부터 기헌은 고향에서 학문 수양에 뜻을 두고 정진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고향에서 봄가을로 날씨가 좋을 때면 족족인 단계 김인섭을 모시고 거창 모리와 수승대 사이를 거닐며 시를 읊조리며 자연을 완상하기도 했다. 당시 성재 허전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이택당이 완성되었다. 성재의 제자 만성 박치복이 강의를 맡았는데, 인근의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기헌 역시 아침저녁으로 만성을 모시고 배웠으며 만성은 사자부(四字符)를 써서 격려하기도 했다. 1891년 정월 초하루 스스로를 경계하는 잠을 지었는데 이르기를 “하늘이 재주를 내리실 때 누구에게는 많게, 누구에게는 적게 주었겠는가. 훌륭한 옛 성인들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노력을 하였는데 우리들은 날로 시들어지고 오그라들기만 하네. 그게 무슨 까닭일까. 노력하고 아니하고 하는데 달린 것이다. 너 나이가 몇 살이냐. 30이 가까워 오는데 그렇게 안일하고 허탈하게 깜깜하고 어두운 구멍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으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지금부터 조심하고 노력하여 한 순간도 게을리 말아야지. 하늘을 높다 하지 말고 귀신을 아득하다 하지 말라. 하늘이 내려다보는 듯, 귀신이 지켜보는 듯 한 데서 화와 복이 갈라지는 것이다”고 하였다. 자신을 경계하기 위한 이 글은 기헌의 학문적 관심이 얼마나 높은가를 알 수 있다. 이때부터 점차 실질적인 공부를 하며 지행(知行)이 일치하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뒤에 물천이 만성의 뒤를 이어 이택당 주석을 맡게 되자 실질적으로 묻고 답하고 하였으며 후산 허유가 이택당에 들르면 심경(心經)의 의심난 것과 성정심리(性情心理)의 문제에 대하여 서로 문답하였다. 1898년에는 면우 곽종석이 와서 후산과 자리를 함께 하고 여러 학생들과 강론을 하며 “주로 심경은 일을 하는 것이 주가 된다”고 물으니, 기헌이 대답하기를 “그렇다면 마음이 일에 사역을 당하여 주재의 권리를 이미 잃어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하자 면우가 그 말이 맞다 하였다.
이어 기헌은 삼가 덕촌 가회재(佳會齋)로 따라 갔는데 후산이 묻기를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양은 선한 것이고 음은 악한 것이다’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태극은 그것이 지극히 선한 것인데 어찌하여 약한 음까지 남는 것일까” 라고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음도 처음 났을 때는 무슨 선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다만 왔다 갔다 하다가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지요”라 하니, 면우가 이르기를 “그렇기는 하나 꼭 알맞은 대답은 아닌 것 같다. 차라리 음의 선한 쪽은 그것이 음 중의 양이고 양의 약한 쪽은 그것이 양 중의 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욱 낫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후산이 말하기를 “도의 쪽에서 말하자면 양은 건장한 것이고 음은 순한 것이어서 선과 악이 있을 수 없고, 형상이나 종류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양은 낳는 것이고 음은 죽이는 것이며 양은 통한 것이고 음은 막힌 것이어서 그 때 비로소 선과 악이 갈라지는 것이다”하고 또 이르기를 “그러한 문제는 한 장소에서 이야기로 끝난 것이 아니고 항상 관심을 두고 연구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라 하여 공이 그 말을 받아들여 마음속에 간직했다. 당시 30대의 기헌이 기라성 같은 석학인 후산 면우와 마음 태극 음양을 주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것은 그의 학문적 성취도가 얼마나 높은가를 알 수 있다. 기헌은 자연을 좋아했다. 봄여름 사이가 되면 인근의 절경인 율곡사 정취암에서 매서 김극영, 금호 박희방, 상계 박내동 등과 더불어 10일 내지 6~7일 동안 서로 모여 놀기도 했고 많은 동지들과 비분강개 하며 푸른 산 흰 구름의 한가하고 적막함 속에서 회포를 풀며 시를 읊고 세상 이야기도 하는 기상이 매우 좋았다.
1939년에는 기양정사를 세워 천 권의 서책을 쌓아 두고 집안 일 다 제쳐 두고 좋은 친구들과 그 속에서 거처하며 책 읽고 우러러 생각하며 그 동안 못 다한 일을 마무리 하려 했으나 세상이 날로 변해 가고 유학이 먼저 무너져서 새로 배우는 학생들이 성현의 책 읽는 것을 마치 금기로 삼았으니, 기헌은 세태를 탓하며 유학의 실마리가 끊어질까 노심초사 했다. 혹 지팡이 짚고 깊은 골짜기를 왕래하며 평곡 김영시, 홍암 김진문 등과 더불어 둘러 앉아 길이 한탄하고 비분강개 하던 중 다행히도 천운이 다시 돌아와서 광복이 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성현의 도는 이미 떨어져 세상이 어지럽게 되어 버려 기헌은 이를 안타깝게 여기다가 1947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중재 김황은 “공이 학문하는 과정은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고 지식과 실천을 함께 하며 동정(動靜)을 때에 맞추어 하였다. 가까이는 가정에서부터 일가와 친구 마을의 품팔이꾼들까지도 그를 대하였을 때는 실수를 할까 항상 염려를 했으며 인자하고 진실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따지지 아니하고 평이하고 솔직하며 간사하고 나쁜 일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용납하지 않았다"고 했다. 기헌의 선비로서의 면모를 잘 알 수 있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