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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반과 정전, 혹은 ‘사이’에서 ‘너머’로 / 김석준
예술의 운동은 그것이 아무리 새로운 것을 지향하더라도 언제나 매너리즘에 빠지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예술운동은 민법상의 소멸시효가 적용되는 하나의 물권이다. 따라서 예술의 운동성은 인간의 본성의 운동성과 정확하게 일치하는데, 인간이 동어반복적인 생에의 시간을 무료하게 견디어낼 수 없듯이, 예술 또한 새로운 미적 형식에 대한 욕구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생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동일한 시간의 선상을 내달리고 있다. 견딜 수 없는 권태, 무료함 속에서 감행하는 일탈, 죽음에의 충동. 변화는 생에의 또는 예술이 표현할 수 있는 총체적 에너지의 총량이다. 그러나 변화는 항상성을 파괴할 때만 조짐을 보이는데, 우리는 여기서 예술의 불변성과 혁신성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예술은 아름다움의 절대성을 지향하지만, 인간이 표현해낸 미적 대상물들은 미 그 자체, 즉 미의 절대성을 표현해낼 수 없다. 따라서 표현된 미의 본질은 미의 계보학적 지형도에 의해 미적 현실성을 얻게 되지만, 그 현실성은 일탈과 위반이 이룩해낸 형식에의 도전이다. 따라서 예술의 운동성은 양식의 분화 내지 양식의 창조과정이다. 그렇다면 미의 정전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미의 운동이 옛것을 지워내고 새것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면, 더 나아가 예술의 운동이 헤겔적인 의미의 의미내용을 감각적으로 현현시키는 정신의 작업이 아니라, 칸트적인 의미의 형식 층위가 벌이는 양식적 욕망이라면, 미의 정전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미의 정전은 불변성, 즉 변화의 바깥이고, 위반과 일탈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적 새로움을 거부하면서 모든 미적 실천을 정전의 의미 내용으로 수렴시켜 미를 현상학적 환원의 영역으로 거두어들인다. 하여 미의 정전은 미의 원형이자 미의 절대심급인데, 그것은 시대성과 역사성의 바깥에 위치하면서 미 자체를 길항시키는 미적 초월, 즉 미의 선험성이다.
그러나 인간은 미의 절대성에 도달할 수 없다. 절대성은 권태다. 미적 절대성은 미의 죽음이다. 따라서 미적 지향성은 일탈이 만들어내는 위태위태한 곡예 위를 질주하면서 이 세계의 운명을 길어 올린다. 위반은 미의 운명과 숙명 위에서 기술되는 특수한 양식에의 의지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일탈이다. 정전화된 미의 규범 밖으로 무한질주하여 미의 상징과 알레고리를 찾아 헤맬 때, 미적 일탈과 위반은 미의 전범典範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미의 역동성은 위반이 펼쳐내는 반항적 의식과 동일한 벡터량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위반이 새로운 정전으로 위치를 전환시키는 현상학적 환원의 결과이다.
쓰레기 버리기는 한 순간
자연환경 복구는 한 평생
― 바르게살기운동 금정동 위원회
웃긴다
내 인생의 평생 수칙은 규칙 규율 위반이었다
바르게 살지 않는 것이라면 바르게 살지 않는 것이었다
계속 금정동에서 살아야겠다
금정동의 규율 규칙을 삼켜야겠다
쓰레기 버리자가 아니다
바르게 살지 않는 것이다 비스듬히 사는 것이라면
비스듬히 사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박찬일, 「금정동 예술가」,『시와 상상』 가을호
예술가의 운명은 운명의 승인에 있지 않다. 말하자면 예술가는 자신이 예술가가 될 운명을 승인하면서, 역사의 안쪽에서 요구하는 순응하는 삶의 바깥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상식의 바깥, 질서의 바깥, 제도의 바깥, 규범의 바깥. 바깥은 소외다. 그러나 이때 이 소외는 정신의 자기 운동처럼 스스로가 스스로를 소외시켜가면서 시간의 안쪽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사태를 초연히 응시할 수 있는 소외이다. 하여 바깥은 안쪽이 벌이는 기만과 허위와 억압을 가볍게 초극해가면서 이 세계를 삐딱하게 바라본다. 비스듬히 서기, 삐딱하게 보기, 바르게 살지 않기, 규칙위반하기.
예술은 위반이다. 예술은 우기기이다. 예술은 질서의 바깥이다. 예술은 정언명령을 허위로 돌려보내기이다. 예술은 귀를 자른 고흐의 자화상이다. 예술은 기행이다. 예술은 끊임없이 밖으로 탈주하는 광기의 극한이다. 예술은 영악하고 교활한 고은이 아니라, 치기어린 우수에 젖은 채 생을 마감한 박인환이다. 예술은 차이다. 예술은 비동일성이다. 예술은 반복의 거부이다. 예술은 절대성을 허위로 치부하면서 스스로가 절대화되어 가는 과정이다. 박찬일 시인의 시 「금정동 예술가」는 예술이 창작되는 오묘한 순간의 마법적 떨림의 응시하고 있는데, 미란 규범과 질서의 내부에서 움터오는 평화를 비스듬히 세우면서 질서의 바깥으로 내달리는 행위이다. 따라서 미란 위반이 펼쳐내는 아름다움이다. 질서에 빗금을 치면서 질서 밖으로 모든 의식을 탈주시킬 때, 예술의 창조적 지평은 새롭게 현시된다. 박찬일의 「금정동 예술가」는 위반을 예술의 창조적 심급으로 바로 세우면서 일탈이 펼쳐내는 예술적 금기의 세계로 빠져드는 아이러니적 상황을 절묘하게 연출하고 있다.
모든 예술은 어기기고 궤도이탈이다. 불만족과 욕구불만. 파열하고 해체되는 주체. 이때 예술가는 기존의 미적 가치로 인해 정신착란을 일으켜 광기의 세계에 돌입하게 된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광기. 광기는 위반의 시작이자 미적 창조가 발생하는 동인이다. 시인 박찬일은 금기와 규율을 삼켜버리고 깨트리면서 새로운 미의 전범이 창조되는 예술의 운동성을 알레고리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위반과 정전 사이에서 빗어지는 예술의 즉자-대자적인 운동성 말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 서 있는 나무들
서어나무들이 풀어준 바다
지느러미 흔들며 시야에서 사라진 바다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 불빛을 빗질하듯
가을비가 내린다
마음을 따라 몸이 가는 것
마음을 따라 몸이 가는 것
바람에 섞여 비가 중얼거린다
저만치 물러간 밤바다가 남긴 갯벌에
게를 잡는 불빛 오르내리고
비 맞는 서어나무 아래
애를 태우며 설레는 빗발, 빗발
대부도에서 선재도 다시 영흥도로 이어진
이 길이 다시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묻는다
한 줄기 쇠사슬로 이어진
끊을 수 없는 운명
섬에서 섬으로 건너온 마음이여
먼 전생의 불빛을 그대 바라보고 있느냐
서어나무 가지 아래 비를 긋는
가엾은 인간의 마음을 갯벌에 촘촘히
박아놓고 간 어둠뿐인 바다 앞에서
―강인한 「섬에서 섬으로」,『현대시학』10월호
위반 옆에 항상 규칙이 있듯이, 맛깔스러운 말과 그 말 속에 아름다운 시혼을 채색하는 시인의 정갈한 의식이라는 시의 전범典範이 위반 옆에 항상 숨쉬고 있다. 풍요롭게 펼쳐내는 말들의 잔치, 그 말을 위무하면서 세상의 모든 사태를 투명하게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 미란 일탈적 위반과 전범 사이에서 탄주되는 영혼의 기호가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미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향한 순수한 기호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가 형상화되는 지점이 일탈적 위반의 극한을 치달아가든, 아니면 순결한 영혼이 펼쳐내는 아름다운 전범으로 향하든 상관없이 세계-내-미적 현상의 범주에 속하는 한 양식일 뿐이다.
강인한 시인의 시 「섬에서 섬으로」는 위반과 일탈이 펼쳐내는 도발적 사태의 묘사가 아니라, 애잔함과 따스함, 연민과 운명을 마음으로 잇대어놓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시적 전범에 해당한다. 시란 애초부터 분열적 사고를 매개 소통시켜 평정의 상태에 이르게 만드는 합일의 언어이다. 시의 정전은 위반이 펼쳐내는 새로움이 아니라, 일탈적 위반, 차이 나는 반복, 특발성, 그리고 우연적 사태를 필연적 구조 속에 안치시켜 이 세계 전체를 공통감이 지배하는 동일성으로 수렴시킨다. 투명한 의식의 눈으로 이 세계를 조응하면서 운명이 만들어 놓은 저 처연한 인연의 사슬을 가볍게 풀어 처지는 아름다운 시혼이 시의 정전이 아니겠는가. 강인한 시인은 몸이 펼쳐내는 인연의 길을 마음의 고운 결로 고양 승화시켜 섬과 섬 사이의 고립,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불협화음을 소통이 이루어지는 연기적 자장 내부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러나 마음의 길이 펼쳐내는 오묘한 사슬은 운명의 수레바퀴를 벗어날 수 없다. 하여 시는 운명이다. 시는 저 가엾은 인간의 운명 내부를 응시하면서 그 운명을 기술하는 전생의 흔들리는 생에의 불꽃이다. 따라서 인간의 운명은 시의 운명이고, 그 운명이 시 속에 깊이 아로새겨질 때, 그 운명은 찬란한 시의 정전이 된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하여 그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한 줄기 쇠사슬로 이어진 / 끊을 수 없는 운명’이 바로 시가 펼쳐내는 시의 정전이 아니겠는가.
아직 끝나지 않은 오늘 하루의 조업, 몽마르뜨 화방 주인을 만나고 맥도널드 담벼락에 기댄 인사동 쌍끌이 양화점 앞을 지나간다 레일 깔려 있는 경사진 조선소 같은 노점, 질척거리는 세상 파도를 내려다보는 쌍끌이 구두들 묵묵히 새 선장을 기다린다
다섯 번이나 투망한 그물, 찌겨진 하루만 갑판에 올라올 뿐 최저의 일당도 건지질 못한 어제의 조업 이제껏 연고자만 찾아다닌 나는, 재깍재깍 진종일 어군탐지기를 켜놓고 낯선 고객을 찾아 나서야한다
쭈빗쭈빗 어군탐지기록지에 나타난 날카로운 암초들, 그 거친 암초 주변에 점점이 찍혀 있는 연초록 고기 떼, 그러나 그물 낚아채 갈 암초들 때문에 투망할 엄두도 내질 못한다 경쟁업체의 영업사원들이 기획 상품 그물을 내려놓고 내가 노리는 어군魚群을 쓸어갈 태세다 재빨리 나는 지피에스GPS로 위치 선정을 한 뒤 줄줄 주룩주룩 그물을 투망한다 내 쌍끌이 저인망 구두 한 컬레가 그물 입 양끝자락을 물고 백여 미터의 길 그물주머니를 끌고 간다 암초 없는 뻘밭에 몸을 숨긴 갑오징어 무리, 해저 그물을 시속 4노트로 한 시간여 끌고 간 쌍끌이 구두 통통한 갑오징어 상자가 컨베이어를 타고 허옇게 냉동고를 들어가는 모습, 쌍끌이 저인망 구두의 오늘 하루 조업이 그지없이 풍요롭다.
―이초우, 「쌍끌이 양화점」, 『1818년 9월의 헤겔 선생』(현대시 시인선57, 한국문연)
세계는 미적 인식이 발생하는 동력인이다. 위반과 정전 사이에 세계가 있다. 그러나 이때 이 세계는 동일성의 세계가 아니라 비동일성으로 환원되는 극히 주관화된 창조성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시의 정전을 향한 예술혼도 새로운 미적 패러다임을 향한 위반의 미적 원리도 삶 내부에서 벌어지는 현실성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하여 예술은 ‘사이’다, 틈이다, 고통이다.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저 무섭고 두려운 알레고리적인 함정의 덫에 빠지기도 하면서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일 때, 문득 시인은 숭고하고 찬란한 상징의 숲을 응시하게 된다. 그러나 헤맨다, 방황한다, 갈팡질팡한다. 앞으로도 내달릴 수 없고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낭패. 시인은 저 절대의 상징의 숲에 헤매다 상징의 의미해독 앞에서 구원의 문에 이르게 된다. 계속되는 삶, 순환하는 이 우주, 그리고 어제와 오늘이 펼쳐내는 최저 임금에 생을 담보 잡힌 나약한 자들의 형상(어부와 영업사원).
세계는 수많은 ‘사이’들이 중첩된 지극히 주관화된 욕망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욕망은 승화되거나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상상계가 만들어내는 상상력과 판타지를 경유해가면서 실재계가 보여주는 저 엄존하는 파괴적이고 잔혹한 현실을 삐딱하게 응시하면서 죽음본능이 펼쳐내는 정지의 순간을 유예시킨다. 순환하는 삶, 살아 움직이는 세계. 이초우 시인이 바다라는 광대한 공간과 삶의 공간을 교묘히 병치시켜 세밀하게 인간 세계를 응시할 때, 생은 지고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초라한 형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생은 오늘이라는 하루의 시간이 펼쳐내는 처절한 싸움이다, 어군탐지기이다, 갑오징어다, 영업사원이다. 시인이 인사동 쌍끌이 양화점을 내달리면서 저 처연한 어부의 삶을 도심의 영업사원과 중첩시킬 때, 생은 동일한 경계면 위에서 탄주되는 다양한 운명성 자체로 모든 사태를 환원시킨다. 살아낸 어제, 처연한 생에의 시간, 그러나 살아내야만 하는 오늘이라는 하루.
이초우의 「쌍끌이 양화점」이 펼쳐내는 시적 표현 지점은 냉혹한 삶의 현장성을 피부호흡하는 치열함과 공간을 넘나드는 치밀한 상상력에 있지만, 그 생존게임을 빗어내는 내적 모티브는 절대시간 내부를 종주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성에 있다. 시간은 운명이다. 어제와 오늘, 최저일당과 풍요 그리고 삶을 사태를 빗어낸 시간 속에서 일희일비하는 인간군상들. 시간의 본질은 죽음본능이다. 시간은 죽음본능의 임계점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여성적 마조히즘의 폭력을 행사하지만, 이초우 시인은 그 시간의 본성을 아직 끝나지 않은 오늘이라는 즉자성과 생동하는 삶의 현장성으로 가볍게 극복해 간다. 생은 오늘이라는 시간의 무한반복이다. 그러나 그 오늘은 동일성이 아니라, 비동일성으로 피어나는 꿈과 소망을 간직한 풍요로움이다. 비록 그것이 최저임금에 저당 잡힌 삶일지라도, 시인 이초우는 어제의 절망과 궁핍 속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절대 시간 속으로 생의 모든 의미와 기호를 내파시키고 있다.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추하지도 않은 세계 속을 던져진 생에의 형식으로 내달리고 있다. 인사동 양끌이 양화점 앞에서 그는 이 세계의 처연한 운명성을 예인 중이다.
뜨끈하게 끓였으니 많이 먹게, 한겨울
잘 먹고 쉬어야 내년 봄 다시 일 나가지
하얀 김 뿜어내며 기분 좋은 듯
눈 한 번 껌벅이며 먹기 바쁜 누렁이소
할아버지랑 말씀 나누시는 줄 알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닮았다
여든 살 할머니가 소죽을 쑤신다
동이 트기도 전에 제일 먼저 일어나
가마솥에 물을 붓고 마른 볏짚과
콩 줄기 듬뿍 넣고 여물을 끓인다
더 구부러질 게 없는 허리를 잔뜩
굽히고 지게 한 짐 풀어 불을 지핀다
싸락눈 지분거리는 산골의 새벽 속으로
달그락달그락 가마솥 뚜껑 여닫는 소리
구수한 여물 냄새랑 할머니 옥양목 치마
서걱대는 소리 누렁이에게 속삭이는 목소리
지금까지도 달콤한 새벽잠을 흩어놓는다
여든 살 할머니가 소죽을 쑤신다
―김금용, 「여물 끓이는 소리」, 『우리시』11월호
시는 위반과 정전 사이에 위치한다. 시는 존재의 원상이다. 시는 잊혀지고 망각된 시간의 저편을 회상하면서 아스라이 사라져버린 시간의 한 지점으로 회귀하는 그리움이다. 따스한 마음과 빛바랜 추억, 그리고 그 사이를 면면히 이어져 내려가는 사랑. 시의 결은 마음의 결이 펼쳐내는 언어의 육화과정 내부에 존재한다. 저 처연한 죽음본능의 임계점을 망각하기 위하여 또는 죽음본능이 만들어내는 두려움과 공포를 잊기 위하여 시인은 추억으로 가는 내면 여행을 감행한다. 그리움, 잊혀진 것, 사랑, 사라져버린 것, 연민, 빛바랜 스냅사진. 김금용 시인이 추억을 안아 넘을 때, 그것도 문명사회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여물 끓이는 소리를 추억할 때, 시인의 시적 언어는 이 세계가 펼쳐낸 ‘사이’의 묘법을 주파해 들어가 ‘너머’의 세계를 응시하게 된다.
사라짐 너머에서 발화되는 미지의 그리움, 의식에서 잊혀지고 투명하게 기화된 시간. 김금용의 「여물 끓이는 소리」가 펼쳐내는 저 환영 같은 추억은 안온한 꿈이다, 사랑이다, 그리움이다. 비록 예술의 묘법이 위반과 정전 사이를 무한질주해가지만, 예술의 본질은 ‘사이’를 안아 넘어 ‘너머’의 세계를 응시하게 만든다. 비록 시인이 그리움과 애잔함 사이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추억하고 있지만, 그 추억은 삶의 이편(실재계)에서 벌어지는 냉혹한 현실성을 망각시킨다. 각박해져만 가는 세계, 너무도 빠른 디지털 코드, 나노미디어의 혁명. 세계는 무한히 도해되고 파열되어 아름다운 몽상이 만들어내는 인륜적 제의와 풍요로움을 해체시킨다.
그런데 김금용은 현대성의 디지털적 시간에서 이탈하여 아날로그적 금기 위반을 꿈꾼다. 판타지와 언어적 유희를 일삼는 시적 패러다임 밖으로 이탈하여 시간의 이편의 의미를 추억의 힘으로 내접시킨다. 물론 시인이 추억의 시간 속으로 모든 의식을 응고시킬 때, 그것은 퇴행적 낭만성으로 수렴하겠지만, 그러나 그 낭만적 퇴행의 시간은 삶의 흔적을 안아넘기이다. 생이었고, 삶이었던 시간을 추억하면서 안온하고 달콤한 새벽잠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 우리는 냉혹한 실재계가 펼쳐내는 야만성으로 벗어나게 된다.
― 《우리詩》2007.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