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기복례(克己復禮)
안연(顔淵)이 仁을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를 이기고 禮로 돌아가는 것이 仁이다. 하루 자기를 이기고 禮로 돌아가면 천하가 仁으로 돌아갈 것이다. 仁을 행하는 것은 자기로 말미암는 것이지 남으로 말미암는 것이겠느냐?”
안연이 말했다. “그 세목(細目)을 묻고자 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禮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禮가 아니면 듣지도 말고, 禮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 禮가 아니면 움직이지도 말라.”
안연이 말했다. “제가 비록 불민(不敏)하오나 그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仁은 우리의 내면에 있는 참된 본성이고, 禮는 仁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형식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모든 언행이 禮에 합치되면 내면의 仁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은 仁이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은 禮입니다. 인사를 하더라도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허례(虛禮)가 되겠지만, 마음속으로 공경하더라도 인사하지 않으면 그 마음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인사하는 禮를 지키지 않게 되면 공경하는 마음도 사라질 수 있고, 인사하는 禮를 반복하여 몸에 익히게 되면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禮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밥은 밥그릇에 담고, 커피는 커피 잔에 담습니다. 밥을 커피 잔에 담는다고 해서 밥이 변질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쁜 커피잔에 커피를 담는다고 해서 커피가 더 맛있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투박한 옹기 잔에 커피를 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근본적으로는 그릇에 담긴 내용물이 중요하지만, 그것은 담은 그릇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밥이나 카피는 눈에 보이지만, 사람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밥그릇 속에는 밥이 담겨 있고 커피 잔 속에는 커피가 담겨 있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처럼,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태도와 행동을 보고 그 속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克己復禮’는 仁者가 되는 길입니다. ‘克己’는 ‘克伐怨欲’을 이기는 것입니다. ‘復禮’는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모든 행위가 禮에 합치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겉만 번지르르 하게 꾸미는 ‘巧言令色’이 되어서는 안 되며 진심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