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평
도(道)의 현상학과 은자의 공간
박경원 시집 ‘시멘트 정원’ (민음사 2001)
김혁
1. 실낙원에서의 구도(求道)
존재의 집에 달려있는 투명한 창은 우리 내면을 바깥 풍경과 이어주고 있다. 무수한 유리 입자들을 통해 조율된 바깥 풍경은 어느 연인이 그러했듯이 불안하게 다가와서는 어느덧 내면에 확고히 자리잡은 조형물과 같다. 이 조형물 속에서 우리는 별 탈 없이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근대문명의 운명은 바로 이 조형물의 견고성 여부에 달려 있는 셈이다.
그런데 박경원은 ‘견고함이란 때로 위험하기 짝이 없다(「담이 긴 집」).’고 단언하고 나선다. 시인은 견고함을 거부함으로써 우리 내면에 덧씌워진 근대적 조형물의 조악성을 폭로하고자 한다. 내면과 풍경 사이에 나타나는 이 같은 숙명적인 불일치가 그의 시에서는 실낙원으로 도래한다. 그에게 낙원을 잃었다는 자각은 현실과 거리를 취하는 시적 공간을 가능케 하는 지점인 동시에, 그 이후에도 줄곧 조형물의 견고함을 부수는 도구로 계속 활용된다.
그는 근대 문명의 조악성을 “시멘트 정원”으로 폭로하고 있다. 시인은 ‘시멘트’와 ‘정원’이 나란히 붙어 있는 이 낯선 조어 속에, 내면과 바깥 풍경 사이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긴장의 실상을 숨기고 있다. 정원이라는 고전적인 이상이 숨 쉬는 말랑말랑한 질감 위에, 시멘트라는 문명적 기도가 덧씌워진 시멘트 정원에는 이미 정원의 본 모습이 아니라는 실낙원의 탄식이 도사려있다.
그가 묘사한 시멘트 정원은 “잘 정돈된”, 그리고 “가공된 잎들의 푸르름”을 가지고 있는 견고하게 완성된 조형물이었다. 이 그럴듯하게 보이는 조형물로부터 소년은 어느덧 빠져나가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소년의 관심이 잘 정돈된 정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시멘트 연못, 가공된 잎들의 푸르름을 뛰쳐나가/
때로는 반나절이나 모습을 감추었다 (「시멘트정원」)
소년은 이 거짓된 정원에서 뛰쳐나와 “예상을 뒤엎는 얘기”로 자신의 정원을 회복하려 한다.
숲속 웅덩이에서 목격한 무지개/
발밑을 기어다니는 산성의 벌레들/
태양과 낮달이 지배하는 두 개의 하늘/
왼손이 만진 감촉과 오른손이 경험한 감촉도 사뭇 달랐다/
낯선 꽃을 설명할 땐 미끄러운 물체를 다루듯/
식탁 옆 물 빠진 어항에다 그 조그마한 경험을 담아 두었다/
집안 전체가 얼마 못 가 아이의 경험으로 꽉 채워졌다/
......(중략)......(「시멘트정원」)
소년과 정원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감은 곧 근대문명과 맺은 시인의 뒤틀린 갈등을 반영한다. 소년이 체험한 “왼손이 만진 감촉과 오른손이 경험한 감촉”의 불일치는 메를로 퐁띠가 세잔느의 그림에서 발견한 감각의 지속적인 불일치와도 같다(메르로 뽕띠(권혁면 옮김). 「세잔느의 회의」, 『의미와 무의미』, 서광사, 1985.). 왼손이 만진 감촉과 오른손의 감촉이 같을 것이라는 전제는 감각의 우연성을 배제한 근대문명의 표지로 독해된다.
이 불일치를 느낌 그대로 발화하고 있는 소년은 그 발화야말로 그 단단한 표지를 해체할 수 있는 도구임을 안다. 이 불일치를 “한겨울, 뽑힌 말뚝을 본” 그 자리에서(「말뚝2」), “한때 물고기가 헤엄친 듯 비릿한 그늘”이 남아있는 흙 연못에서(「흙 연못」), “젊은 방황”의 “이야기 꽃”이 가득 들어차 있던 공간이 “복수와도 같은 꽃가꾸기”로 파괴된 “담이 긴 집”에서(「담이 긴 집」), “두 바퀴만 달랑 남기고 겨울 쪽으로 굴러” 가던 “바람 빠진” “녹이 슬어 윤곽조차 희미한 열쇠구멍"을 가진 나무에 묶인 자전거 앞에서(「나무에 묶인 자전거」), 일전에는 “대가 모두 숲”이었던 “빌딩과 아파트”에서(「잃어버린 열쇠」) 목도하고 있다.
목도의 결과 현재의 그 자리들은 모두 과거의 낙원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시인은 의미와 무의미, 희망과 절망의 두 축 사이에서 끊임없이 맥놀이하고 있다. 절망이 기조이고 희망은 반동이다. 실낙원에서의 맹목적 희망이 시지프스적인 기만임을 그는 이미 깨닫고 있는 중이다.
덜 꺼진 가로등이 시야의 속눈썹을 박제시킨다. 지난밤은 짧았다/
.......(중략)......
지금 나는 졸립다/
군것질처럼 잊어버리는 방법을 이미 창밖에 상실당한 나이/
한 무리의 여학생이 흰 입김을 의논하면서 버스에 오른다/
지금이라도 당장 ......꼭 닫힐 것 같은 죽음이 윗눈썹을 내 리눌렀다
(「화석시대」)
이 실낙원에서의 긴 하루 밤은 시인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경험이었다. “묘지로 향하는 산 및 정류장”에서 “지난밤 막차가 다시 첫차가 되어 떠나려”하는 그 버스에 몸을 싣고 있는 자신을 본다. 그 출발점에서 그는 벌써 “졸립다.” 가야할 길이 묘지이기에 그에게 희망이란 없다. 버스에 오르는 여학생들의 밝은 재잘거림이 그의 절망을 더욱 부추긴다. 절망적인 현실에서 맹목적인 희망이 당착하는 곳이야말로 오히려 죽음의 징후가 드러나는 곳이다.
이와 같은 불일치를 끊임없이 포착하려는 박경원의 미시적인 헤아림은 그도 결코 의도하지 않았을 리얼리즘의 성취를 낳았다. 그가 포착한 현실은 결코 직선적이지 않다. 그 현실은 죽음의 장소로 향하는 꼬불꼬불한 산길 위에 있다가, 다시 갔던 길을 되돌아 오기도 하며, 그 회상의 지점으로부터 다시 권태로 가득 찬 골목길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 리얼리즘의 구도 속에 그려놓은 주체의 역정에는 우리 내면에 뿌리박힌 자아의 도상이 서려있다. 이 숙명적인 도상이야말로 근대적 조형물이 해체된 자리에서 그가 예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게서 구도자로서의 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 대목이다. 그리고 도(道)라는 개념 없이 그에게 접근하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도는 전통을 빙자한 낭만주의자들의 도구가 아니다.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다. 그에게 도란 근대적 조형물의 조악성을 들추어내는 “무딘 칼(「분지」)”이자,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고투의 도구였다. 좌절 속에서, 그리고 무의미 속에서 막혀있는 절망을 그는 도의 독법으로 풀어내려 한다.
도는 희망과 절망, 의미와 무의미 그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절망은 자신의 바닥에서야 희망을 잉태하고 있고, 절망은 희망의 끝에서 자신의 울음을 터뜨린다. 그래서 그는 낙원을 잃어버린 자리에서, 이전에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을 낙원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드러난 현상 속에서 숨겨진 다른 편의 짝을 상기해 내고자 한다.
또 그렇다고 그의 시에서 의미를 차이로 지어내는 구조주의자의 서툰 칼질만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구조주의자들은 이 편에서 의미를 형성할 수 없을 때, 다시 저 편과 대립시켜 의미를 구성하는 변증술에 익숙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이 시인의 진면목이 아니다.
붉게 잘라낸 수박 속에서/
장마의 흔적이 묻어난다/
......(중략)......
칼을 세워, 장마의 반대쪽을/
살핀다.
(「홍수」)
도라는 것이 대립적인 양면을 초월하고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도에 대한 어설픈 오해이다. 도는 엄연히 현실의 안에 있으며 대립되고 화합하는 현실의 운동 그 자체이기도 하다. 도가 자기 운동을 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의미의 구현이 인간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도를 실현한다는 것은 도가 자신에게 실현되고 있는 실상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도를 실현하고 도는 인간에게서 실현되는 것이다. 이때 도가 갖는 인과의 힘은 자연과 인간에 처절히 관철되고 있다.
그래서 도는 항상 무자비하다(“하늘과 땅은 무자비하다 天地不仁” 『도덕경』). 이 점을 시인은 깊이 인식하고 있다. 수박 한 덩이에 서려있는 싱거움은 장마의 흔적이며 결과이다. 세워진 칼에는 이 사실의 냉엄한 현실을 입증이라도 해주는 듯 단호함이 묻어 있다. 시인은 “장마의 흔적”이 묻어나는 이 싱거운 “붉게 자라낸 수박”을 썰면서 수박의 싱거운 현실이 홍수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취해 낸다. 칼을 세워 수박을 썰며 현상을 연기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을 그는 익히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보기보다 꽤나 어려운 정신적 긴장을 요구한다. 그는 스스로의 시작(詩作)을 “빨갛게 언 사과”를 깎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빨갛게 언 사과를 꺼내어 살얼음 같은 이야기를 벗긴다/
좁아졌다 넓어지는 기억의 뇌리를 좀더 얇게 발라내기 위해선 불필요한 희망,
어설픈 호흡에 뒤섞여서도 안 된다/
흰 살 속 어딘가에 고스란히 피어 있을 것 같은 그 꽃/
그래 나는 이야기를 찾는 게 아니다/
창밖 흰 위를 가로지른 한겨울 발자국의 정체가 궁금한 것도 아니다/
......(중략).......
붉지도 표백되지도 않은 꽃 한 송이 찾아내면 그뿐/
.......(하략)......
(「원색의 계절」)
그에게 시를 짓는다는 것은 “기억의 뇌리를 좀 더 얇게 발라내기 위해” “불필요한 희망, 어설픈 호흡”에 뒤섞여서는 안 되는 고도의 정신적 긴장이 요구되는 행위이다. 그 목표는 바로 “꽃 한 송이”를 구하기 위한 것이다. 도는 구도자와 동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기에 꽃 한 송이는 사실상 그가 사과를 벗기는 행위 그 자체에 있다.
시인은 자신의 거친 호흡을 사물의 고요함에 맞추어 나가고 있다. “좁아졌다 넓어지”며 반복되는 칼질을 통해 깎여나가는 사과껍질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본다. 사물의 질서는 인간의 내면 그 자체와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 언표될 수 없다(“도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된 도는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도덕경』).
그의 진리 인식은 이야기를 추구하거나, “한겨울 발자국의 정체”를 궁금하게 여겨 추구하는 플라톤 식의 존재론적 진리관과는 거리가 멀다. 사물의 질서 안에 도가 있음을 알고 자신을 사물의 질서에 안착시키면 그만인 것이다.
여기서 그가 추구하는 시작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과 만나게 된다. 그에게 시란 그것을 통해 무엇을 구하거나, 또는 그것에 의해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수단이 결코 아니다. 그저 사과를 깎는 서툰 칼질일 뿐이다.
이제 시인은 저 ‘시멘트 정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 수 있을 만큼 성숙해 있다. 실낙원에서의 구도는 실낙원을 벗어나서는 성취될 수 없다. “빨갛게 언 사과”안에 “붉지도 표백되지도 않은 꽃 한 송이”가 있듯이, 실낙원 안에 낙원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닫고 있다.
2. 은자의 연대기
실낙원에서의 구도자는 확실히 고대의 은자를 닮아 있다. 은자 중에서도 시은(市隱: 저자거리의 은자)에 가깝다. 은자는 ‘세속의 사람들’ 속에 섞여 살면서도 자신의 정신적 독립성이 한 수 위임을 과시한다. 은자는 현실의 고뇌 속에서 스스로를 세상과 격리해 냄으로써 정신적 독립성과 초월성의 자부심이 흉간에 가득 찬 자들이다.
그러나 이 초월성의 중심에는 세속적 현실의 압박이 있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시인을 은자와 닮았다고 하는 것은 정신적 초월성과 현실적 구속 사이에서 벌어지는 행간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정도의 의미이다.
박경원의 초월과 구속에 대한 독법은 그의 자아관과 깊이 연관되어 나타난다. 그는 자신을 물적 구조의 일부로 바라봄으로써 ‘나’란 것(物)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내놓는다. 여기서 자아에 대한 시인의 지독히 냉철한 통찰과 마주하게 된다.
다시 세월의 입자로 태어나기 위해 난 수많은 시간을 말렸다/
......(중략)......
그러나 아직은 먼지가 아니라 먼 조상의 눈빛,
흑백의 무덤덤 속에 기생하는 일종의 무료함일 뿐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건조함을 가다듬고 현실의 입면체에 이마를 맞대는
길고도 지루한 숙명이 거듭된다/
......(중략)......
나는 먼지다 아직은 자유롭지 못한 현실 속 환상이다/
곧 창가로 다가가 6월의 가족사를 환기할 수도 있고, 햇살은 참 위태롭다
(「먼지2세」)
시인은 자신을 “나는 먼지다. 아직은 자유롭지 못한 현실 속 환상이다.”라고 고백한다. 먼지로 표현된 자기는 “세월의 입자”다. 그리고 혈연적 연대기의 끝에 위치한 자아이다. 조상의 피를 타고나 존재하는 이 자아는 혈연에 의거하여 나타나서는 현실의 세속적 무게를 이겨내고자 한다.
그는 먼 조상의 눈빛을 의식하면서 자아의 의미를 형성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흑백의 무덤덤 속에 기생하는 일종의 무료함”일 뿐이다. 즉 그에게는 이 자아가 무의미로 비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자아이기도 하다. 이 자아는 정신적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사막을 건너온”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며 부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나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현실의 입면체에 이마를 맞대”고 고투하기 위해선 자기의 정신적 계보를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각성하고 있다. 시인은 이 고투를 “숙명”으로 풀이하고 있다.
다음의 시는 그가 자신의 혈연적 연대기를 얼마나 처절히 직시하고 있으며 굴레로 느끼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어쩌다 옷을 입거나 벗다가 어두운 내부를 본다/
......(중략)......
어렵게 열린 빗장뼈 아래에서 발가락을 핥고 있는/
태아기의 내가 들비친다/
호흡을 끌어안다가 당한 갑작스런 흥분과 좌절/
다시금 엉거주춤 들이마시는 호흡의 객관성과/
때와 장소에 밪춰 혈액의 출입을 조절해 주는 감정의/
때묻은 문지방까지 훤히 드러난다/
......(중략)......
한스푼 쯤 정전기 제거제를 그 위에 뿌렸다.
(「안」)
어느 날 자궁을 닮은 세탁조 안으로 자신의 세탁물을 집어넣다가 그는 그 안에서 자신의 태아기와 우연히 마주친다. 자신이 탯줄에 안착하여 호흡을 배우고 피의 펌프질을 반복하는 환상 속에서 피의 숙명성을 배운다. 그는 자신의 현실을 혈연의 연대기 끝에서 찾아내고 있다.
이 핏줄에는 현실적인 책임이 무겁게 고여 있다. 시인은 현실적 구속이 혈연적 연대에서 온다고 보고 있다. 여기서 현실적 구속이란 현실적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행하는 노동을 창출하는 계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 연대기를 거부함으로써 현실적으로 강제된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은 그가 시인으로서 갖는 중압감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한스푼 쯤 정전기 제거제를 그 위에 뿌렸”던 것인가?
이 같은 피의 숙명성은 다음과 같은 어머니의 모습으로 환치되어 등장한다.
나는 어머니 애기를 들이마시고/
베란다 밖 나비는 여름장미를 들이마신다/
.......(중략)......
창밖 흰나비를 본다 뚝, 끊어지는 실에 묻어 있을/
어머니의 의치자국을 못내 외면하면서/
나비와 꽃의 거리가 머리판처럼 새겨지는 느낌만 본다/
......(중략)......
나는 가부좌를 풀고 나와/
최초의 걸음을 떼듯이 너울너울 베란다로 향한다
(「금지된 오후」)
여기서 베란다 바깥 풍경의 자유에 이끌리는 나는 어머니와의 숙명성을 구속으로 풀이한다. 나는 베란다 밖 자유의 유혹을 못 이겨 혈연적 연대기의 징표인 “어머니의 의치자국을 못내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느끼고 있는 현실의 중압감은 이와 같이 구체적으로 혈연의 연대기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 현실의 압박감을 “못내” 그래서 억지로 외면할 정도로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서도 자유와 혈연적 구속은 서로 대립 항을 이룬다. 그런데 그가 구속의 “가부좌를 풀고 나와” 만난 베란다 밖의 공간은 어떠하였을까?
바깥공기들과 거실 가전제품들이 동시에 별거중인/
베란다 유리를 팔의 안쪽 근육으로 힘차게 연다/
그곳/
나의 관심이 끝나는 지점부터 시력을 되찾는 개구리 울음이/
있었고/
나의 귀가 잘려지는 지점부터 청각을 되찾는 당나귀 같은/
나무들이 있었다 그리고는 봄, 밤이었다
(「한밤중에 숲을 보았다」)
여기서 나는 베란다로 나아가 유리 문을 연다. 그곳에서 “나의 관심이 끝나는 지점부터” 시작되는 압도적인 힘을 만나게 된다. 멀리 보이는 당나귀처럼 당당한 나무들과 마구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 이 모든 환희들이 내 감각을 벗어난 지점에서 되밀려 온다.
“귀가 잘려지는 지점에서” 시각의 나무들이, 시각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청각의 현실이 떠오름으로써, 나의 감각을 압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인의 자연에 대한 태도가 모더니스트 정지용이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다(「春雪」)”고 한 발화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 것일까?
박경원의 자유는 자신을 세계와 고립시키고자 하는 지점을 발견하려 한다는 점에서 외견상 모더니스트와 유사해 보인다. 실질적으로 그곳에 담긴 내용은 사뭇 다르다. 모더니스트는 감각의 고립에 의거하려 하지만, 그에게는 감각조차 가설된 지렛대에 불과하다. 은자가 시작하려하는 지점은 오히려 감각이 끝난 곳이다.
그곳은 장자의 붕새가 먼 여정을 꿈꾼 곳이기도 하다. 그는 움직임이 시작하는 거대한 기운에서 현세를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를 찾는다.
그래서 모더니즘의 자유가 자기 감각의 자유를 의거하였다면 박경원은 진정한 자유야말로 도에 구속되는 데 있다고 믿는 듯하다.
내가 만일 경전을 풀어내듯/
오래 나는 새가 된다면/
둥글고 검은/
7월의 구름 속을 아무 거리낌도 없이/
날아다니는 새가 된다면/
반면에/
입구가 좁아 깃털 한줌/
꺼낼 수 없는 병이 있다면/
나 9월의 그곳/
하늘 속에 들어가 시를 읽고/
끊긴 편지의 옛 사연을 읽고/
병의 입구까지 튀어 오르는/
분교 운동장의 공놀이를/
내려다보면서/
사과술처럼 시큼 익어가겠네
(「병(瓶)속의 새」)
자유롭게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진 새는 왜 스스로 병 안으로 들어간 것일까? 일반적인 도식에서라면 병은 구속이고 새는 자유이다. 그런데 박경원은 이 도식을 뒤엎고 있다. 오히려 이 시에서 새의 진정한 자유는 병의 구속을 통하여 성취되고 있다. 도에 자발적으로 구속되는 것이야 말로 초월의 유일한 방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억압/자유의 근대적 도식 쌍은 그에게 설익은 도구 이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도구로부터의 이 같은 비판적 거리는 “남들은 自由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服從을 좋아하야요(「복종」)”라고 한 한용운의 호흡과 분명히 닮아 있다. 그는 “하늘 속에 들어가 시를 읽고/ 끊긴 편지의 옛 사연을 읽고/ 병의 입구까지 튀어 오르는/ 분교 운동장의 공놀이를/ 내려다보면서/ 사과술처럼 시큼 익어가”고 싶다고 술회하고 있다. 한용운이 님이라는 진리에 복종하기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구도를 추구하였다면, 박경원의 구도는 내면의 성숙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미학적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모더니스트는 감각으로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반면, 포스트모더니스트는 감각이 끝나는 곳에서 세계의 해체를 예언한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스트는 모더니스트와 지평을 같이한다. 그러나 은자는 이와 다르다. 감각이 끝나는 곳에서 그의 세계는 시작하며, 일찌감치 다다른 그곳에서 회귀하는 세계를 맞이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감각을 집어삼키는 압도적인 세계의 운명에 자신을 맡긴다. 이 압도적인 힘이 자신을 포함한 이 세계의 내면을 이루고 있다고 선언한다면 그것으로 종교적인 외피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선언하기보다는 숨는 쪽을 택한다. 숨는 행위는 세계를 자발적으로 거부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이상화함으로써 세계와 긴장을 유지하려는 문화적 기도가 된다.
3. 은자의 공간
박경원의 시에서 은자가 시인으로 등장한 지점은 그가 세속적 공간을 거부하면서도 그곳을 잠깐 넘겨보려는 그의 외도가 시작하는 곳이다. 그는 자기 내면의 한쪽 부분을 세속적 공간에 열어놓음으로써 그것을 시적 발화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다.
그는 세속과 자기 공간의 접경으로부터 초월하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박경원은 은자의 공간을 형성하려 했던 시인이다. 그에게 시란 자신이 세계로부터 얼마만큼 거리를 취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돌출 간판인 동시에, 세계와 맺는 진정한 관계를 암시하는 은밀한 연애편지와도 같다.
박경원은 이 경계의 지점에서 애써 균형을 잡아보려 한다. 그 곳이 그의 시적 발화가 가능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잡풀만이 무성한 연못에서 그 이전의 비린 물고기들을, 빌딩뿐인 도심의 그림자에서 그 이전의 푸른 녹원을, 책의 활자에서 나무들을 각각 상기해 냄으로써 파편화된 현실을 소통시키려 하고 있다.
그는 비극의 원인을 이와 같은 망각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제 실낙원에다 낙원을 세우려 애쓰기보다는 좀 더 다른 시각에서 사물에 접근하고자 한다.
여름철, 소들의 천적은 등에였다/
.......(중략)......
여름 내내 등에는 소에 대한 능숙한 악사(樂士)였다
(「등에」)
여름철 내내 소를 괴롭히던 등에는 어느 새 능숙한 악사로 둔갑해 있다. 소는 등에와의 갈등을 통해 고통스럽게 둔중한 꼬리를 움직인다. 이것이 소와 등에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이요 비극이다. 그러나 결국 그로 인해 음악을 연주하는 꼴이 된다. 시인은 이제 삶에 내재한 이러한 긴장을 아이러니로 바라볼 줄 아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자아와 세계, 내면과 바깥풍경, 과거와 현재 이 모든 대립 쌍들을 도의 견지에서 보면 결국 아이러니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을 아이러니로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소와 등에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연대적 삶으로 이끄는 전제가 된다.
그는 이제 잃어버린 그래서 이미 없어져 버린 낙원을 시간 속에서 구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을 환기할 수는 있지만 복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공간적인 소통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
시간을 따라가는 연대기의 대립 항은 이제 공간 안으로 투사된다. 이 진동은 도시와 산, 정신과 노동, 지식인과 민중 등의 대립 항으로 요동한다. 이 쌍들은 사실상 한 공간에서 함께 일어나서 갈등하고 있지만 이것들을 쌍으로 이해하는 것은 동시에 소통을 위한 준비를 의미한다.
그가 들에서 만난 마을은 이제 산의 가파른 구도와 도시의 늘어진 쾌락 사이를 이어줄 평안의 공간으로 떠오른다.
......
읍의 서남쪽, 초저녁 다리 위에 한 아이가 달려간다/
푸른 옷에 얼비친 낡은 난간이 이끼처럼 빛난다/
자전거 쇠바퀴를 굴리며 뻥 뚫린 둠벙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멈춘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아이의 모습이 먼데서 보면 푸른 물음표 같다/
그 위에 별도 하나 떠 있다(「읍의 서남쪽1」)
그 읍 서쪽엔 밤마다 낮은 습습함으로 별이 떠간다/
외곽도로 붉은 가로등에 부어오른 달, 하류로 흐르면서 초생달로 변한다/
풀들은 하류를 향해 더디더디 고개를 숙이고
여름 가기 전
한번 몰려온 구름들 모래펄의 지형을 바꾸고는 찢긴 하늘 몇 담아놓는다/
그 위를 불안스런 딱딱함에 의지하며 중년 여자 하나 양산을 쓰고서 건넌다
(「읍의 서남쪽2」)
그는 읍의 서남쪽 한 켠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을 말간 수채화로 채우려 한다. 그 속에는 평화가 숨 쉰다. 풀들이 “더디더디 고개를 숙이”는 저 느린 풍경 속에서 시인은 마지막 귀착점을 찾고 있는 중이다.
그곳은 바로 시인이 병속에 들어가 내려 보려 한 “분교 운동장”이다(「병(瓶)속의 새」). 그 운동장에서 “초저녁 다리 위”를 한 아이가 달리고 있고 “중년 여자 하나 양산을 쓰고” 또 그 다리를 건너고 있는 장면이 엿보인다. 이제 시인은 은자가 가는 느릿한 행보를 옮기고 있다. 광열하는 도시도 적막한 산도 아닌, 넘어다 보이는 세속의 들에서 자신의 발을 끌고 있다.
그래서 은자의 자취는 한낮의 작열하는 활극 속에서도, 깊이 침잠하는 밤의 수렁에서도 결코 찾을 수 없다. 백주의 열광과 시끄러움이 소멸되는 저 들판의 소실점에서, 이 편과 저 편을 동시에 넘나보는 경계의 공간에서만 은자는 자신을 잠시 노출시킬 뿐이다. 그래서 저 들판은 세속과 탈속이 만나는 경계의 지점이 된다.
이 들녘에서 그가 만난 사람들, 그들은 그의 혈연으로 얽혀있는 가족사의 고통이 가득한 유년으로부터 그를 문득 벗어나게 해줄 그의 이웃들이다. 시인은 이제 낙원이 바로 그들과 맺는 연대감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고통을 서서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듯하다.
바람이 몰려온다/
높은 곳 고요와 방금 되살아난 펌프물이 함께 수런거린다/
목책 안, 공동의 사회를 이루던 소들이 풀밭 반대쪽으로 밀려난다/
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차츰 누더기로 변한다/
입에 쥔 풀 힘껏 물어보지만 매번 헛수고다.
입 안 가득 되새김질만 고일 뿐 푸른 집착 더는 씹히지 않는다/
맞겹쳐진 의자 사이 신문에 덮여있던 그가 풀풀 잠을 털었고/
창 아래 횡단보도 불빛은/
일사병에 걸렸는지 붉지도 푸르지도 않았다
(「풀」)
들에 사는 민초들의 삶의 역경은 누가 보아도 처참하다. “입 안 가득 되새김질만 고일 뿐 푸른 집착 더는 씹히지 않는” 밑 모를 절망을 나는 그들의 안에서 체험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시인의 동정과 불안감은 골재채취의 현장에서(「골재채취 길」), 포클레인이 벌목하는 자리(「벌목」)에서 극대화된다. 그 순간마다 시인은 주춤거린다. 그래서 “일사병에 걸렸는지 붉지도 푸르지도”도 않다는 자조를 내뱉고 있다.
당나라 말기의 시인 백거이가 들에서 만난 농민에게서 느낀 자괴감도 이와 같은 것이었을까. 시인은 그들과 자신과 손을 맞잡는 꿈을 꾸면서도, 동시에 거리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숙명을 느낀다. 그래서 “며칠째 약초를 캤는지 언 혀처럼 붉게 물든 산허리를 잡고” 돌아오는 김노인을 만났을 때, 그는 “좀더 멀찍이 물러난다(「벽지」).”
그런데 시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려 한다. 그는 더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려 하고 있다.
저녁이 오기 전 닿을 수 있는 마을이다/
......(중략)......
면소재지에서도 빼꼼 훔쳐볼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 남아 고단한 습관에다 삶의 밑줄을 칠 사람은/
따로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중략)......
지금 나는 그곳을 찾아가는 길이다/
무위를 배우러 가는 길이다/
......(중략)......
아직은 내가 왔다는 기척을 내서는 안 된다
(「푸른 노트에 적다」)
바로 이웃에 있는 사람들과의 사이에 쳐놓은 담 하나가 은자에게는 그의 시가 발원하는 곳이었다. 그 경계를 통해 현실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원근을 재어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시인은 동시에 그것을 언젠가는 넘고 말리라는 장애물로 여겨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그 담 주위를 맴돌며 망설이고 있다. 이 딜렘마에서 그는 다시 조그마한 용기를 내고 싶은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지금 “면소재지에서도 빼꼼 훔쳐볼 수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 은자는 지금 “고단한 습관에다 삶의 밑줄을” 친 사람들에게 “무위를 배우러 가는 길”이다.
그런데 그가 앞으로 겪을 은거와 연대성의 행로가 어떻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그는 이미 낙원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는 연대성에 익숙하지 않다.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그도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였을 뿐이다.
은자의 공간에서 연대성은 결코 평탄하지 않으리라고 여져진다. 바로 이 점이 지금도 뱃속에서 시큼 익어가고 있을 그의 다음 시를 엿보고 싶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혁: 1964년생. 대구시 거주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교수
문학 평론가,역사학 연구자
첫댓글 당시, 양장본을 사양하고 누구든 선택하라는 서평을 사양하고 끝내는 작가상은 시가 아닌 소설이 받아야 한다는 시상식에서의 취중 한마디와 함께 건너온 세월이 제법 길었군요.. 의례성이 거추장스러웠음일까요.. 그런 중 정신문화원에 계시던 김혁 선생님의 비무장적 서평 한뭉큼은 제 어두운 계절의 커다란 풍향계였음을, 다시금 선생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