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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인가 아마도 여기 나인틴 카페에
문근영 외할아버지 이야기와 국정원 새끼들
문근영 괴롭히던 (좌익효수)글 올린적 있죠.
오늘 올리는 글은 1980년 광주에서
있었던 문근영 외가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신애덕 여사는 배우 문근영의 외할머니임.
유소영은 배우 문근영의 큰이모.
계엄군 총탄에 맞아 돌아가신
유영선은 배우 문근영의 작은 외할아버지임.
일가족, 분단과 독재의 칼날을 헤치며
증 언 자 : 유영선(남)/신애덕(형수)
생년월일 : 1952(당시 나이 28세)
직 업 : 대학생(현재 사망)
조사일시 : 1989. 1
개요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전후하여
4명의 사복경찰이 집으로 찾아와
당시 조선대학교 약대 4학년에
재학중이던 유영선 씨의 조카
유소영씨를 연행해 갔다.
다음날부터 온 가족이 유소영 씨를
찾으러 날마다 시내를 돌아다녔다.
유영선씨는 26일 총을 지급받아
도청을 지키던 중 27일 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에 이마를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이 증언은
유영선씨의 형수 신애덕씨가 대신했다.
나는 남원에서 중학교를 졸업했다.
얼마나 공부가 하고 싶었던지
하루에 한끼만 먹을 테니 학교에
보내달라고 아버지를 졸랐지만
곤란한 생활이 더 이상은 공부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후 광주로 와서 전남방직에 다니던 중
총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붙잡혔다.
16살의 어린 나이로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고 풀려났다.
석방된 후 남원에서 잠시 지내다
다시 광주로 와 홍안과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약 3년을 간호부로 일하는 동안
나는 주사를 잘 놓기로 유명했다.
내 나이 열아흡 살 죄던 해에 6·25가
발발했다.
그해에 나는 인민군에 입대하여 마산까지
진격했다가 다시 남원으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지리산으로 입산했다.
지리산에서는 뱀사골,달궁,노고단 등지를
돌아다니며 살았다.
나는 간호부로 일하면서 끊임없이
교육을 받았다.
지금의 내 남편(류낙진)도 같은 시기에
입산하여 활동하다가 2년만에 먼저
붙잡히게 되었다.
『남부군』을 보니 감회가 깊다.
그 책에 '동면면당'을 만났다고 한 것이
바로 우리들을 지칭한 것이다.
대공세기간에 20일간을 물만
먹고 숨어 살면서 무척 고생했다.
그래도 남편이나 나나 명(목숨)이 참긴가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던 지리산에서도
살아난 것을 보면‥‥
나는 입산한 지 4년 만인 1953년
9월 23일 전라북도 임실에서 허벅지,
등, 무릎, 발바닥에 총 4방을 맞고 붙잡혔다.
그 후 지금의 남편이 복역중이던
교도소로 면회간 것이 인연이 되어
석방된 뒤 결혼하게 되었다.
내가 결혼할 당시 시동생(유영선)은
겨우 일곱 살이었다.
시어머님이 계셨지만 워낙 연로하신지라
내가 키우다시피 했다.
도련님도 나를 어머니처럼 여기고 잘 따랐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아들 같은 느낌이다.
결혼해서 처음 몇 해는 남원에서
살다 광주로 이사와서 나는 무면허 '산파'를 했다.
당시 소파수술을 맡이 하여 돈도 왜 벌었다.
그래서 남원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한
도련님을 광주로 데려와 다시 계림국민학교
6학년에 전학을 시켰다.
내가 하던 조산소 일이 잘되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내 기술과 도련님의 자격증'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듯싶어 나는 도련님을
의대에 보내기로 했다.
재수하여 의대를 지원했으나 실패하여
다음해에 전남대학교 공대에 입학했다.
1971년 남편이 보성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였다. 방학동안에 제주도를
갔다 온다고 며칠 집을 비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기간에 북한을 갔다 온
'고정간첩'이라 하여 4월 1일 붙잡혀
'반공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살던 중
1988년에 20년으로 감형되어
광주교도소에 복역중이다.
남편이 정말로 '고정간칩'으로 활동했는지의
여부는 아직 확인해 보지 못했다.
당시 동명여중에 다니던 큰딸(유소영)은
칠판에 '간첩유락진 체포'라고 씌어진 글을
보고 아버지의 구속 사실을 알고 기절했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며칠이 지난 뒤 학교로 담임선생님을
찾아갔을 때 "본인이나 가족이 원한다면
전학을 시켜줄 수도 있다"고 했으나
내가 사양했다.
"그 사실로 인해 비뚤어지지 않고
무사히 극복할 수 있도록 지도할 테니
선생님께서도 많이 도와주세요"라고 말했다.
그 후 자식들이 아버지 때문에 열등의식을
갖고 좌절하지나 않을까 무척 고심했다.
자주 학교에 찾아가 선생님들과
의논하면서 자식들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
노력한 결과 모두 공부도 잘하고 건전한
사고방식을 지녔다.
남편 없이 30여 년을 시동생 2명과
4남매의 교육 등으로 생계유지를 위해
거의 안 해본 일이 없다.
새벽 1시에 터미널에 나가 깨죽도 팔고,
보험회사 세일즈도 하고, 들깨장사도 하여
대학까지 보내고 지금은 모두 출가시키고
막둥이 한 명만 남았다.
이젠 힘든 일은 다 끝낸 셈이다.
1980년 5월 17일 자정쯤 되었을 때다.
사복형사 4명이 총을 메고 집으로 들어왔다.
당시 조선대학교 약대 4학년에 다니던 큰딸
소영이를 "한 시간만 이야기하고 보내주겠다"
면서 잡아갔다.
영문도 모르는 채 끌려가는 소영이를
하도 어이가 없어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삼촌(이하 유영선 씨를 지칭함)이 잠바를
입혀 보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작은딸이
"엄마는 딸을 잡아가도 보고만 있소?" 하고
따졌다.
그래서 내가 "총 앞에서 내가 어쩌겠냐.
악을 쓸것이냐, 어쩔 것이냐"고 말했다.
사실 그랬다. 총을 들고 우르르 몰려와서
끌고 가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한 시간만 이야기하고 집으로 보낸다던
소영이는 아침이 되어도 돌아오지 알고
아무런 연락조차 없었다.
큰딸 소영이는 대학 2학년 때부터
운동권에 가담하여 열심히 활동했다.
그래서 17일 계엄령이 확대된 후
당일 자정을 전후해서 집으로 와
미리 잡아갔던 모양이다.
그 당시 나는 보험회사에 다니면서
들깨장사를 했다.
18일 오전에 영광으로 물건을 사러 갔다
오는 길에 시내를 들렀다.
가톨릭센터 부근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어떤 목사님이
"지금 광주에서 학생들이 다 죽어간다"고
비통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가톨릭센터 밑에서 그 말을 듣던
나는 '학생들이 죽다니 무슨 일일까' 궁금하고
걱정되는 순간 잡혀간 소영이의 얼굴이 아른거려
더이상 그곳에 있지 못하고 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왔다.
집에 도착해서도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신우아파트에 살던 친구의 어머님이
사망했다는 연락이 와서 조문을 갔다.
저녁 무렵 집으로 오던 길에 젊은 사람들이
손이 뒤로 묶인 채 러닝셔츠만 입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봤다.
집에 와서도 큰딸 걱정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온 가족이 혹시 학생시위대에
끼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소영이를 찾아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나 혼자만 집에 있고 심지어 2층에 살던
조선대생들까지도 소영이를 찾으러 다녔다.
2층에 살던 학생은
"18일 전일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밖이 소란하여 내다봤더니 군인들이
트럭 열한 대에 학생들을 가득 싣고
어디론가 가더라"고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밥 먹고 소영이를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밤이되어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전에 집을 나갔던 막등이 아들이
사색이 되어 들어왔다.
"엄마,군인들이 어찌나 총을 잘 쏘던지
단 한방에 차에탔던 사람의 목이
떨어져버리데오"하면서 군인들이 그럴 수가
있냐며 울분을 터뜨렸다.
그날 막둥이는 금남로 4가 국민은행
앞에 있었는데, 어디에서 총을 쏘는지
도무지 군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시민들이 금남로에 나가기만 하면
총에 맞아 쓰러지더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혹시나 어찌 될까 겁이 나서
이제는 밖에 나가지 말라고 붙들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당시 우리 삼촌은 전남대 공대 재료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전과하여 화학과 3학년에
다니다 군대에 갔다 와서 복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삼촌도 조카를 찾는다고 날마다 시내를
쏘다니다 들어와서는 "형수님, 지도자가
없으니까 중구난방입디다. 내가 기물파손을
하지 말자고 했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날이 길일쯤 되었을 것이다.
시내에서 돌아온 아들이
"엄마, 도청이고 경찰서고 군인들이
다 철수하고 텅 비었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경찰과 군인들이
모두 철수했다면 틀림없이 어딘가에
소영이가 있을 것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도 각 종합병원, 상무관,
경찰서 등을 쫓아다니며 딸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하기 위해 뛰어다녔으나
허사였다.
소영이가 혹시 도청에서 데모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 그굿에도 가봤으나 없었다.
26일 아침 전남대학교에 다니던
삼촌 친구가 같이 시내에 나가자고
데리러 왔다.
아침에 나간 삼촌에게서 오후 3시쯤 되어서야
전화가 왔다.
막둥이를 YWCA 앞으로 보내라고 하면서
같이 있는 사람들 준다며 담배
한 보루 보내달라고 했다.
그래서 막둥이를 급히 보냈다.
막둥이가 YWCA에 가서 보니
삼촌이 여러 사람들과 함께
뭔가 쓰고 있더라고 했다.
막둥이를 본 삼촌이
"오늘 전투가 있을지도 모르니 집에 들어가기
힘들 것 같다.
그리 알고 너도 오늘은 절대 시내에
나오지 마라. 삼촌이 타고 온 자전거
타고 빨리 집으로 가라"고 했다 한다.
' 그날 잡혀간 소영에게서도 소식이 없고
삼촌도 집에 오지 않아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는데 새벽 2시경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깜짝 놀란 나는 "선영아, 큰일났다.
이총소리가 보통 총소리가 아닌데 어쩔끄나.
이제 니 삼촌 죽는갑다"고 아우성치며
둘째딸을 깨웠다.
벌떡 일어난 둘째딸이 어찌 된
영문인지 확인해 본다면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집집마다 옥상에 군인들이 새까맣게 깔려
있다고 했다.
사람이 올라가자 우리 집 옥상에 있던 군인이
"누구야! 살고 싶으면 빨리 내려가서
꼼짝 말고 있어!"라고 했다면서 딸이
기겁을 하며 뛰어 내려왔다.
요란하던 총소리가 멎고 잠시 후
헬기 소리가 나자 '인자 진짜로
삼촌이 죽었는갑다' 생각하고
걱정으로 밤을새웠다.
아침이 되자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상무대에 근무하던 아들한테
전화가 왔는데 "헬기에 시체를 싣고
상무대로 옮기고 있다"면서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만 있어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고 했다.
그 전화를 받고 보니 '삼촌이 정말로 죽었겠구나'
생각되어 궁금하고 걱정이 태산 같았지만
두려운 마음이 앞서 27일은 꼼짝도 못하고
집에서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부터 기독병원, 적십자병원,
전대병원 등을 샅샅이 뒤지고 다녀도
삼촌은 없었다.
도청에도 가보고 싶었지만 그곳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을 보자 와락 무서운 생각이
들어 얼씬도 못 하고 병원만 찾아다녔다.
26일 삼동이라는 삼촌의 친구한데서
전화가 왔는데, 26일 도청에서 친구와
함께 있는 우리 삼촌을 봤다고 했다.
삼촌이 "어이 삼동아, 10일 후에 보자"고
했다고 했다. 아마 우리 삼촌이 도청에
있을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그 연락을 받고 여기저기 삼촌 친구들한테
전화를 했다.
26일부터 같이 도청에있다 27일 새벽
계엄군이 쳐들어오자 헤어지게 되었다는
친구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우리 삼촌과 죽 도청에서 같이 있다가
계엄군이 들이닥치자 서로 흩어져
그 친구는 하수도를 통해 어떤 집으로
숨었다 한다.
그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숨어서 지내다
잠잠해진 틈을 타서 집으로 왔다고 했다.
그 친구는 "아마 영선이는 죽었을 것입니다" 했다.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혔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병원을 찾아다녔다.
그때는 병원에 있던 시체들도 다 치위지고
없었다. 도청에 가보고 상무관도 가봤지만
어디에도 삼촌은 없었다.
도청에서 죽었다면 시체라도 있어야 할 텐데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30일 딸과 함께 시청으로 가서 실종신고를 했다.
그곳에서 "교도소 앞에서 시체 8구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쫓아가봤다.
우리 삼촌은 없었다.
생매장을 한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나이가 많이 들어보이는 40대 정도의
남자들이었다.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는 것을 보면
죽은 것이 확실한 것 같은데 시신도 찾지 못하자
더욱 상심해서 집으로 왔다.
집에 와보니 파출소에서 경찰이 왔었다고
하면서 빨리 나오라고 했다고 했다.
파출소에 갔더니 "유영선이 누구요?"라고
묻길래 시동생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광주경찰서로 가보라고 했다.
광주경찰서에서 '추경장'이라는 사람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우리 시동생이 확실하다"고 했더니
우선 집으로 가 있으면 나중에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해서 돌아왔다.
6월 6일 장례준비를 해서 가족 두명만
시청으로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때 아들인가 딸인가 한 명 데리고
갔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삼촌 친구들한테 연락을 해서
망월동으로 바로 오라고 하고 나는
시청으로 갔다.
시청에서 장례비로 30만 원을 주었다.
시청에는 많은 사람들이 왔는데,
내 옆에 있던 사람은 장흥에서 온 아저씨였다.
그분은 19살 먹은 아들이 죽어서
왔다고 했는데,얼마나 놀랐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고 바싹 마른 입에서는
풋내가 났다.
우리는 시청에서 차를 타고 망월동으로 갔다.
망월동 공원묘지에는 향을 피워놓았는데도
시체 썩는 냄새가 어찌나 역하든지
구토가 나고 코가 썩을 지경이었다.
관을 열고 일일이 확인하는데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계속 관을 열고 확인해 보니
옷은 삼촌의 것이 분명한데 얼굴은
어찌나 퉁퉁 부었던지 도저히
삼촌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삼촌 친구들도 모두 도망가고
외면해 버렸다.
나는 젊었을'때 징그러운 시체를 많이
봤기 때문에 그나마 지켜볼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삼촌의 이마 정면에
조그마한 총구멍이 나 있었다.
다리에도 상처가 있었던 것 같다.
이마에 총구멍이 뚫린 삼촌의
시신을 확인하고
"놈들이 틀림없이 확인사살을 했는갑다"고
악을 쓰면서 통곡했다.
내 생각에는 우리 삼촌이 어디 숨어 있다가
나중에 발각되어 정면에서 사살된 것이
아닌가 싶다.
27일 새벽에 죽은 시민들은 헬기에 싣고
상무대로 옮겼다고 했는데 그때 죽었더라면
더 빨리 연락이 왔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추측이 들었다 .
자식처럼 키운 삼촌을 내 손으로 묻고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가슴이 미어지는듯한 아픔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후 이사를 해버렸다.
그 집에서 살려니까 구석구석에 삼촌의
흔적이 남아 있어 도저히 살 수 없었다.
그래서 6월말에 집을 옮겼다.
언젠가 보험회사에서 일을 보고
나오는데 자가용이 와서 나를 강제로 태웠다.
"왜 이러느냐"고 따졌더니 일단가보면
안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를 데려간 곳이
'효죽동파출소'였다.
내가 들어가자 그들은 우리 삼촌이
5·18 당시 교도소를 11번이나
습격한 폭도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삼촌은
형사들이 내 딸을 잡아갔기 때문에
조카를 찾는다고 날마다 시내에 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교도소를 습격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내가 한 말은 믿지 않고
"교도소에 복역중인 형님을
구출하기 위해 교도소를 습격했다"고
우겼다.
그들은 우리 집식구들을 용공으로
몰아붙이면서 삼촌도 5·18 때 총을
들고 다니면서 교도소를 습격한
폭도로 몰았다.
"우리 삼촌은 5·18당시 매일 집에 들어왔다.
그렇게 무모하게 교도소를 습격할 사람이
절대 아니다" 하고 쏘아붙이고는
그곳을 나와버렸다.
그 후 잡혀간 큰딸이 송정리파출소에 있다는
연락을 비공식적으로 해줘 알게 되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조차 모르고
지냈던 딸이 송정리에 있다
정말 반가웠다.
당장 찾아가겠다고 했더니
수사과장이라는 사람이 "소영이
무사히 잘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하면서
오려거든 밤에 오라고 했다.
밤에 송정리파출소로 가서 딸을 만났다.
그곳에 여자들만 48명이 수감되어
있다고 하면서 비누하고 속옷을
넣어 달라고 했다.
그 후로는 돈이 조금만 생겨도 속옷,
과일,도넛 등을 사들고 딸을 만나기
위해 쫓아다녔다.
소영이는 5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나왔다.
그 후 한 달에 두 번은 형사들이 찾아와서
"소영이 요즘 어떻게 지내냐
지금은 무슨 일을 하느냐"
등등 감시가 무척 심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후 날마다
형사들이 찾아와서
"삼촌묘를 이장하라"고 귀찮게 굴었다.
"삼촌의 묘를 망월동에서 이장하면
소영이를 복학시켜주겠다"고 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도 복학을 해서
앞으로 살길을 마련하는 것이좋겠다'
싶어 남편을 찾아가 상의했다.
"소영이 복학을 시켜야지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고 했더니
남편이 "그렇게 하라"고 승낙했다.
1983년 소영이를 복학시킨다는 조건으로
삼촌을 망월동에서 남원 선산으로 옮겼다.
이장비 명목으로 50만 원이 나오고
옮긴 후 다시 1천만 원이 나왔다.
그 후 딸은 복학하여 졸업하고 지금은
결혼해서 자식 낳고 잘살고 있다.
딸이 결혼하고 난 뒤로는 형사들의 방문이
없어 편히 살 것 같다.
막둥이 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 때
5·18 관련 유인물을 뿌린 사실이 발각되어
경찰서로 잡혀간 일이 있었다.
형사가 우리 아들을 때리자 그 아이가
순순히 맞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때리시오.내가 징역을
살면 몇 년이나 살겠소. 풀려나기만 하면
당신과 당신 가족을 죽여 버리겠소"라고
악을 쓰면서 반항했는가보다.
그 일 때문에 경찰서에서 연락이 와
찾아갔다.
"도대체 아들 교육을 어떻게 시켰으면
저 모양이냐"며 흥분해서 날뛰었다.
그 뒤로 더 이상의 구타는 당하지 않았고
유인물 관계로 구류를 살고 나왔다.
우리 집이 이렇듯 복잡하다.
남편과 나는 6·25 때 빨치산 대원으로 활동하다
잡힌 사람들이라 용공분자로 낙인 찍혀
항상 감시를 받기 때문에 고통이 심하다.
자식들도 부모의 영향을 받아 운동권에
가담하여 활동하니 여러 모로 평탄하지만은
않다.
우리 도련님을 생각할 때
지금도 미안한 마음 금할 수 없다.
큰딸 복학시키기 위해 이장을 했으니
말할 수 없을 만큼 죄스럽다.
지금도 내가 도련님의 제사를 지내는데
삼촌 친구들이 잊지 않고 꼭 찾아와준다.
살아 생전에 인정이 많고 의리에 살던
사람이라 지금까지도 친구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렇게 해서 인정 많던 우리 도련님은
29살의 나이로 애석하게 숨졌다.
나를 어머니로 알고 따르던
도련님의 넋을 어떻게 위로해야 될지‥‥
(조사 정리 양난희)
전남대 민주인권평화센터 /
5.18기념재단 국회광주청문회 증언록
첫댓글 ㅜ 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