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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가(hymn , 讚頌歌)
대개 회중들이 모여 부르는 유절형식을 가진 박절적 노래로 성서 이외의 가사를 갖는다.
고대 수메르나 그리스 등에서 비롯된 다른 모든 문화권에도 이런 유형의 노래들이 있다.
그리스도교의 찬송가는 히브리 사원에서 시편송을 부르던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완전하게 보전된 최초의 가사는 그리스의 '포스 힐라리온'(Phos hilarion:19세기 미국의 시인 롱펠로가 〈가자, 즐거운 빛으로〉라는 제목으로 번역)으로, 그 기원은 200년경 또는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찬송가가 체계적으로 발전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기원후 313년 이후의 일이었다. 가장 먼저 번성했던 시리아에서는 시편송을 모방해 찬송가를 부르던 그노시스주의자(이단시 된 그리스도교 초기의 한 분파) 및 마니교도(3~7세기 페르시아에서 교세를 펼침)의 관습이 전해졌고, 그것이 비잔티움 교회에 의해 수용되었다. 비잔티움 교회의 전례 양식에서는 라틴 전례에서보다 찬송가가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따라서 비잔티움 찬송가는 카논이나 콘타키온과 같은 복잡한 유형들로 발전했다.
4세기 메소포타미아의 부사제이자 시인, 찬송가 작가였던 성 에프라임은 '그리스도교 찬송가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서방지역에서는 푸아티에의 성 힐라리오가 360년경에 찬송가 가사집을 만들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는 회중들이 부르는 시편송과 찬송가를 모아 책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일면 정통 그리스도교와 이념적인 갈등을 보였던 아리아족의 찬송가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4행 연으로 된 약강 10음보 형식으로 된 이 초기 찬송가들은(이것들의 선율은 간단하고 민속적인 것으로 짐작됨) 당시 그리스도교권에 있던 라틴어 시에서 유래했다. 중세 말기에 이르면 훈련받은 합창단원들이 회중과 함께 찬송가를 불렀다. 새로 만들어진 선율은 장식이 더 많아졌고 기존의 것들도 종종 장식되었지만, 그 어느 경우라 하더라도 한 음에 붙는 가사의 음절 수는 대개 1개였다.
간혹 찬송가를 다성음악으로 만들기도 했는데, 이때는 대개 단성성가와 교대되었으며 특히 오르간 음악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례 양식에 의한 회중 노래의 관습은 종교개혁 기간에 독일 루터교도들에 이르러서야 다시 나타난다. 독일 루터교 찬송가 선율인 초기 코랄은 화성이 붙지 않았고 반주도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성가대와 오르간, 회중들이 함께 또는 따로 연주하는, 화성 붙은 형태들도 사용하게 되었다.
어떤 것은 새로 작곡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단성성가나 자국어로 된 봉헌송, 세속노래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세속 서정시 역시 루터와 같은 시대 루터교도들의 찬송가 가사에 영향을 끼쳤다. 중요한 초기 모음집으로는 루터와 요한 발터의 찬송가집(1524), 게오르크 라우의 찬송가집(1544) 등을 들 수 있다. 17, 18세기 루터 교회의 경건파는 서정적·주관적인 성격의 노래를 새롭게 독일 찬송가집에 수용했다.
이중에는 루터교도들의 것도 있지만 모라비아 교회 같은 다른 교파의 노래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뱅교도들은 스위스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프랑스·영국·스코틀랜드 지방에서 시편송을 번역해서 즐겨 불렀다. 이들의 시편송은 규칙적인 박자를 갖고 있었고, 무반주 유니즌(제창)으로 불렀다. 영국 및 스코틀랜드의 프로테스탄트는 시편송만 허용했고, 특히 영국에서의 시편송은 프랑스·제네바의 시편송에서 가져온 가락에 가사를 붙여 불렀다.
따라서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시편송은 프랑스 시편송과 마찬가지로 규칙적 박자를 갖추었지만 프랑스어의 운율에 기초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가락이 상당히 복잡하다. 한편 영국 시편송은 프랑스 시편송과는 달리, 몇 개의 운율 유형만을 사용했고, 처음엔 개개의 가락에 특정한 시편 가사만을 붙여 부르다가, 나중엔 서로 다른 노래에 같은 가사를 사용하게 되었다. 흔히 사용하던 운율은 영국 발라드의 운율 형태와 같은 8, 6, 8, 6(각 행의 음절수)으로, 영국 찬송가의 전형적인 운율로 계속 사용되었다. 영국 찬송가의 결정적인 전환은 17세기말 독립 교회파(조합교회주의) 찬송가 작가였던 아이작 와트에 의해 이루어졌다(〈찬송가와 종교 노래 Hymns and Spiritual songs〉 1705~19). 18세기 중반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가 주도한 복음주의 운동은 영국과 미국에서 찬송가 노래의 기반을 확고히 했다.
찰스 웨슬리의 수많은 시들은 실험적으로 만든 다양한 운율들을 사용했고, 존 웨슬리는 독일의 훌륭한 찬송가들을 다수 번역했다. 이 두 사람은 또한 여러 독일 선율들을 사용하기도 했고, 이들의 후기 찬송가들에는 헨델 양식으로 된 음악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성공회가 찬송가의 노래 관습을 정식으로 인정한 것은 1820년에 이르서였고, 이것은 셰필드의 한 교회의 찬송가 노래 관습에서부터 계속된 사람들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1833년에는 옥스퍼드 고(高)교회파(High Church:영국국교회 내의 일파로, 교회의 권위와 의식, 성찬 등을 중시) 운동이 일어, 찬송가의 작곡과 중세 찬송가의 번역, 단성성가 선율의 사용을 자극했다.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영국 찬송가집의 역사에서 보전된 최초의 것은 〈신구 찬송가들 Hymns Ancient and Modern〉(1861, 개정 최종판 1950)인데 이것은 양식이 엄격하고 영국 성공회의 〈기도문〉에서 가사를 그대로 가져왔으며, 한 선율에 한 가사씩만을 붙여 만들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2가지 중요한 모음집이 나타났다.
〈야텐돈 힘널 Yattendon Hymnal〉(1899)은 영국 시인 로버트 브리지가, 〈영국 힘널 The English Hymnal〉(1906)은 퍼시 디어머와 작곡가 랠프 본 윌리엄스가 편집했다. 특히 〈영국 힘널〉에는 여러 시편송과 민요 선율들이 포함되어 있다. 주로 루터교의 모범에 따른 대륙의 찬송가에서는 그밖의 전통도 찾아볼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왈덴파 교회가 그 지방의 민요 및 오페라 양식들에 영향을 받아 회중 찬송가들을 사용했고, 16세기 반 종교개혁으로 인해 로마 가톨릭에서도 훌륭한 찬송가들의 작곡이 고무되었다. 19세기말에는 찬송가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 영국에서 〈웨스트민스터 힘널 West minster Hymnal〉(1940)을 탄생시켰다.
1960년대말에 미사 집전 중의 회중 노래가 부활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찬송가 작곡을 자극했고, 또한 가톨릭 전통 이외의 유산들로부터 여러 찬송가들을 채택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찬송가는 근대음악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한국 최초의 찬송가는 감리교회 로스 와일러와 존스가 공동 편집한 〈찬미가〉로서 악보 없이 가사만을 적었으며, 1894년 언더우드가 악보가 들어 있는 〈찬양가〉를 편집·간행했다.
1905년 윤치호가 편집한 〈찬미가〉는 한국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최초의 찬송가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후 1983년 75그리스도교 교파가 공동작업한 총 558장의 〈통일찬송가〉가 간행되어 한국 찬송가 사용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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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가 (讚頌歌, 찬미가, 찬양가)
* 시대 : 근대 |
* 유형 : 개념용어 |
* 분야 : 종교·철학/개신교 |
(요약) 개신교 예배에서 신을 찬양하거나 신앙심을 키우기 위해 부르는 종교음악. 찬미가·찬양가
1. 개설
찬양가(讚揚歌)·찬미가(讚美歌)·복음가(福音歌) 등으로도 불린다. 찬송가는 이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한국의 찬송가는 한국 근대음악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신문학운동, 특히 신시운동(新詩運動)에도 많은 자극을 주었다.
2. 연원 및 변천
한국 최초의 찬송가는 감리교회 선교사인 존스(Jones,G.H., 趙元時)와 로스와일러 (Rothweiler,L.C.)가 공동 편집한『찬미가』(1892)로서 악보 없이 가사만 적어 놓은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서북지방에서는 장로교의 백홍준(白鴻俊) 등이 중국어 찬송가를 번역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고 하나 그 간행·보급의 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1894년 북장로교의 선교사인 언더우드(Underwood,H.G., 元杜尤)는 가사뿐만 아니라 악보도 함께 들어 있는 『찬양가』를 편집· 간행하였는데, 이것은 최초의 곡조 찬송집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는 인간이 지은 죄의 심각성,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가 치른 대속적(代贖的)인 죽음, 그에 대한 속죄 경험과 그로 인한 기쁨 등이 강조되어 있다. 이 『찬양가』는 서울지방에서만 사용되다가 공인 찬송가로 출간된 것이 1895년에 발간된 『찬송시』이다.
반면 침례교 선교사였던 펜위크(Fenwik,H.C.)는 1912년 펴낸 『복음찬미』를 통해 단지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노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언더우드의 『찬양가』 전 117장 중에는 7장의 한국인 작사 노래가 들어 있는데, 백홍준의 것만이 확인되고 있다. 감리교회에서는 1895년 별도로 『찬미가』를 간행하여 사용하였는데, 대부분 중국어와 영어를 번역한 가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국인이 작사한 것은 한 곡 뿐이다.
최초의 자발적·토착적 찬송가로는 1905년 윤치호(尹致昊)가 편집한 『찬미가』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윤치호의 찬미가는 애국송과 황제송이 여러 편 수록되어 있는데다, 감리교회의 공인을 받지 못해 공교회에서 정식으로 사용되지는 못했다.
초기 찬송가들은 외국가사를 그대로 번역하여 수와 길이만 맞추어 편찬하였기 때문에 그 구성이 유치하고 표현이 거칠었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점차 부각되면서 생경한 번역투가 아니라 보다 문학적으로 세련되고 감정에 직접적인 호소력을 지닌, 한국인들의 신앙경험에서 우러나온 찬송가가 요청되었다.
1908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총 266장의 『찬송가』를 예수교서회에서 발행하였다. 가사의 문학적 세련도가 현저하게 높아졌으며, 우리나라 고유의 가락으로 부를 수 있는 찬송가가 다섯 곡 실렸다. 이 『찬송가』1931년 『신정 찬송가』가 나올 때까지 사용되었다. 이것은 인도자가 먼저 한줄을 노래하면 회중이 그 말과 곡을 반복하고, 둘째 줄로 옮겨가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정 찬송가』는 그 편집과 발행과정에서 나타난 몇 가지 문제점으로 인하여 장로교가 사용을 거부하여 감리교만이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일제 말기에 총독부는 일본황실에 모독된다는 이유로 하나님에 관한 찬송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였고, 시오니즘(Zionism)적 색채가 있는 것, 선민의식을 고취하는 찬송가를 금지시켰다.
8·15광복 후인 1946년 각 교파들은 합동 찬송가 사용에 뜻을 모으고 회합을 가지기 시작하여 1949년에는 장로교·감리교·성결교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총 586장의 『합동 찬송가』를 간행하였다.
그러나 장로교회에서는 번역 등의 문제로 일부 수정을 가하였고, 장로교에서 분립된 고려파에서는 예전의 『신편 찬송가』를 그대로 사용했다. 1959년 장로교회가 다시 합동파와 통합파로 나누어지게 되자, 합동파에서는 고려파와 함께 찬송가 편집사업을 결의하고, 1962년 총 671장의 『새찬송가』를 발행하여 그들 나름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기독교장로교·감리교·예수교장로교(통합), 그리고 성결교회에서는 기독교연합회 주관으로 『합동 찬송가』의 개편을 결의하고, 1963년부터 그 작업에 착수하였다.
개편의 원칙은 중첩된 것의 단일화, 국가 및 민요 형태의 곡조와 가사의 재검토, 종류별 편찬에 유의, 예배용 찬송의 보강, 특정 예배나 절기용 찬송의 보강, 한국 가사나 곡조의 보강을 통한 토착화의 지향, 교독문의 보충, 가사의 전면적 검토 등이었다.
이러한 원칙들을 근간으로 하여 한국인 작사·작곡 27편을 포함한 총 600장의 『찬송가』가 1967년에 간행되었다. 또한, 1977년에는 한국 개신교 전체가 공동으로 사용할 『통일 찬송가』의 준비위원회가 만들어져 보수·진보의 양진영 교파를 포괄한 단일 찬송가의 편찬을 위하여 작업한 결과, 1983년에 총 558장의 『통일 찬송가』가 간행되어 찬송가 사용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
2006년부터는 총 647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21세기새찬송가』를 사용하고 있다. 이 찬송가의 특징은 한국인이 작사한 찬송이 121곡(18.7%), 한국인이 작곡한 찬송이 127곡(19.6%)나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통일 찬송가』에 한국인이 작곡한 찬송가가 17곡인 것과 비교하면 괄목할만한 증가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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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가(psalm , 聖歌)
(요약) 종교적 성악곡.
일반적으로 가톨릭의 전례음악을 말하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찬송가를 포함한 그리스도교 종교음악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성가의 기원은 유대교의 집회음악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여러 형태로 발전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정점을 이루었는데, 이전까지 독창자 위주였던 성가에 합창 양식이 도입되었고 오르간 등의 악기반주도 따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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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음악(church music , 敎會音樂)
(요약) 예배 의식에서 사용하기 위해 작곡된 음악.
liturgical music이라고도 함.
특히 그리스도교적 전통과 결부되어 사용되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 예배 음악은 칸토르가 즉흥적으로 독창을 하면 회중들이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응창(responsorial)으로 이루어진 유대교의 집회음악에서 발전했다.
이것은 여러 가지 형태의 성가들로 발전했는데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대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정점에 다다랐다. 아울러 10세기부터는 엄청난 수의 찬송가가 나타났다.
다성음악(polyphony)은 처음에는 주요 축일에만 한정적으로 허용되었고, 기교가 뛰어난 가수들의 독창은 오르간이나 몇몇 악기들로 반주되었다(화성적 음악:homophony). 초기 다성음악 양식은 1200년경에 노트르담 악파(Notre-Dame school) 작곡가인 레오냉과 페로탱의 오르가눔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14세기에는 훈련받은 작곡가들에 의해 기존의 곡 사이에 새로운 가사에 의한 단순한 화성음악적(수직화음적) 양식의 일부분을 첨가하는 트로푸스(tropus)가 성행했지만, 프랑스 쪽에서는 동질서 리듬(isorhythm)이 모테트와 미사곡에 적용되었다. 이때부터 미사의 통상부들은 하나의 전체로 취급되어 다성음악으로 작곡되었다.
중세 말기의 교회음악은 그 방법과 표현이 보다 직접적으로 되었다.
미묘한 리듬으로 조성·질서·균형에 대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부르고뉴의 기욤 뒤페, 영국의 존 던스터블과 레오널 파워, 그밖의 동시대 음악가들이 작곡한 교회음악은 사원이나 대성당보다는 군주의 부속 교회와 궁정 의식을 위해 작곡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독창자들보다 오히려 소규모 합창단을 다성음악에 쓰는 것이 정착되었다. 아카펠라(무반주) 합창 양식이 이 시대의 주류를 이루었지만, 때로 교회의 성가대는 오르간이나 다른 악기로 반주하기도 했다.
대작곡가 조스캥 데 프레에 의해 계승된 네덜란드의 작곡가 오브레흐트와 오케헴은 음울하고 무거운 분위기에 빠져 있던 당시의 교회음악에 명료성과 서정성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다음 세대에서는 팔레스트리나와 라소, 스페인의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와 크리스토발 데 모랄레스, 영국의 윌리엄 버드 등의 작곡가들이 돋보였다.
같은 시기에 교회 오르간 음악이 크게 발전했는데, 원래는 다성음악을 노래할 수 있는 성가대가 없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오르간 연주자는 단성성가·칸티클·미사에 화성을 붙인 부분과 성가대나 회중들이 부르는 단성성가적인 시편송을 교대로 연주했다. 영국의 버스 앤섬(verse anthem)과 이탈리아의 바로크 모테트의 대두는 즉흥연주로 반주하는 오르간 연주자의 기량을 향상시켰다.
베네치아에서 안드레아 가브리엘리와 조반니 가브리엘리, 그 추종자들은 현·목관·인성(人聲)의 음의 공간적 대비와 서로 대립되는 소리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독일 찬미가 선율인 코랄(chorale)은 모테트와 오르간 음악, 나중에는 칸타타의 중요한 재료가 되었다. 하인리히 쉬츠, 프란츠 툰더, 디트리히 북스테후데는 음악을 교회 예배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부상시켰으며, 이것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교회음악에서 절정을 맞았다.
고전주의 시대에도 앤섬·모테트·미사곡은 진부한 면을 보이기도 했지만 계속 작곡되었다.
이 시대의 대작곡가들은 마음 속에 교회보다는 오히려 연주회장에서 연주되는 교회음악을 그리며 작곡했고, 반면 하이든과 그밖의 초기 빈 악파의 대가들이 교회 예배용으로 작곡한 미사곡들은 특정 지역에서만 쓰일 뿐 널리 확산되지는 못했다.
19세기 교회음악은 베토벤, 슈베르트, 안톤 브루크너 등의 미사곡, 조아키노 로시니와 브람스의 모테트, 세자르 프랑크, 막스 레거의 오르간 음악, 엑토르 베를리오즈와 주세페 베르디의 진혼곡 등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했다. 몇몇 교회음악 작곡가들은 16세기 양식을 부활시키려는 시도로 이전의 낭만주의적 화려함과는 거리를 유지했다.
20세기에 와서 랄프 본 윌리엄스, 윌리엄 월튼, 벤저민 브리튼, 올리비에 메시앙, 프랑시스 풀랑크,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크지슈토프 펜데레츠키 등의 작곡가들이 옛 형식들을 위한 새로운 길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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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과 음악
루터와 종교개혁
가운데에는 루터가 교황청의 파문서를 불태우고 있고, 주위에는 루터의 일생과 종교개혁의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교회 대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했다. 부패한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고, 성서의 권위와 굳건한 신앙 위에 교회를 새롭게 변혁시키고자 했던 이 역사적인 사건을 종교개혁이라고 한다. 종교개혁은 처음 독일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후 유럽의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다. 종교개혁으로 교회는 구교와 신교로 분리되었다.
종교개혁은 교회음악의 모습도 바꾸어 놓았다. 종교개혁 이전까지 교회의 모든 의식은 라틴어로 진행되었다. 성가도 모두 라틴어로 불렀다. 따라서 신부를 비롯한 일부 식자층을 제외하고는 그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마르틴 루터는 예배에서 일반 신도들이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교개혁 이후 교회에서 자기 나라 언어인 독일어 사용을 권장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일시에 바꿀 수는 없었다. 신교와 구교가 분리된 후에도 루터 교회에서는 예전에 사용하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의전을 상당 부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음악도 새로 작곡한 음악과 본래의 로마 가톨릭 음악을 함께 사용했다. 이 경우 라틴어 가사를 그대로 부르거나 독일어로 번역해서 불렀으며, 때로는 아예 독일어 가사를 새로 지어 부르기도 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교회음악 양식은 오늘날의 찬송가에 해당되는 코랄(chorale)이다. 코랄은 음악을 통해 신도들이 직접 예배에 참여하기를 원했던 루터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가톨릭 교회 의식에서 음악은 순전히 성가대의 몫이었다. 하지만 루터 교회에서는 일반 신도들이 자기 나라 말로 찬송가, 즉 코랄을 부르도록 했다. 루터와 그의 동료들은 교회력에 맞추어 모든 주일에 부를 수 있는 코랄을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50년간 200곡이 넘는 코랄이 만들어졌다. 루터 자신도 코랄을 위해 수많은 시와 노래를 썼는데, 대표적인 것이 〈내 주는 강한 성〉이다. 코랄은 새로 작곡하기도 했지만 기존의 선율에 가사만 바꾸어 부르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기존의 선율에 가사만 바꾸어 부르는 것을 콘트라팍툼(contrafactum)이라고 한다.
코랄은 현대어로 번역하면 찬송가가 된다. 현대의 찬송가는 모두 4성부로 이루어져 있지만, 최초의 코랄은 화음도 없고 반주도 없이 제창으로 부르는 단순한 노래였다. 하지만 화성과 대위법을 통해 얼마든지 큰 형식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으니 다성 코랄과 코랄 모테트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프랑스와 스위스, 네덜란드에서는 종교개혁의 영향이 독일과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 지역의 종교개혁가들은 음악이 믿음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교회음악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심지어는 오르간까지도 철거했다. 이 지역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한 칼뱅 같은 사람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가사는 교회에서 사용할 수 없도록 했다. 성경에서 노래 부르기에 적합한 가사는 시편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칼뱅 교회에서는 시편에 맞춘 노래만 허용했다. 이것을 쌀터(psalter)라고 한다. 루터 교회의 코랄이 직선적이고 활기찬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것에 반해서 칼뱅 교회의 쌀터는 부드럽고 친근하며, 단순하고 엄격한 것이 특징이다. 칼뱅 교회에서는 음악을 장식적으로 꾸미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쌀터는 독일의 코랄처럼 더 큰 규모의 음악 양식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영국 역시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 독립해 영국 국교회를 만들었다. 영국 교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분리된 것은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영국 왕 헨리 8세와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에 따른 갈등 때문이었다. 영국 교회의 대표적인 음악으로는 구교의 미사에 해당되는 서비스(service)와 모테트에 해당되는 앤섬(anthem)이 있다. 서비스는 대위법적이고 장식적인 선율을 사용하는 대서비스와 단음적이고 수직 화성을 사용하는 소서비스로 나뉜다. 앤섬 역시 합창단이 부르는 대위법적인 완전앤섬과 반주를 수반한 합창과 독창이 교대로 부르는 운문앤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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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찬송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