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上古)의 구이(九夷)가 살던 시절 초기에 환인씨(桓因氏)가 있었고, 환인이 신시(神市)를 낳았다. 신시가 처음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가르치니, 백성들이 그에게 귀의하였다.
신시가 단군(檀君)을 낳으니, 단군이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거처를 정하고, 호를 단군이라고 하였으며 처음으로 국호(國號)를 두어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 조선이란 ‘동쪽 끝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이다. 혹은 말하기를,
“선(鮮)은 산(汕)이다. 그 나라에 산수(汕水)가 있기 때문에 조선이라고 한다.”
하였다. 평양(平壤)에 도읍하니, 도당씨(陶唐氏)가 즉위한 지 25년이 되는 때이다.
단군씨가 부루(夫婁)를 낳았다. 혹은 말하기를,
“해부루(解夫婁)의 어머니는 비서갑(非西岬)의 딸이다.”
하였다. 우(禹)가 수토(水土)를 평정하고 도산(塗山)에서 제후들을 회합할 때에 부루가 도산씨에서 우에게 조회하였다.
후에 단군씨가 거처를 당장(唐藏)으로 옮겼다.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에 이르러 단군씨가 죽었다. 송양(松壤) 서쪽에 단군의 무덤이 있다. - 송양은 지금의 강동현(江東縣)이다. - 혹은 말하기를,
“단군이 아사달(阿斯達)로 들어갔다.”
하였는데, 언제 죽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태백산과 아사달산에 모두 단군의 사당이 있다.
부루가 즉위하여 북부여(北扶餘)를 세웠다. 부루가 곤연(鯤淵)에 기도하여 금와(金蛙)를 얻었는데, 그 모습이 금개구리와 비슷하여 이름을 금와라고 한 것이다. 부루의 시대에 상나라가 망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 그 후에 주(周)나라의 덕이 쇠퇴하니, 공자가 구이에 살고 싶어 하였다.
부루가 죽고 금와가 뒤를 이어 가섭원(迦葉原)으로 도읍을 옮기고 동부여(東扶餘)를 세웠다. 금와 말에 진(秦)나라가 천하를 병합하자 진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동쪽 경계로 들어와 진한(秦韓)을 세웠고, 한(漢)나라 고후(高后) 때에 위만(衛滿)이 조선을 점거하자 조선후(朝鮮侯) 기준(箕準)이 남쪽으로 달아나 금마(金馬)에 이르러서 마한(馬韓)을 세웠다. 한나라 효무제(孝武帝) 때에 예맥(薉貊)을 공략하여 예맥의 군왕 남려(南閭)가 항복하자, 처음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였다가 승상 공손홍(公孫弘)의 계책을 써서 혁파하였다.
금와가 대소(帶素)에게 전위(傳位)하였다. 대소가 강대함을 믿고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끝내 격살당하고, 동생 갈사(曷思)가 대신 즉위하였다. 손자 도두(都頭)에 이르러 고구려에 항복하니, 동부여가 망하였다. - 갈사는 왕의 이름이 아니다. 갈사에 도읍을 정하였기 때문에 호를 갈사라고 하였다. -
이때의 연대를 상고해 보면 한나라 왕망(王莽)의 시대에 해당한다. 환인과 신시의 시대는 고찰할 데가 없고, 단군의 치세는 도당씨 25년부터 우(虞)나라 순 임금과 하(夏)나라 우 임금을 거쳐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에 이르기까지 1048년이고, 해부루 이후부터 갈사가 망한 왕망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또 1000년이다. 그러고도 후손이 있어 진(晉)나라와 통하였다.
금와가 우발수(優浡水)의 여자를 사랑하였는데, - 우발은 늪〔澤〕 이름이다. 태백산 남쪽에 있다. - 우발수의 여자가 몸을 비추는 해그림자에 감응되어 주몽(朱蒙)을 낳았다. 주몽의 작은아들을 온조(溫祚)라고 한다. 단군씨의 후손에 해부루가 있고, 해부루의 후손에 금와가 있고, 금와의 후손에 주몽과 온조가 있어 고구려와 백제의 시조가 되었으니, 모두 단군씨에게 뿌리를 둔 것이다.
부여는 현도(玄菟)에서 북쪽으로 1000여 리 지점에 있었다. 남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접경을 이루고 북쪽으로는 약수(弱水)까지 이르러 면적이 사방 2000리이고, 성읍(城邑)과 궁실(宮室)이 형성되어 있었다. 토지는 오곡에 알맞고, 사람들은 용맹하고 강한 것을 좋아하였다. 회동(會同)하고 읍양(揖讓)하는 예가 있어 중국과 비슷하며, 사신이 되어 나가는 자는 금계(錦罽)로 만든 의복을 입고 금과 은으로 허리띠를 장식하였다. 나라의 법은,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 다음 집을 몰수하고, 남의 물건을 훔친 경우에는 훔친 물건의 12배를 갚도록 하고, 남녀가 간음하거나 부인이 질투한 경우에는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소를 잡아 하늘에 제를 올리고, 그 소의 발굽을 사용하여 길흉을 점치되, 발굽이 떨어지면 흉하고 붙으면 길하게 여겼다.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되, 외곽(外槨)만 쓰고 내관(內棺)은 쓰지 않았으며, 순장(殉葬)으로는 살아 있는 사람을 쓰고, 거상(居喪) 중에는 남녀가 모두 흰옷을 입었다. 그 지역에서는 좋은 말, 담비 가죽, 표범 가죽, 아름다운 구슬이 생산되었고, 나라가 풍요롭고 부유하였다. 국왕의 인장은 ‘예왕지인(獩王之印)’이라고 되어 있으니, 그 나라가 옛 예맥의 지역이기 때문이다.
진 무제(晉武帝) 때에 중국과 교통하여 공물을 바쳤다. 태강(太康) 6년에 모용외(慕容廆)의 습격을 받아 왕 의려(依慮)는 자살하고 그 자제들이 옥저(沃沮)로 달아나 몸을 보전하였다. 진 무제가 동이 교위(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구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우영을 파면하고 하감(何龕)으로 대신하였다. 다음 해에 뒤를 이어 즉위한 왕 의라(依羅)가 하감에게 가서 구원을 요청하니, 진 무제가 독우(督郵) 가침(賈沈)을 파견하여 모용외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이에 의라가 나라를 수복할 수 있었다. 이 뒤로도 모용외가 침략하여 부여 사람들을 약탈해 중국에 팔아넘겼는데, 진 무제가 조서를 내려 관가의 재물을 풀어서 몸값을 물고 돌려보내 주었으며, 사주(司州)와 기주(冀州)에 영을 내려 인신매매를 금지하였다.
숙신씨(肅愼氏)는 일명 읍루(挹婁)라고도 한다.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는데,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구만한(寇漫汗)과 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약수까지 이르렀다. 깊은 산골에 위치해 있어서 수레나 말을 타고서는 다닐 수 없었다. 여름에는 나무 위에 움막을 짓고 살았으며 겨울에는 굴속에서 살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군장(君長)이 되었다.
문자는 없었고, 말로 약속하였다. 소와 양은 없었고, 돼지를 길러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으로 입었으며 털은 짜서 베를 만들었다. 각상(𨚷常) - 숙신씨 지역에 나는 나무 이름이다. - 이라는 나무가 있으니, 중국에 성왕(聖王)이 이어서 즉위하면 나는 나무로, 그 껍질로는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었다. 와격(瓦鬲)을 만들었는데, 곡식 4, 5승(升)을 담았으며, 그것을 사용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앉을 때에는 다리를 뻗고 앉았다. 소금과 철이 없었으며,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든 다음 물을 부어 두었다가 그 즙을 취하여 먹었다.
남녀 모두 편발(編髮)을 하였고, 1자가량 되는 포첨(布襜)을 만들어 앞과 뒤를 가렸다. 부인은 정숙하고 미혼인 여자는 음란하였으며, 젊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늙은 사람을 천시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죽은 그날로 들판 한가운데에 장사 지내되, 나무를 엇비슷이 세워 곽(槨)을 만들고 돼지를 죽여 그 위에 쌓아 놓아 이로써 죽은 이를 보내는 예로 삼았다. 흉포하고 사나운 것을 좋아하여 근심과 슬픔이 없는 것을 서로 숭상하였으며, 부모의 죽음을 당하여 곡하지 않는 남자를 장사(壯士)로 여겼다. 도둑질한 자를 보면 훔친 물건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모두 죽였다.
석노(石砮)와 피골(皮骨)로 된 갑옷이 있었으며, 단궁(檀弓)은 크기가 3자 5치이고 호시(楛矢)는 크기가 1자 조금 넘었다. 그 나라 동북쪽에서 생산되는 석노는 예리하기가 철을 뚫을 정도인데, 그 나라 사람들은 이 석노를 가지게 되면 반드시 먼저 귀신에게 제사 지냈다.
주나라 무왕 때에 호시와 석노를 공물로 바쳤고, 주공(周公) 단(旦)이 성왕(成王)을 보필할 때에도 사신을 보내 입조경하(入朝慶賀)하였다. 위(魏)나라 경원(景元) 말엽에 호시, 석노, 활, 갑옷, 담비 가죽 따위를 공물로 바쳤으며, 위나라에서는 금계(錦罽), 면백(緜帛), 녹계(傉鷄)를 왕에게 하사하였다. 진 무제(晉武帝) 때에 다시 입공(入貢)하였고, 원제(元帝) 때에 석노를 공물로 바쳤으며, 성제(成帝) 때에 이르러 석진(石晉)에 조회하고 이르기를,
“소와 말이 서쪽을 향해 자는 것을 3년 동안 보았습니다. 이 때문에 대국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였다.
첫댓글 제발 단편적인 단어 몇개에 혹해서, 자신의 입론에 마구 갖다 붙이지 말고, 원문을 제대로 찾아서 확인해보기 바랍니다.
거참. 이상하군요.
`단군의 치세는 도당씨 25년부터 우(虞)나라 순 임금과 하(夏)나라 우 임금을 거쳐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에 이르기까지 1048년이고, 해부루 이후부터 갈사가 망한 왕망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또 1000년이다.`
위 원문과 같이 허목은 단군 치세가 1048 년이고 또 1000 년의 시작을 해부루라고 하였는데,
해부루는 해모수 이후에 등장하는 동부여의 왕이고 시기적으로도 고구려 건국 직전이니 허목이 단군 왕검의 아들인 부루의 후손과 2000 여 년 후에 나타나는 해부루를 혼동한 것은 아닌지 아니면 원문이나 번역에 착란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사실 단군신화를 처음 수록한 일연도 이미 <삼국유사>에서 부루가 단군의 아들이고, 주몽도 단군의 아들이라는 기록 때문에 혼선을 빚어 부루=해부루로 보고 해부루를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하는 기록을 남긴 바 있습니다. 동부여 신화에 따르면 해모수는 해부루를 가섭원(동부여)으로 내쫓고 북부여를 세운 임금이기 때문에, 해부루가 해모수의 아들이 될 수 없는데 말이죠. 이러한 혼동이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어서,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짬뽕된 인식이 계속 왕왕 나타나게 됩니다. 허목의 혼동 또한 이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