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의 우리말 바로 쓰기] 16. 외래어 오용: 일본어 잔재 및 악영향 (3)
2편에 이어...
다섯째, 놀이 및 운동과 관련해, 우리가 편을 짜거나 승부를 가릴 때 ‘짱께미뽀.잔껨뽀(가위바위보)’를 했다. 어릴 때 즐겼던 놀이 가운데 하나가 ‘다마(구슬)’치기였는데 땅바닥에서 굴리기도 하고 손에 잡고 ‘이찌니산(하나둘셋)’을 하기도 했다. 구슬, 공, 알 등을 가리키는 일본어 ‘다마’는 앞에서 말했듯 백열등을 가리키기도 하고 아래서 말하듯 당구를 가리키기도 했으니 다양하게 쓰였다.
달리기 경기할 때 출발선에 서면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거나 일본어로 ‘요이땅(준비.출발)’을 외쳤다. 내가 어릴 때는 운동을 싫어하기도 하고 소질도 없어 군대에서 유격훈련을 받을 때 5km 구보(달리기)에서조차 낙오해 기합(체벌)을 받기도 했다. 몸집은 가냘파도 정신은 강해지고 싶어 50대에 마라톤 풀코스 42km를 완주하기도 하고, 70노인이 되어서도 철인3종 경기에 도전하고픈 욕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요즘은 집에서 틈틈이 팔굽혀펴기와 턱걸이로 뱃살을 줄이며 ‘가빠.갑바(가슴 근육)’를 늘리려 애쓰고 있다.
중학생 때 장기와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장기 둘 때 “장이야!” 또는 “장군!”으로 외통수를 치거나 바둑 두면서 대마에 ‘아다리(단수)’를 칠 때는 통쾌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다마(당구)’를 시작했다. 이른바 끼 있는 친구들의 아지트였던 ‘망가(만화)방’에서 였다. 학교 근처 ‘망가방’에 가면 미니 ‘다마 다이(table.당구대)’가 하나 있었다. 당구 용어는 거의 일본어였다. 밀어치는 ‘오시’, 당겨치는 ‘시끼.히끼’, 하수들은 ‘다이’를 망치기 쉬워 금지하는 ‘맛사이(찍어치기)’, 공에 회전을 주는 ‘시네루.히네루’, 요행수로 점수 따는 ‘후로꾸.후루쿠(fluke)’, 고수들은 일부러 그리고 하수들은 어쩌다 상대방 공 진로를 막는 ‘겐세이(방해)’ 등. 아직도 당구장에서 그런 용어를 쓰는지 궁금하다.
1980년대 초 프로야구가 생겼다. 광주학살을 저지르고 대통령 자리에 오른 전두환이 국민에게 정치에 관심 갖고 데모하지 말고 쾌락에 빠져보라는 의도를 담아, 컬러TV 방송 시작하고, 야간통행 금지 풀며, 중.고등학생 교복 자율화하고, 대학증원 확대했다는 말이 있는데 프로야구 출범도 그 일환이었다고 한다. 야구에도 일본어가 적지 않았다. ‘방망이’를 가리키는 ‘빠따(bat.배트)’, 타자 몸에 맞는 ‘데드볼(hit by pitch)’, 타자가 걸어 나가는 ‘포볼(walk, base on balls)’, 타구가 직선처럼 날아가는 ‘라이나(line drive)’, 경기가 끝나는 ‘게임셋.게임세트(game is over)’ 등.
요즘은 거의 매주 하루 두어 시간 탁구를 즐기는데 적지 않은 사람이 탁구채를 ‘빠따’라고 부른다. 탁구채는 배트(방망이)가 아닌데 왜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겠다. 흔히 라켓(racket)이라 부르는데 더 정확한 영어로는 패들(paddle)일 것이다. 대개 라켓은 테니스 채나 배드민턴 채처럼 그물로 된 것을 가리키고, 패들은 탁구채나 10여년 전부터 한국에 널리 도입되기 시작한다는 피클볼 채같이 나무판이나 복합소재로 된 걸 가리키기 때문이다. 탁구채를 일제 잔재가 묻은 ‘빠따’는 물론 영어로 라켓이나 패들이라고 부르지 말고, 쉽고 정확한 우리말 탁구채 그대로 부를 수 없을까.
한편, ‘빠따’는 야구방망이나 ‘가쿠목.각구목(각목)’으로 엉덩이나 허벅지를 때리는 구타를 가리키기도 한다. 일본식 군대.폭력 문화의 잔재인데, 많은 남자들이 단체생활 특히 군대생활에서 겪었으리라 생각한다. 이 글을 쓰며 ‘빠따’에 대해 몹시 쓰라리고 씁쓸한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1974년 상고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다 대학의 필요성을 느끼고 1년 만에 사표를 썼다. 당시 서울 종로에 있던 대학입시 학원에 찾아가, ‘기도(문지기)’로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학원 입구에서 수강증을 검사하거나 강의실 칠판을 닦아주면 무슨 수업이든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는 말을 들은 터였다. 과장이라는 사람이 저녁에 다시 오라고 했다. 들뜬 마음으로 갔더니 옥상으로 데려가 ‘각구목’으로 ‘빠따’를 100대 치겠다고 했다. 맞는 동안 소리를 지르거나 몸을 비틀면 그때까지 맞은 건 무효라며 다시 시작해 100대를 채워야 한다면서. 설마 때려죽이겠느냐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 비쩍 마른 몸으로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고 꿈쩍없이 ‘빠따’ 100대를 맞는 스무살 독종의 깡다구나 오기에 ‘가오’ 잡으려고 때리는 30-40대의 통통한 놈이 오히려 기죽지 않았을까. 그 때문이었는지 반년 만에 ‘기도 대빵(반장)’ 감투를 썼다.
얼마 후 수강증 없이 강의 들으려는 학생과 시비가 붙었다. 우람한 체격의 상대에게 붙잡히면 당할 것 같아 킥복싱 좀 배운 실력으로 ‘선빵(선제공격)’을 날렸다. 맞은 녀석이 바닥에 쓰러져 대성통곡하는 바람에 학원에 난리가 났다. 다음날 수업을 받고 나오다 학원 입구에서 경찰 2명에게 붙잡혀 파출소로 끌려갔다. 전날 저녁 나에게 맞은 학생이 경찰서장 아들로 누구에게도 맞아본 적이 없는데 그를 때린 놈이라면 학원가 깡패가 분명하다며 체포령이 떨어졌단다. 그 과정에서 날 도피시키거나 보호해주기는커녕 경찰에게 날 지목해주며 적극 방조한 사람이 ‘빠따’를 쳤던 과장이었으니 참 비루한 직장 상사였다. 폭행.상해죄로 종로경찰서 유치장을 거쳐 서울구치소 전신인 서대문감옥에 갇혔다. 한 달 만에 풀려나 ‘기도’로 돌아가진 않았지만 공짜로 학원 수업을 계속 받으며 대학입시에 겨우 붙었다.
1976년 꿈에 부푼 대학생이 됐는데 한 달 만에 군대 들어오라는 영장을 받았다. 난 초등학생 때부터 아무리 크고 많은 숫자들도 머리만 끄덕끄덕하면 암산할 수 있는 주산 유단자에 글씨도 제법 잘 쓰는 편인데, 사병들은 중학교나 고등학교 졸업자가 많던 그 무렵 대학 재학이라는 학력까지 갖추었으니 이등병 때부터 서무계를 맡았다. 전방에서 계급은 가장 낮아도 점호도 받지 않고 보초도 서지 않는 등 이른바 끗발은 가장 셌다. 그래도 행정반 고참(선임) 하나가 시샘 때문인지 내가 건방지다며 가끔 ‘빠따’를 들었는데, 난 고참이 돼서도 누구에게든 ‘빠따’는커녕 기합(체벌) 한 번 주지 않은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병역 33개월을 ‘에누리’ 없이 ‘잇빠이.입빠이(가득)’ 채우고 1979년 대학 1학년으로 다시 들어갔다. 1983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유학을 준비하며 미국행 항공료와 1년치 등록금을 될수록 빨리 마련하기 위해 화장품회사 영업사원으로 취직했다. 영업직은 사무직과 월급은 같아도 여비와 숙식비 등 출장비가 쏠쏠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업사원들끼리 여관에서 고스톱 치면서 출장비를 거의 잃기 일쑤였다. 화투가 일본에서 들어온 탓인지 일본어가 몹시 많았다. 새 다섯 마리를 가리키는 5점짜리 ‘고도리’, 둘이 협상.거래하는 ‘쇼당’, 판이 중단.취소되는 ‘나가리’ 등. 아마 1990년대 말까지 우리사회에 고스톱 열풍이 불어 동료 교수들과 점심이나 저녁 먹으러 식당에 가면 ‘자부동(방석)’을 깔아놓고 화투를 얹어놓은 방에 들어가곤 했다.
1990년대 초 하와이에서 공부할 때 동포사회에 ‘가라오케.가라오께(노래방)’가 많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가라’는 ‘비어있는 상태’나 ‘가짜’를 뜻하고 ‘오케.오께’는 ‘오케스트라’를 줄인 말이니 일본인들의 축약조어가 재미있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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