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가 라면을 먹는 방법 / 박 웅
아버지는 밤과 낮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아왔다. 동이 트지 않은 새벽에 출근해서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는 오후에 퇴근하는 아버지를. 점심 숟가락을 놓고 일어나서 모두가 잠든 자정쯤에 내 곁에 와 앉는 아버지를. 개구리가 울어대는 밤부터 새가 울기 시작하는 아침까지 일하는 아버지를.
그런 그에게 아버지에게 밤과 낮의 구분이란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넣는 일처럼 무의미했다. 마치 수치가 입력된 기계처럼 성실히 일했고, 쉬는 날엔 미동도 않고 잠에 빠졌다. 모두가 아버지를 향해 ‘빡세겠다’고 입을 모았다. 그래서 그에게 힘을 주는 건 대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힘은 보통 먹는 것과 연관돼 있으니 보통의 경우, 단서를 풍기는 향으로부터 찾기 마련이다. 대부분 손에 들린 고소한 옛날 통닭을 떠올리거나 연신 코를 강타하던 지릿한 술 냄새를 기억할테지만, 나는 조금 달랐다.
대장장이가 구부러진 쇳대를 펴는 듯한 ‘소리’가 반드시 시작되어야 했다. 아버지는 쇳물처럼 보글보글 끓어 오르는 물에다가 무언가를 ‘탕탕’ 털어 넣었다. 그 어디쯤 부터였다. 내 기억의 시작은. 후루룩, 검은 낯빛의 사내가 저쪽으로 등을 돌리고 힘차게 라면을 빨아 들였다. 가장 뜨끈한 아랫목에 반듯하게 눕혀진 나는 그 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후, 흡, 서걱서걱, 사라락, 꿀꺽꿀꺽. 소리의 신세계가 라면 한 그릇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는 나를 깨웠다. ‘안자는거 다 안다’ 고.
동굴을 빠져 나오듯 어두운 이불 속을 탈출한 내게 국물에 밥을 말아서는 한 숟갈 떠서 입에 댔다. 갈라지고 터진 손으로. 그러나 나는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그러면 신김치 줄기를 시금치 한가닥 크기로 잘라서 숟갈 위에 올려 주었다. 밥알이 입안에서 부서지며 녹진해진 국물이 쭉하고 밀려 나왔다. 그게 지루해 질 때쯤, 신맛이 뒤를 쳤다. 그렇게 몇 번이고 받아 먹다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해마가 떠 올랐다.
해마는 수컷이 뱃속에서 새끼를 품고 다녔다. 말띠인 아버지는 자신을 이따금 잘생긴 말에 비유했는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해마 좀 봐라. 물에 사는 것 중에서 가장 인물이 좋지’ 물 속에서 사는 것들을 보고 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그건 해마도 마찬가지였다. 되려 아래는 음표처럼 구부러지고 머리만 말을 닮은게 더 괴이했달까. 그리고 라면밥의 마지막 숟갈에는 이런 질문으로 덮여 있었다. 해마가 자식에게 라면을 먹이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한참이나 곱씹었다. 깻잎 논쟁만큼이나 사라지지 않는 논쟁이 있다. 스프부터 넣느냐, 면부터 넣느냐다. 아버지는 스프부터 탈탈 털어 넣었다. 그러면 집 안 구석마다 스프 냄새가 들어 찼다. 이불에도, 옷에도, 머리칼을 쓸어 넘길 때도 스프 특유의 향이 코를 후벼 파고 들었다. 후드를 켜세요, 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아 버지는 대답없이 굽은 어깨를 털며 또 다시 스프부터 넣었다.
그러다 면접을 보게 되었다. 내가 면접 실에 들어서자 면접관은 살짝 코를 씰룩거렸다. 내가 입은 정장에도 스프냄새가 짙게 베어 있었으리라.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심하게 화를 냈다. 다시는 라면을 먹지 말라고 엄포도 놓았다. 그리고 스프 냄새 나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억지로 잠을 청했다. 나는 그 안에서 조금 후회하다가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 후,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면을 삶아 건져내 간장에 비벼 드셨다. 그게 나 때문인지 아니면 속이 아픈 아버지의 방책이었는지는 모를 일이나 집 안에서 스프 냄새 만큼은 말끔히 사라졌다.
얼마 뒤에 다시 면접이 잡혔다. 의기양양하게 고속버스에 올랐다. 자리에 앉아 자켓을 옷걸이에 걸었 다. 버스가 움직일 때 마다, 반듯하게 다려진 자켓이 아카시아 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거기서 또 스프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날이 곧게 선 허벅지에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이번엔 유독 매운 라면이었구나,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