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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죄(original sin , 原罪)
(요약)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모든 인간이 나면서부터 처하게 되는 죄의 상황이나 상태, 또는 기원(이유나 근거)을 가리키는 말.
전통적으로는 그 기원이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죄에 있다고 보며, 아담 이후로 그의 죄책이 후손들에게 유전되었다고 본다.
아담
원죄 교리의 근거는 성서에 있다.
인간의 상황(고통·죽음·죄를 향하는 보편적 경향)은 〈창세기〉 처음 몇 장에 나오는 첫 사람의 타락기사에 의해 설명되지만, 죄가 유전적으로 모든 인류에 전가되었다는 구체적인 언급은 〈구약성서〉에 없다. 복음서에도 인간의 타락과 보편적인 죄의 개념이 간접적으로 언급될 뿐이다.
이 교리의 주된 성서적 근거는 사도 바울로의 저작들, 특히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 12~19절에 있다. 난해한 이 본문에서 바울로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죄와 죽음이 아담으로 인해 세상에 들어왔지만, 은총과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 풍성하게 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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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구스티누스의 윤리철학- 기독교와 그리스 철학의 신학
원죄설 · 은총설 · 예정설은 존재론과 인식론만이 아니라 정치철학과 윤리철학에 대한 문제의식을 포괄한다. 원죄설에 의하면 신이 창조한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하여 인간에게 원죄가 생긴다. 당시 필사본 성경에 그려진 〈아담과 이브〉는 이 과정을 보여준다.
〈아담과 이브〉 840년경
여덟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맨 위는 신이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는 모습이다. 다음은 신이 에덴동산에 살게 하고 선악과를 따먹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전달한다. 신은 그들에게 불사의 몸을 주었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면서 축복을 주었다. 하지만 신의 계획이 파괴되기를 원한 사탄이 이브를 유혹한다. 세 번째는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후 부끄러움을 알게 된 아담과 이브에게 신이 노여워한다. 좌측 그림을 보면 하나의 그림 안에 선악과를 따는 이브와 아담에게 전달하는 이브가 동시에 그려져 있다. 그림의 사실성과 완결성보다는 이야기 전개를 위해 시간 개념을 무시하고 있다. 마지막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이다. 그들과 자녀는 병과 고통과 육체의 죽음을 겪게 되었다. 신을 거역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써 아담의 범죄는 인류를 영원한 죄에 빠뜨렸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아담의 죄는 모든 인간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된다. 심지어 사회 관습에 물들지 않은 어린이조차도 죄를 짓는다. “어린 시절에도 죄가 있다. ··· 연약한 어린아이의 몸에는 죄가 없지만 그 영혼에는 죄가 없지 않습니다. 나는 어린아이가 시기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알았습니다.”
죄와 악은 무엇이며 왜 생겨났는가? 만약 악이 실재한다면 누가 만들었는가? 신을 절대화한 기독교로서는 신이 악을 창조했다면 스스로 모순에 빠진다. 그렇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창조의 결과물로 보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선이고, 악은 선의 결핍 상태다. 존재하는 것은 빛이지, 원래 어둠이란 실체가 없다, 빛이 모자랄 때 어둠이 생긴다. 그러므로 선의 결핍 상태인 악은 신이 아니라 인간의 죄인 부패와 타락에 의해 생겼다.
모든 죄는 아담이 그러했듯이 신의 명령대로 살지 않고 자유의지를 남용 · 오용했기 때문에 생겨났다. “자유의지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악을 저지르게 하는 근본 원인이며,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주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인간의 육체가 원래 악한 것은 아니었다. 육체가 영혼의 감옥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 피조물이 자유의지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냈다. 자유의지에 의해 육체를 매개로 욕망과 타락이 생겨났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설과 예정설은 원죄설의 자연스러운 귀결로서 전개된다. 자유의지로 죄를 범했으므로 인간에게는 직접 구원을 요청할 권리도 없다. 이성이나 의지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신의 의지와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논리는 신의 은총을 받아 구원될 자는 신이 미리 정해놓았다는 예정설로 이어진다. 구원 주체가 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적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고 신의 선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신은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는 존재이므로 구원 대상 역시 미리 예정되어 있다. 은총을 위해서는 참회해야 하는데, 이는 선한 행동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을 향한 절대적 신앙을 가질 때 가능하다. 결국 인간의 죄는 신에 귀의함으로써만 구제된다. 지상에서는 유일하게 교회를 통해서만 신에게 절대 복종할 수 있다.
1. 자유의지의 역할
아우구스티누스의 윤리관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용과 비판 양면을 모두 고려할 때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죄가 육체적 욕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물질과 감각적인 것을 차단하고 영혼이 고양되어 진정한 지식을 갖출 때 덕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 플라톤과 확실히 다르다. “우리의 영혼이 덕이라고 규정하고 애정을 기울이는 것이어도 신의 빛을 나타낼 수 없으면, 오히려 악이 된다.” 덕은 인간 영혼을 통해 실현될 수 없으며, 심지어 악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플라톤이 죄의 원인을 육체적 욕망으로 파악하고, 영혼을 통한 치유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오류다.
원죄설 입장에서 볼 때 죄는 자유의지를 매개로 하는 인간의 영혼에서 비롯된다. 영혼과 자유의지가 죄의 원인일 때 인간은 더 이상 윤리 회복의 주체일 수 없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는 없다. 덕을 알고 실행하는 구체적 방법인 선의지를 통해 덕에 이를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인간에 의한 선의 실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윤리적 결단의 자유를 강조하고 원죄설을 거부한 수도사 펠라기우스(Pekagius)와 그 추종자들에 대항하는 논리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덕의 실현에서 자유의지의 역할을 모두 부정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존재론과 인식론에서 나름대로 이성의 영역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스스로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꼴이 된다. 인식론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그러했듯이 독특한 인식 방법의 틀을 면밀히 고려하여 접근하지 않는다면 윤리관에서도 미로를 헤매거나 그의 의도와 반대되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인간이 덕을 실현하는 주체가 아니라고 해서 곧바로 자유의지의 역할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신의 은총과 예정에 의한 구원을 전제로 하되 모든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인간이 노력하지 않고 신을 믿기만 해도 선할 수 있다면 세상에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거의 없다. 은총설과 예정설은 신이 손을 내민다는 점에서 일차적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신이 내미는 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또한 어떤 계기로 자기 앞에 손이 와있는지를 알기도 쉽지 않다. 신이 내민 손을 잡아 인도하는 대로 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필요하다.
“나는 멸망하지 않는 것이 멸망하는 것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으로 당신을 찾았으며, 또한 이런 관점에서 악의 근원이야말로 부패하는 유한한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신을 찾는 ‘인식’의 작용이 필요하고, 인간의 영혼 스스로가 죄의 근원임을 ‘깨닫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이를 정신과 의지가 담당해야 함을 진정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억눌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은총으로 자유의지가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의지가 갖는 문제의식을 기독교 입장에서 부분적으로 수용했다. 그래서 인간의 의지 영역인 절제와 중용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절제는 육체적 정욕을 제어함으로써 정욕이 지성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한다. ··· 현명함은 악에 동의하지 말라고 가르치는데, 정작 거기에 동의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절제다. 하지만 현명함도 절제도 현세 생활에서 그 악을 없애지는 못한다.”
현명함과 절제 즉 앎과 선의지로도 악을 없애지는 못한다. 하지만 신의 뜻을 깨달으면 자신의 삶에서 악을 피할 수는 있다. 인간의 몫은 소극적 의미로서 덕의 실현이다. 이때 악에 동의하지 않도록 현명함 즉 앎은 판단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작 거기에 동의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절제” 즉 의지다. 앎과 의지가 인간의 내부에서 함께 작동할 때 악을 피할 수 있다. 앎과 함께 실현 방법으로서 선의지를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기독교 교리에 맞도록 수정하여 혼합하고 있다.
앞의 주장에서 보면 절제가 맡아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육체적 정욕의 제어다. 인간의 정신적 타락은 육체적 정욕에서 오기 때문에 절제를 통한 통제가 중요하다. 사치와 향락은 물론이고 추행을 비롯한 대부분의 악은 육체적 욕망과 긴밀히 연결된다.
〈보석으로 치장한 여인〉, 500~550년, 비잔틴 모자이크
비잔틴 모자이크인 〈보석으로 치장한 여인〉은 육체적 쾌락을 둘러싼 욕망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전면에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이 있다. 머리의 관에서 귀걸이와 목걸이, 심지어 옷에 이르기까지 온갖 보석으로 치렁치렁하다. 옆에는 여인을 유혹하려는 남자가 있다. 남자도 고급스러운 옷으로 치장하고 있는데, 유혹하기 위해 꽃을 한 아름 들었다. 꽃이 들어 있는 길쭉한 모양의 통은 부를 상징하는 풍요의 뿔이다. 여인에게 꽃만이 아니라 부를 제공하겠다는 의사인 듯하다. 육체적 사랑과 부를 향한 욕망이 한 그림 안에 여러 상징으로 버무려져있다.
육체적 욕망이 신으로부터 인간을 멀어지게 하는 가장 큰 죄악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녀 간의 사랑과 성행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식을 낳기 위해서 결합되는 혼인 약속의 속박과, 정욕적인 사랑 약속과의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후자의 경우, 일단 자식이 태어나면 애정이 생긴다고 하지만 그 아이는 남녀 의사에 반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결혼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성교는 죄가 아니다. 이를 제외한 모든 성교는 육체적 욕구 충족이므로 물질의 사랑으로서 부정된다. 또한 결혼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자녀를 두려는 목적에만 육체적 관계가 정당화된다. 덕은 영혼이 육체를 완전히 지배하고 신에게로 향할 때 이루어진다. 하지만 성은 영혼의 작용인 의지에서 독립해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덕이 있는 생활과 부합하지 않는다.
이때도 중용의 태도가 필요하다. “중용은 척도와 잘 조화된 절제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잘 조절된 척도가 있는 곳에는 더 많음도 더 적음도 없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부족함에 대해 반대로 설정한 충만함이며 이것은 넘침이라는 낱말보다 훨씬 더 적합하다. ··· 충분한 것 이상으로 생기는 곳에서 우리는 중용을 원한다. 모든 과잉은 척도를 결여하고 있다. ··· 정신의 척도는 지혜다.”
실천적 의지에 해당하는 절제에서 중용의 태도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중용의 기준은 ‘충만함’이며, 부족과 과잉은 인간을 육체적 욕망의 노예로 만든다. 중용을 척도와 연관시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용은 무작정 중간이 아니다. 각각의 것에 가장 바람직한 상태인 척도가 기준이다. 척도를 무엇으로 세울 것인가? “정신의 척도는 지혜”라고 함으로써 다시 정신이 담당해야 하는 역할로 돌아온다. 결국 원리로는 신의 은총과 예정에서 비롯되고, 직접적으로는 인간의 정신과 선택의지가 제 기능을 할 때 덕을 실현할 수 있다.
2. 행복의 실현
헬레니즘 시기 대부분의 철학이 그러하듯이 아우구스티누스도 행복 실현을 인간 행위의 목표로 보았다. 하지만 무엇을 행복으로 보는가, 어떻게 행복에 도달하는지에서는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원죄설 · 은총설 · 예정설의 논리에 의해 행복은 원리적으로 신에 의해서만 실현된다. “최고선에 도달하면 행복해지기에 그 이상 무엇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 ··· 그래서 플라톤은 철학이 곧 신에 대한 사랑임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 지혜를 탐구하는 사람은 신을 향유할 때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8)
기독교와 그리스 철학을 화해시키는 중요한 접점이다. 그리스 철학과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둘 다 선을 통한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찾는다. 행복 추구를 불변하는 인간의 특징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스토아학파에 이르는 그리스 철학의 전통을 수용한다. 물론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은 육체와 정신의 향유가 아니고 오로지 신을 향유해서 라고 말한 플라톤 학자들에게 모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언급하듯이, 플로티노스의 영향과 그가 제시한 신 개념이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변형되는 과정을 전제로 수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인간의 의지에 앞선, 신에 의한 윤리적 의무다. 흔히 3주덕이라고 얘기하는 믿음 · 소망 · 사랑 가운데 성경의 가르침대로 특히 사랑이 윤리적 삶의 핵심이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다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사랑은 악으로 귀결된다. 윤리적으로 옹호되는 사랑은 카리타스(caritas) 즉 신에 대한 절대적 사랑이다. 다음으로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사랑의 대상인 피조물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위의 최고 목적인 신을 향해야 한다.
악으로 연결되는 사랑은 쿠피디타스(cupiditas) 즉 자기와 세상에 대한 사랑이다. 무질서하고 왜곡된 사랑이다. 사랑하는 대상 자체가 목적이 되어 여기에서 즐거움을 향유하느라 신에게서 멀어지기 때문에 악으로 귀결된다. 그는 “빼앗길 수 없는 것만을 사랑할 것”을 권유했다. 영원한 것만을 사랑해야 한다. 지상의 부나 육체는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영원한 것은 신이므로 신을 사랑해야 행복에 도달한다. 철저한 금욕주의적 도덕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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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퀴나스의 윤리철학 - 중세 신학의 상식화, 합리화
《신학대전》은 윤리 문제에 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아퀴나스도 인간의 참된 행복 추구를 목적으로 설정한다. 하지만 구체적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엄격한 원죄설에 기초하여 은총설과 예정설을 통해 인간의 죄와 구원을 다루었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죄를 범했으므로 인간에게는 구원을 요청할 권리도 없고, 구원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오직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신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만이 구제의 길이었다. 아퀴나스 역시 기본적으로는 원죄설에 기초한다. “아담과 그 후예들은 모두 ‘본성의 죄’라 불리는 원죄를 지니게 되었다.”라고 한다. 하지만 원죄의 성격과 적용 범위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적지 않은 차이만큼 상당한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피스트를 비롯하여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리스 철학 이후로 대체로 서구적 사유방식의 공통분모에 해당하는 인식 틀을 갖고 있다. 다만 그것이 중세로 접어들어서는 신학이라는 형식을 띠고 나타났을 뿐 발상법 자체가 공통의 뿌리에 기초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1. 선과 악의 문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다. 윤리 문제에서도 선과 악에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꿰어 맞추었다. 선에 해당하는 항목을 열거하고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악으로 규정한다. 위계화된 질서와 조화는 선에, 무질서와 혼란은 악에 해당한다. 그리고 위계화된 질서를 윤리의 이름으로 옹호하면서 이를 국가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연결시키는 것도 상당 부분 같다. 선에 일치하는 사고와 행위는 행복 혹은 구원으로, 악은 형벌 혹은 지옥으로 이어진다. 초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이분법적 구분, 초자연적으로 연결되는 정신과 자연으로 연결되는 육체의 분리도 대표적이다. 초자연적인 것의 중시는 목적론적 관점을 정당화시킨다.
기독교의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가장 잘 표현한 그림이 아마 많은 화가가 단골 주제로 삼은 ‘최후의 심판’일 것이다. 최후의 심판은 신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인간 세상이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의 마지막을 최후의 심판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신의 정의가 모두에게 분명하게 드러나야 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공로와 과실도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각자는 상급 또는 형벌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최후의 심판을 통해 신앙을 가진 선한 인간이 어떻게 보상받고, 반대로 신앙이 없거나, 신앙이 있더라도 악을 행한 인간이 지옥에서 어떻게 고통받게 되는지를 매우 장황하게 다룬다.
〈최후의 심판〉, 지오토, 1304~6년
지오토의 〈최후의 심판〉을 보면 기계적인 선악 이분법이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화면의 상하를 초자연적 세계와 인간과 직접 연관된 세계로 구분한다. 위는 중앙의 예수를 중심으로 좌우에 열두 제자로 보이는 성인들이 있고, 위로는 천사들이 자리 잡았다. 아래는 최후의 심판을 통해 인간이 받을 구원과 형벌을 다룬다. 아래의 좌측은 선을 상징하는 구원, 우측은 악을 상징하는 지옥이다. 구원과 지옥은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도 포함한다. 지옥으로 떨어진 인간은 예외 없이 인간의 신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육체적인 것이 죄와 연관된다. 반대로 구원받는 인간은 옷으로 가려 육체의 노출을 최소화하고 있다. 그만큼 육체와 분리된 정신을 묘사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질서와 무질서, 조화와 혼란이라는 이분법도 포함되어 있다. 위쪽의 세계는 한눈에 보기에도 반듯하게 줄 지어 있어서 마치 군대의 사열처럼 일사불란한 질서를 보여준다. 반대로 아래 우측의 지옥은 어떠한 질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극도로 혼란한 상황이다. 좌측의 구원받는 인간은 천상계처럼 획일적이지는 않지만 비교적 질서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인간의 모든 죄를 원죄로 환원시키지는 않는다. 분명히 ‘본성의 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담 이후 인간에게 이어지는, 일종의 유전이지만 “아담의 다른 죄들은 그의 본성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에 해당된다. 따라서 공로가 유전되지 않듯이 이 나머지 죄들도 유전되는 것이 아니다.” 본성에 해당하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벗어날 수 없는 원죄와 개별 인간의 인격에 의해서 자행되는 죄를 구분한다. 이는 중요한 차이다. 만약 인간의 모든 죄가 원죄에서 비롯된다면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신의 은총만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지은 죄가 따로 있다는 논리는 인간의 의지로 죄에서 벗어나는 영역이 존재할 수 있게 되고, 그만큼 자유 의지가 필요해진다.
그러면 어디까지 본성의 죄이고 어디부터 개인의 인격에서 비롯되는 죄일까? 본성의 죄인 원죄의 원인은 본래적 정의의 결핍이다. “그 본래적 정의를 형성하던 조화의 절정은 의지가 신에 복종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원죄에 있어서 의지가 신을 기피하는 것이 그 형상적 부분이고, 이것이 바로 죄악이다. 인간 기능의 내적인 혼란 즉 탐욕은 질료적 부분이다.” 즉 신을 기피하고 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는 것은 원죄에 해당하고, 신에 귀의함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것이 죄의 형상적 부분 즉 본질적 내용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두 환원될 수 없는 죄, 인간 기능의 내적 혼란에 해당하는 탐욕에 의한 죄가 별도로 성립하는데, 질료적 부분으로서 스스로 극복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죄의 주체에 대해서도 매우 부분적이지만 그리스적 전통을 복원한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죄가 인간의 육체적 욕구에서 비롯되기에 영혼과 의지를 통해 벗어날 수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죄가 의지에서 비롯되기에 죄의 원인인 의지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조금 다른 견해를 보인다. 기본적으로 죄는 인간적 행위이고, 인간적 행위의 원리는 의지에서 비롯되므로 죄의 주체는 인간의 의지다. 하지만 모든 죄가 그렇지는 않다. “의지가 명한 행위 이외에도, 의지에 의존하는 능력들이 명령한 행위도 있으므로, 죄의 주체는 꼭 의지뿐만은 아니다. ··· 관능 즉 감각적 욕구의 움직임도 의지에 의존할 수 있고 따라서 관능 속에도 죄가 있을 수 있다.” 육체적 · 감각적 욕구가 죄의 원인일 수도 있다고 분석함으로써 인간 이성을 통해 극복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자연적 윤리법칙은 오직 이성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아퀴나스 역시 목적론적 윤리관을 지닌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목적에서 존재한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특징적인 것에 충실함으로써 목적이 실현된다. 인간의 특징을 이성에서 찾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어받는다.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은 지성이므로, 참된 행복은 무엇보다도 지성의 활동이고, 마음으로는 의지의 활동이기도 하다.” 윤리를 행복의 추구와 같이 여기고,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목적을 충족시켜야 함을 강조한다. 행복 실현에서 이성을 강조한 것은 그만큼 자유 의지, 주체적 개입의 여지를 확대한다.
여기에서 앞서 구분한 형상적 죄와 질료적 죄, 역으로 표현하면 형상적 목적과 질료적 목적 즉 초자연적 목적과 자연적 목적으로의 구분이 실천적 의미를 갖는다. “자연적 행복에 비례하는 도덕적 덕 외에도 초자연적 행복에 비례하는 다른 덕”을 구분하고 “자연적 윤리법칙이란 이성적 피조물 측에서 신의 법칙에 관여하는 것이다.”라고 규정한다. 인간의 본성은 타율적이지만은 않다. 이성을 통해 신적 윤리를 인식하고, 이를 통해 원죄는 아니어도 인격에 해당되는 죄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2. 사려의 덕과 선의지
아퀴나스는 윤리 영역에서 요구되는 의지를 논하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의지’ 개념에 상당히 근접한다. “인간은 자기 의지와 자기 행동의 주인이다. 그래서 의지로부터 나오는 행동일 때 인간적 행위다. 그런데 의지의 대상은 선(善)이다. 아니 선은 바로 의지가 그것 때문에 움직이게 되는 목적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인간적 활동들 속에서 언제나 하나의 목적(선)을 가지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의지를 통해 선을 실현하려는 노력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워낙 원죄설 · 은총설 · 예정설의 그림자가 강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의지에 해당하는 문제의식도 가지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제한적이었다. 이에 비해 아퀴나스는 의지 영역을 더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의지’에 해당하는 내용을 ‘사려의 덕’으로서 설명한다. ‘선의지’와 마찬가지로 ‘사려의 덕’을 윤리의 목적과 수단에 관련된 것으로 본다. “어떤 윤리적 덕도 사려의 덕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윤리적 덕은 선택적 습성이기 때문에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윤리적 덕에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윤리적 습성의 직접 결과인 올바른 목적으로 기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올바른 선택도 마찬가지로 요구된다. 이는 목적을 위한 모든 방법에 대해 조언하고 판단하고 명령하는 사려의 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선을 위한 의지로서 사려는 하나의 능력으로, 선택과 방법에 직결된다. 특히 선택이 중요한데, 선택은 본질적으로 의지 행위다. “사람은 이것 또는 저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면에서 자기 행위의 주인이다. 그런데 그것은 선택이란 최종 목적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도달하는 방법과 관계된 것이다.” 선택의 강조는 어떤 수단을 선택할 것인지의 의지가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앎과 믿음만으로 덕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방법론으로까지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수단의 선택에서 어떤 필연성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또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목적만으로 올바르게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덕과 지를 일치시킨 소크라테스를 비판하며 선한 행위를 위한 구체적 수단과 방법을 다루는 선의지가 별도로 필요하다고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 덕에 이르기 위한 주체적 노력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과 분리된 덕의 실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오직 신의 도우심과 더불어서만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인간 스스로는 어림도 없다. 그의 자연적 능력을 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신의 도우심’이다. 신을 믿음으로써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덕은 신의 도움을 받아 인간이 실현해야 한다. “신은 우리의 의지가 최종 목적에로 향하고 거기 이를 수 있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선행과 공로를 통해서 추구해 나아가길 신은 원한다.” 최종적으로는 인간이 선을 향한 의지와 덕의 실천을 통해 스스로 실현해나가기를 신이 원한다.
그러면 선을 향한 의지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기본적으로는 인간 스스로의 이성에 의해서다. “악마는 결코 의지를 강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성은 그 사용이 저지되지만 않는다면,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의지는 악을 낳기도 하지만 반대로 악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기반이다. 외부적 요소들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뿐이고,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한다면 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중요한 결론인 중용 개념도 적극 수용한다. “덕은 올바른 이성과의 일치됨이다. 그 규범인 이성으로부터 혹은 지나침 때문에 혹은 부족 때문에 멀어질 수 있다. 따라서 덕은 중용(中庸)을 지키는 데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용은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러했듯이 단순히 이것과 저것 사이의 산술적 중간이 아니다. “이성의 중용은 이성의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이성과 올바로 합치하는 데 있다.” 중간 개념이 아니라 이성으로 확인된 바와의 합치, 본성과의 합치를 의미한다. 또한 “우리의 이상적인 인간상의 내용은 차례차례 발견되는 것이며, 또 차례차례 실현되는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윤리적 실천이 신앙의 선택이나 일회적 반성을 넘어서 점진적으로 실현됨을 강조한 점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와 닿아있다.
3. 육체적 욕망과 행복
“모든 인간은 본성상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성적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2) 인간 행위의 목표는 행복 실현이다. 본성에 해당하는 행복은 그만큼 절대적 가치다. 그런데 본성을 이성에서 찾고 있다. 행복이 이성에서 비롯되면 감각은 자연스럽게 행복과 무관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사랑하지만, 이는 다만 유용성을 위해서만 사랑할 뿐,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다.” 감각 자체의 부정은 아니나, 행복의 문제와는 별개다.
모든 감각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만큼이나 육체적 쾌락, 특히 성적 쾌락에는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낸다. “색욕은 쾌락을 통한 방탕을 말하며, 무엇보다도 방탕을 야기하는 불순한 쾌락이기 때문에, 이는 불순한 쾌락과 관련된 악습이다. ··· 이성의 질서에 따라, 종의 보존과 부합되는 육체적 쾌락의 사용은 죄가 아닐 수 있다.” 자손을 낳기 위한 성 행위만이 정당하다. 나머지 성적 욕구들은 방탕을 야기하기에 죄에 해당한다. 특히 색욕은 하위의 힘이 상위의 힘을 거스르기 때문에 더 문제다. 성적 욕구를 추구함으로써 “정신의 실종, 무분별, 정신적 판단에서의 조급함과 경솔함,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하나님에 대한 증오, 현세적 삶에 대한 애착 그리고 의지 안에서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색욕의 자녀들을 추종하게 된다.” 정신을 훼손하고 신앙을 약화시키는 등의 온갖 부정성이 색욕에서 비롯된다.
〈신체의 관리법〉, 삽화, 1285년
당시의 성 지침서이던 〈신체의 관리법〉 삽화에서 성도덕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이 지침서는 아이를 만들기에 가장 적당한 시간에 초점을 맞춰 적절한 남성 체위를 설명한다. 출산을 위한 성행위로 제한된 내용일 뿐 육체적 욕구나 쾌락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성교에 탐닉하면 아이를 생산하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책에는 성교를 할 때 느낄 수 있는 남성과 여성의 즐거움을 언급하는 내용이 아예 없다. 그림을 보면 두 남녀가 이불로 몸을 가리고 정상 체위 자세를 취하고 있다. 육체를 탐닉하는 격정적인 모습이라곤 볼 수 없다. 남성은 임신이라는 임무에 집중하고 있는 듯 멍하게 허공을 응시한다.
아퀴나스는 금욕을 덕에 연결시킨다. “완전한 금욕 즉 어떤 육체적 쾌락에 대한 극기는 순결과도 같으며, 좁은 의미에서 볼 때 덕이다. 그러나 악한 욕망들에 대한 강렬한 열정을 억제하는 금욕은 넓은 의미에서도 덕이다. ··· 금욕은 또한 정욕을 억제하는 것이며, 이는 의지의 영역에 속하는 덕이다.” 성적 쾌락을 제거할 때 순결함에 이르기 때문에 덕이거니와, 더 나아가서는 금욕이 육체적 욕망만이 아닌 인간의 온갖 부적절한 물질적 · 정신적 열정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덕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성적 쾌락은 물론이고 순간적 · 일시적 기쁨을 제공하는 모든 것은 행복을 제공할 수 없다. “사실상 더 지속적인 어떤 것이 더 행복한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가 행복한 것을 지속적으로 가지고자 하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것은 육체와 물질에서 구할 수 없다. 육체적 · 물질적인 것은 사멸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연조차도 계절에 따라 수시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 신적 · 정신적인 것만이 영원히 지속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행복의 전제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