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르담 성당 화재로 바라본 프랑스의 중국 원명원 방화사건(下)

전쟁과 약탈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언제나 함께 해왔습니다. 규모가 크든 적든 전쟁과 함께 늘 약탈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전쟁은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인간의 이기심이 낳은 결과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군 전쟁처럼 전쟁은 처음 시작할 때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결국 경제적인 이유나 정치적 욕망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옛날의 전쟁모습은 많은 병사들이 걸어서 원거리를 이동하는 형태였습니다. 실제로 적과 싸우다 죽는 경우도 있지만, 적을 만나기도 전에 이동하다 죽거나, 군량미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굶어 죽거나, 낯선 이국땅의 풍토병에 걸려 죽거나 하는 경우가 허다했죠.
이렇게 목숨을 걸고 고생 고생하는 병사들을 위로하는 가장 야만적인 방법이 바로 ‘약탈’이었습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한 도시를 침략하고 싸우는 과정에서 목숨을 걸고 고생한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장군들은 성을 점령한 후 2, 3일의 약탈 기간을 주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일정 기간 동안 병사들의 일탈 행위를 허용해 주는 것이죠.
전쟁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약탈의 결과도 참혹한 경우가 많았는데, 귀금속 약탈이나 방화는 물론 병사들이 저지르는 부녀자들에 대한 몹쓸 짓들은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영.프 연합군의 방화와 약탈로 파괴되어 흔적만 남은 원명원
제2차 아편전쟁 발발
중국 역사상 외세에 의한 가장 안타까운 약탈은 바로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일어났던 원명원 방화사건입니다.
제1차 아편전쟁 이후 영국은 각종 불평등 조약을 맺고 홍콩을 기점으로 중국에서 각종 특권을 차지하려는 시도를 해 왔지만, 번번이 청나라 황실의 저항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수많은 식민지 건설로 큰 재미를 본 영국은 오히려 기존에 맺었던 조약을 하나씩 수정해서 더 많은 이익을 뽑아가려 했죠.
이러한 시도가 자꾸만 실패로 끝나자 영국은 애로호 사건*을 핑계로 수도 베이징을 무력으로 입성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서양인이라면 치를 떠는 당시의 중국 분위기에서 때마침 프랑스 신부 샤프드렌이 중국인 신도들을 선동하여 모반을 꾀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처형되자 마침 이때다 싶은 프랑스도 이를 핑계 삼아 영국과 연합해 함께 베이징으로 돌격했으니 바로 제2차 아편전쟁 발발이 그것입니다.

▲ ▼ 아편전쟁을 그린 그림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중국의 방어선을 하나씩 뚫고 베이징을 향해 다가오자 당시 황제였던 함풍제(咸豊帝. 청나라 제9대 황제. 재위 1850~1861) 는 열하(热河)로 피난을 떠납니다. 황제가 떠나버린 베이징에 1860년 10월 6일 프랑스 군대가 먼저 원명원에 도착하고, 하루 늦게 영국 군대가 도착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원명원 약탈이 시작되었습니다.
원명원에 도착한 영.불 연합군은 원명원 안에 있던 값진 물건들을 자기 나라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고, 옮기기 힘든 보물들은 대부분 파괴해 버렸습니다. 당시 영국군은 중국 황제에게 원명원이 어떤 존재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원명원 약탈 이후 충격을 받은 함풍제의 모습을 보고 원명원이 황제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궁전’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약탈에 대한 황제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이 끝내 원명원을 파괴하고 원명원을 불태워 버렸던 것은 심각한 약탈의 범죄를 가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평소 서양인에게 안하무인이었던 중국의 황제에게 서양을 무시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 본때를 보여주려는 목적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황제 함풍제의 죽음
황제의 자존심이었던 원명원이 파괴된 이후 영국군의 의도대로 커다란 충격을 받은 함풍제는 피난지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베이징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불과 30세의 나이로 열하에서 붕어합니다. 그후 함풍제의 후궁 서태후의 아들이 황위를 이어받는데 그가 바로 동치제(同治帝 / 재위 1861~1875)입니다. 그는 함풍제의 독자로서 어머니 서태후의 힘으로 5세의 어린 나이에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정실황후세력과의 권력다툼, 서태후의 섭정으로 인해 실제 정치에 관여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다가 18세 때 천연두로 사망하는 운명을 맞습니다.
이후 서태후의 섭정으로 인한 청의 몰락과 쑨원- 신해혁명- 위안스카이- 청일전쟁 패배- 장졔스의 중화민국 수립- 1,2차 국공합작- 마오쩌뚱의 대장정- 중화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중국의 역사는 격랑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청나라 군대의 방어선을 뚫고 황제가 있는 베이징으로 전진하는 프랑스군
하지만 신식 대포와 총 등 가공할 무력을 앞세워 황제와 중국인의 사기와 저항심을 꺾으려 했던 원명원 방화사건은 장기적으로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게 됩니다. 불에 타버린 원명원은 중국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했고, 오히려 역사적 교훈으로 작용하면서 중국인들이 서양의 침략에 대항하는 정신력을 크게 자극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원명원 약탈은 1860년에 대부분 이루어졌지만, 사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1861년 이후 어려운 나라 사정에도 불구하고 일부 복원이 이루어 졌던 원명원은 1900년 의화단 사건* 을 계기로 손 쓸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습니다.
청나라 황실이 완전히 몰락하자 원명원 안에 남아있던 건축자재들과 조각품들, 아름다운 나무들까지도 이리저리 해체되어 유력 정치가의 별장으로 팔려가거나, 학교의 기숙사의 자재로, 때로는 땔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976년 야만적인 문화대혁명이 끝난 이후 1980년 8월 중국 정부가 원명원을 국가의 문화재로 선포하고 보호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원명원 약탈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원명원 복구에 대한 논란
최근 중국은 원명원을 복원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일부는 조금씩 복원되어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원명원 관리처는 2020년까지 파괴된 건축물의 10%를 복원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중국 내에서는 원명원을 복원하지 말고 그대로 두자고 하는 의견도 많은데, 원명원을 복원해 봤자 그건 원래의 원명원이 될 수 없을 뿐더러 복원 과정에서 또 다른 훼손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죠.

원명원의 옛 모습 그림
또 어떤 사람들은 아픈 역사가 반영된 곳을 굳이 원상태로 돌려놓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서양의 침탈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유적을 그대로 두어 역사적 증거와 교훈으로 삼자는 주장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광화문 앞에 있었던 일제 강점기 시대의 총독부 건물을 해체할 때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일본 사람들이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정기를 막기 위해 경복궁 앞을 가로 막는 형태로 지었다는 총독부 건물은 당시 국립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었는데, 얼마나 견고하게 지었는지 해체하는 것도 비용이 많이 드는 아주 큰일이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건물을 그대로 두어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했었죠.


역사를 그대로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광화문 광장의 모습을 보면 해체하는 것이 더 옳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광화문을 복원했던 한국인들처럼 ‘중국 정원의 결정체'인 원명원이 완벽하게 복구된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정부가 마음먹기에 따라 세계인들은 멀지 않은 미래에 철저한 고증을 통해 복원된 원명원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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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로호 사건
제1차 아편 전쟁의 결과로 개방된 청나라와 무역이 여의치 않자, 개방을 확대시키기 위해 1856년에 영국이 벌인 사건이다. 1856년 10월, 광저우 앞 주강(珠江)에 정박하고 있던 중국인 소유의 영국 해적선 애로(Arrow)호에 청나라 관리가 올라가, 청나라 관원에 의하여 승무원 전원이 체포되고 영국 국기가 바다에 던져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애로호는 중국인 소유였으며, 해적선으로 영국 국기를 달았고, 중국인 선원 13명과 영국인 선장 한 명이 있었다. 그러나 체포 당시 선장은 배 안에 없었고 중국인 선원 13명만 체포되었다. 바다의 안전을 위협하는 해적선을 단속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국기를 모욕한 혐의로 배상금과 사과문을 내라고 하였으나 당시의 양광총독(兩廣總督) 엽명침(葉名琛)은 사건 당시 배에 영국 국기가 걸려 있지도 않았고 중국인 소유의 배이므로 영국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할 이유가 없다고 일축했다.
이를 빌미로 영국과 프랑스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1857년 12월 광저우를 점령하고 양광 총독을 포로로 잡는다. 그리고 본격적인 제2차 아편 전쟁을 벌여 1858년에 톈진조약을 맺고 1859년 베이징 조약을 맺으면서 청나라의 입지는 크게 약화된다.
*의화단 사건
1840년대부터 서구 열강과 일본은 중국이 가지고 있던 이권을 빼앗고 불공정한 조약을 강요했다. 일부 외국인들은 중국인들을 학대해도 외교적 면책 특권 덕분에 기소도 되지 않았다. 본국 정부의 종교 관료나 다름없는 선교사들도 있었는데 어떤 선교사들은 중국이 지켜 온 종교와 문화를 대놓고 비웃었다. 서방의 실책과 좋지 않은 영향력이 늘어나면서 중국인들은 분노했고 외국인들을 악마로 보기 시작했다.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은 중국의 비밀결사조직 의화단이었다.
외국인에 대한 증오를 고조시키기 위해 의화단은 선교사들이 횡포를 일삼는다는 헛소문이 적힌 전단을 뿌렸다. 또한, 이들은 1890년대 중국 북부를 강타한 자연재해로 난민이 수천 명 생기자 이들을 의화단 원으로 받았는데 1899년에 긴장이 극에 달했고, 마침내 폭력 사태가 일어났는데 폭력사태가 악화하면서 몇몇 중국인 기독교인들도 살해당했다.
그해 6월 서양 선교사들이 피살당하고 선교 건물들이 불타면서 사태는 급격히 악화됐고 연합군이 진압을 위해 중국에 당도했지만 이들이 일부 중국 기지를 점령하자 당시 실권자였던 서태후는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외국인들을 죽여서 기독교를 말살하라고 명령하자 피의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교회와 학교, 병원, 보육원이 파괴되거나 5만이 넘는 중국 그리스도인들과 미처 피하지 못한 서양 선교사들이 살해되었다. 사람들은 참수당한 기독교인들의 머리를 지배자들에게 선물로 바치거나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걸어 두었다. 베이징에 있는 각국 대사관으로 피한 서양인들은 대사관에 숨어 지냈으며 결국, 8월 14일, 연합군이 도착하면서 사태는 평정을 회복했다. 의화단 사건은 근대 선교운동에 치명적인 상처를 안겼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양에서는 순교를 불사하고 중국선교를 자청하는 선교사들이 크게 증가하기도 했다.
출처 : 중국 원림의 결정체, 원명원 이야기 (다락원 출판사)
첫댓글 2회에 걸친 원명원 이야기를 읽으며 개인이나 국가나 힘를 잃으면 비참해 진다는 것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강회도 외규장각의 산더미같은 문화재도 병인양요 때 불타고 약탈되고 .....
어떤 갑부가 300억원을 들여 원명원을 재현했답니다. 절강성. 김화시 안에 횡점시란 곳에
이름은 신자 하나를 더 넣어 원명신원. - 전통 중국과 바로크픙의 서양 건축 양식이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영국이나 프랑스, 포르투갈과 스페인 이 네 놈들이 특히 악질이었죠.
역사상 식민지를 개척한 나라치고 못 사는 나라 없고 식민지배를 받은 나라치고 잘 사는 나라 없습니다.
아프리카의 끝없는 부족전쟁은 물론 이스라엘 건국으로 시작된 중동전도 식민지 정책의 산물인 것처럼...
우리나라 고속철 건설 때 미테랑까지 한국으로 달려와 외규장각 영구임대로 반환할테니
자기들 떼제베와 계약하자고 미끼를 사정없이 던지지 않았습니까?ㅎ 진짜 야비한 놈들입니다.ㅋㅋ
선생님께서 엉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대로 옮겨도 고단할 것인디 독자를 배려해 재미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재주가 신묘하기까지 합니다
단숨에 읽어내려가며 연신 고개를 끄덕입니다 수고하셨시유
아재요! 고대로 옮겨 놓으면 금방 탄로나니까 신묘하다는 말 듣도록 고치느라 올매나 개고생한줄 아십니까?
차라리 첨부터 새로 쓰는 게 나을뻔 했습니다. 아우. 이거 사람이 할 짓이 아녀..ㅋㅋ
아재는 읽으면서 배우십니까? 저는 쓰면서 배운답니다. 앞으로도 우리 함께 배웁시다.ㅋㅋ
동양의 베르사이유라고 불릴정도로 아름답고 수려한 황실정원이 아편전쟁이후 프랑스연합군에 의해 파괴되고
이제 어쩌면 과보로 노틀담 사원이 화마에 휩쓸렸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문화유산의 가치와 중국인들이 바라보는 원명원을 잃은 비통함을 이 시점에서 곰곰 생각해보는군요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과거 아편전쟁이나 청일전쟁 등의 굴곡진 역사를 뼈아프게 경험했던 중국은 일찌기
무력이 국력임을 깨닫고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군비확장에 올인을 하고 있죠.
우리나라는 매년 북한 국방비의 30배를 지출하면서도 미국으로부터 전시 작전권을 회수하면
그날로 나라 망한다며 정부를 빨갱이라 공격하고 있으니 둘 중 어느 나라가 잘 되겠습니까?ㅎ
모금운동을 하는 프랑스 낯짝도 참 뻔뻔스럽긴 하죠. 재건비용이 수십 조가 모여도 세금 감면을 받으니
결국은 세금으로 재건하는 셈이 되는군요.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읽으면서 약소국의 분한 감정이 드는군요
약소국 일쑤록 뭉쳐야 되는디
목구멍 채우려 쌈박질 하니 오호통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