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장 26-27절 더 좋은 삶
제주도 환상숲이라는 곶자왈에 가면 천리향이라는 꽃이 있습니다. 이 꽃은 꽃의 향기가 너무 진해 천리까지 간다고 해서 천리향이라 지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리향은 어두운 동굴속에서도 잘 자라고 열매를 맺는데요. 이 천리향이란 꽃은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꽃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꽃이 그룹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놈들이 각각 다 수정을 해야하는데 어떤 놈이 했는지 않했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더군다나 벌을 유혹하기 위해 냄새가 진하면 가까이에 오면 진동하는 냄새 때문에 분간을 할 수가 없을 거 잖아요. 그래서 이놈들만이 살아남는 독특한 방식이 있더라구요. 이 여럿이 있어도 향이 진한 놈이 있을 거 아녀요. 그래서 벌들이 오면 가장 향이 진한 놈에게 먼저 가서 수정을 시킨데요. 자 그런 다음 수정이 되면 그 다음에는 그 수정된 놈은 냄새를 내 뿜지 않는데요. 냄새를 내뿜지 않으니 그중에서 또 가장 향이 진한 놈이 있을 거 아네여. 그런 식으로 모든 꽃이 다 수정이 될 때까지 다른 꽃들이 배려하고 참아준데요. 그렇게 다 하고 나면 맨 나중에 모든 꽃들이 마지막까지 수정된 놈을 기다려다가 한번 진하게 향기를 내뿜고는 열매를 맺는다는 거예요. 이건 해설사의 이야기인데 신빙성은 없어요. 그래서 각각 수정되는데도 천리향은 수정되지 않는 꽃들이 없데요. 배려와 기다림, 그리고 때로는 자기를 숨기고 타자를 드러내 주고 그렇게 함께 사는 지혜로운 꽃입니다.
얼마 전에 남선교회 회식 모임을 했지요. 거의 식사 끝에 새신자이신 채규형님이 오셨어요. 그러니까 남선교회 분들이 궁금하셔서 이런 저런 질문들을 막하셔요.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시더니 남선교회 회장님이신 오광식 집사님께서 우리 돌아가면서 서로 소개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각자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동녘에 오게 되었는지를 말하게 되었는데 참 훈훈했어요. 항상 새신자가 오시면 기존에 계신 멤버들은 궁금해서 질문을 많이 하는데 정작 새신자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느낌이 들겠더라구요. 그래도 새신자 한분을 위해서 그렇게 자상하게 서로를 소개해 주는 모습이 작은 감동이었습니다. 작지만 이렇게 배려하고 챙겨주고 관계해 나가는 것이 잔잔한 신앙생활(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힘은 정복하고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끊임없이 품고 넓게 사랑하고 함부로 짓밟지 않는 그런 힘)의 힘이 아닌가 했습니다.
지난 주로 어린이평화시민교육을 잘 마쳤습니다. 평화센터봄에서 진행하는 첫 번째 어린이 시민교육-역사 파트였는데 나다 공동체에서 와주셔서 너무 잘해주셨어요. 우리 김지영 집사님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박수한번 쳐 드립시다. 여러분 나다에서 하는 역사교육이 처음으로 역사를 접하는 아이들에게 신선한 시각을 줍니다. 저도 피터히스토리아라는 책을 읽어봤는데 거의 어린이 버전 거꾸로 읽은 세계사에요. 우리는 강자, 지배자, 승리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록하는데 약자, 노예, 인디언, 민중들의 입장에서 보는 시각이 참으로 건강해요. 1%를 위한 역사가 아니라 99%를 위한 역사예요. 김지영 집사님이 지민이 이 역사 교육을 시키고 싶어하셨어요. 그런데 그 욕구를 어떻게 풀어내는지 보신 겁니다. 영등포에 있는 나다 공동체에 지민이 10주 보내면 돼요. 그러면 내 자식만 잘 가르칠 수도 있어요. 그런데 파이를 키워요. 선생님을 모시고 와서 이 지역의 아이들에게도 혜택을 주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8명의 아이들이 와서 아이들도 부모님도 너무 좋아하셨어요. 마무리로 <평화를 품은 집>에서 마무리 하기로 했어요. 다음에는 시즌 2를 진행할 예정이구요. 고정 프로그램으로 정착시켜려고 해요. 기왕하는 거 판을 키워 지역 아이들까지 돌보는 거예요. 한걸음 더 나아가는 작은 배려와 섬김과 섬세함이 삶을 너무도 훈훈하게 합니다.
오늘 성서 본문에 보면 바나바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나바는 초대교회의 사도입니다. 바울이 회심하고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전까지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을 핍박하고 욕하고 저주하고 돌아다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개가천선해서 교회 안으로 들어왔어요. 분위기가 어땠을까요? 동네 방네 다니면서 동녘교회 욕하고 돌아다니고 음모하고 음해하고 돌아다니던 사람이 어느날 우리 교회 오더니 자기도 교인이 되고 싶다고 그러면 사람들이 풀리 신뢰의 눈으로 대하기 어렵겠지요. 저놈이 여기와서 무슨 꿍꿍이를 벌일려고 그러나 하면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겠죠. 누구 하나 쉽게 가서 말을 붙이기도 쉽지 않았겠지요. 그도 그럴 것이 홍목사님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이 저희 나이 많은 예비역 동기거든요. 저는 지금도 그분의 말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얼마나 부드럽고 상냥하게 사람을 녹이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홍목사님에 대해 음해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제공했어요. 사람이 쉽게 안 변하거든요. 저도 못믿어요. 더구나 바울은 초대교회의 핵심 멤버였던 스데반이 순교하는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 소문이 온 크리스챤 공동체 안에 자자했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회심 후 고향으로 돌아가 있던 바울을 찾아갑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었겠지요. 그의 고민도 들었겠지요. 그가 변한 이야기들도 들었겠지요. 그의 속예기도 들었겠지요. 그리고는 바울을 데리고 와서는 초대교회 공동체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다니며 소개하고 말 섞어주고 관계를 도와줍니다. 바나바가 없었으면 바울이 혼자서 초대교회 공동체 안으로 흡수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라는 사람이 물과 기름과 같던 관계를 순환시켜주고 연결시켜주고 그런 과정을 통해 공동체 안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한 사람의 작은 배려와 세심한 터치가 기독교의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처음 미국에 가서 비행기에서 딱 내리는데 간판도 도로표지판도 모두 영어로 되어 있고 동서남북 방향도 모르겠고 길도 모르겠고 모든 게 낯설고 모든 게 생소했습니다. 한국이라면 어떻게든 물어서 해결도 하고 그러겠지만 손 하나 까닥할 수 있는 게 없더라구요. 그때 비행기에서 내리던 날 따뜻한 저녁식사를 챙겨주셨던 목사님과 사모님(물론 학생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렇게 시간을 내서 챙겨주는 일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이 생각납니다. 한국 시장에 데려가 주시고 운전면허증과 사를 사는 거까지 아무런 말없이 도와주셨습니다. 거기까지만 해줘도 저는 날개를 다는 겪인데 그 전까지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지나고 보니 학생 입장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더라구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 유학생들이 오면 최소 운전면허증따고 차사는 것까지는 무조건 도와줍니다. 제 아무리 어떤 성격의 사람이 와도 해줍니다. 왜 나만해야지 싶은 순간도 있어요. 그렇지만 돌고 돌다 오죽하면 저에게까지 왔겠습니까 하는 심정으로 합니다. 한국으로 돌아올때까지 버클리에 살던 사람들 중에는 저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힘들 때 초심을 생각했어요. 처음 받았던 사랑을 생각했어요. 그 사랑은 저로하여금 또다른 사랑을 살게하는 힘이었어요.
얼마 전에 나온 강남순 교수의 책 <메니큐어하는 남자>에서 저자는 페미니즘을 옳음의 문제가 아닌 더 좋은 삶을 향해 나가는 과정으로 보자고 제안합니다. 공감이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옳고 그름으로 가다보면 이런 삶은 옳고 저런 삶은 그르고 여자는 옳고 남자는 잘못되고 동성애자는 옳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르고. 그런 이분법에 빠지다 보면 운동자체가 사람을 살리는 운동이 되지 못하고 사람을 쳐내고 죽이는 운동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운동에 휴머니즘이 빠지면 생명에 대한 존중이 빠지면 길을 잃게 됩니다. 옳고 그름을 넘어서 좀 더 나은 관계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삶을 향해 나가가는 과정으로써 좀더 치열한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공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이든 그 선택당시는 나름 최선입니다. 그 노력들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놓고도 더 나은 삶이 있다면 그런 삶을 향해 열려있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좀 더 큰 사랑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라 고백했습니다. 일상의 작은 배려와 사랑과 챙김은 우리가 이땅에서 느끼는 하느님의 터치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터치들은 때때로 너무 힘들고 어려운 세상살이에서 그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작은 힘과 용기의 원천입니다. 한주간도 하느님의 터치가 우리가운데 풍성해지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