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의 우리말 바로 쓰기] 20. 한자어 사용 오류: 의미, 중복 (2)
앞에서 한자의 유용성에 관해 얘기했는데 한 가지 빠뜨린 게 있다. ‘한자문화권’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지난날 중국, 조선,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에서 한자가 어느 정도 공통어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과거 유럽에서 라틴어가 공통어 노릇을 했듯. 그래서 중국어나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몰라도 한자를 쓰면 어느 정도 소통할 수 있다. 이른바 ‘필담(筆談)’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전화기의 번역.통역 프로그램을 이용해 더 쉽게 소통할 수 있겠지만.
1980년 대학 2학년 때 20명 정도 단체로 일본을 여행할 때였다. 도쿄의 유스호스텔에 머무는데 바둑을 두고 싶었다. 호스텔 사무실로 찾아가 영어로 ‘go-game’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알아듣지 못했다. ‘white stone, black stone’을 들먹거려도 소용없었다. ‘사카다’나 ‘가토’ 등 당시 일본의 유명한 기사들 이름을 대도 마찬가지였고. 머리를 굴리다 종이에 ‘바둑 기(碁)’ 자를 썼더니 ‘오!’ 하며 즉각 꺼내다 주었다. 귀국을 앞두고 기념품을 사러 백화점에 갔다. 미술 공부하는 친구가 붓을 사고 싶다며 나에게 부탁했다. 먼저 영어로 ‘painting brush’, ‘drawing pencil’ 등을 말해봤지만 거기서도 영어가 통하지 않았다. 종이에 ‘畫筆(화필)’이란 한자를 썼더니 바로 찾아주었다.
지난 글에서 뜻이 겹치는 한자어 10개를 소개했는데, 역시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있는 표준어 몇 개 더 덧붙인다.
‘야밤(夜밤)’은 깊은 밤이란 뜻이다. 한자 ‘야(夜)’가 밤이란 뜻이니 밤을 두 번 써서 깊은 밤을 가리키는 걸까. 한자로 ‘심야(深夜)’가 글자 그대로 깊은 밤이다.
‘가사일’과 ‘농사일’ 둘 다 그대로 사전에 올라있는데, ‘가사’와 ‘농사’로 족하다. 한자 ‘사(事)’ 자는 일을 뜻한다. 여기에 우리말 일을 덧붙이는 건 필요 없지 않은가.
‘청첩장’의 ‘첩(牒)’ 자와 ‘장(狀)’ 자도 겹친다. 둘 다 편지나 글을 적은 종이를 가리키기에 ‘청첩’만으로도 되지 않을까. 참고로, 죽음을 알리는 ‘부고장’에서 ‘알릴 고(告)’ 자와 ‘편지 장(狀)’ 자는 뜻이 겹치지 않지만, ‘부고(訃告)’라는 말이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글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몸보신’이란 보약 따위로 몸의 영양을 보충하는 것인데, ‘몸 신(身)’자가 들어있는 단어 앞에 ‘몸’을 덧붙이는 것도 불필요하다. 그냥 보신이라 하면 될 텐데. 그래도 당당한 표준어라니 불만스럽다.
‘유기그릇’에서 그릇도 필요 없다. ‘기(器)’ 자가 그릇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유기’나 ‘놋그릇’이라 하면 좋지 않을까.
‘과수나무’에서도 나무가 불필요하다. ‘수(樹)’ 자는 나무를 뜻한다. 앞에서 소개한 ‘고목’의 ‘목(木)’ 자가 나무를 가리키기에 ‘고목’으로 충분하듯 ‘과수’로도 충분하다. ‘과실 나무’는 좋다. ‘실(實)’ 자는 열매를 뜻하지, 나무를 가리키진 않기 때문이다.
과일 가운데 ‘천도복숭아’도 마찬가지다. 복숭아는 꽃도 예쁘고 열매도 참 맛있는데 벌레가 많이 끼어 내가 살충제 없이 키우기 어렵다. 무농약 대신 저농약으로 관리한다. 천도복숭아는 열매 겉에 털이 없고 맛이 좀 덜하지만, 벌레가 적게 끼어 키우기 쉽다. 이름이 맘에 들지 않는다. 천도의 ‘도(桃)’ 자가 ‘무릉도원(武陵桃源)’의 ‘도(桃)’ 자처럼 복숭아를 가리키기 때문에 복숭아가 겹친다.
내가 좋아하는 ‘홍시감’도 비슷하다. ‘홍시(紅柹)’가 빨갛게 잘 익은 감을 뜻한다. 감을 가리키는 한자 ‘시(柹)’ 자에 우리말 ‘감’을 왜 덧붙일까.
이제 뜻이 겹치는 단어 가운데 다행히(?)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있지 않는 말을 소개한다.
나이 좀 든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 ‘동해 바다’라는 말을 써봤을 것이다. 1970년대 유행했던 송창식의 노래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를 부르느라. ‘동해(東海)’는 동쪽에 있는 바다를 뜻하는데, ‘바다 해(海)’자 뒤에 ‘바다’를 덧붙였다. 고래를 잡으러 가든, 일출을 보러 가든, 해수욕하러 가든 ‘동해’ 또는 ‘동쪽 바다’로 가자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노래가사’라는 말에서 ‘노래’와 ‘가(歌)’ 자가 겹친다. ‘가사’가 노랫말이다. 우리말로 ‘노랫말’이라 하든지 한자로 ‘가사’라고 하면 되지 ‘노래 가사’는 중복이라는 뜻이다. ‘가삿말’이란 단어도 가끔 듣는데 ‘사(詞)’ 자가 말을 가리키기 때문에 이 역시 중복이다. 나중에 명사와 동사가 겹친 말을 다룰 때 얘기할 텐데 ‘노래를 선곡하다’는 말도 잘못이다. ‘선곡(選曲)’이란 말이 노래(곡)를 고른다는 뜻이니 ‘노래를 고르다’라고 하든지 ‘선곡하다’라고만 쓰든지 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산채 나물’에서 나물도 겹친다. ‘채(菜)’ 자가 나물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산채’나 ‘산나물’이라고 하면 더 좋다.
지금이 유월인데 ‘6월달’로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월(月)’을 달을 뜻하는데 굳이 ‘달’을 덧붙일 필요 있을까. ‘6일날’, ‘토요일날’, ‘주일날’, ‘생일날’ 등에서 ‘날’이란 말도 쓸데없긴 마찬가지다.
‘학교 교장’, ‘유치원 원장’, ‘학원 원장’, ‘병원 원장’, ‘회사 사장’ 등은 어떠한가? 모두에게 자연스러울지라도 난 불편하다. ‘교’, ‘원’, ‘사’가 겹치기 때문이다. 학교장, 유치원장, 학원장, 병원장, 사장이면 족하지 않은가. 나중에 명사와 동사가 겹친 말도 다룰 텐데 ‘학교에 입학하다’, ‘학교에 등교하다’, ‘병원에 입원하다’, ‘회사에 입사하다’ 등의 말도 난 불편하다. 말이 중복되기 때문이다. 내가 쓸데없이 깐깐하게 따지는 걸까.
편집: 김미경 편집장, 김동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