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의 우리말 바로 쓰기] 23. 한자어 사용 오류: 의미 중복 (5)
한자어의 뜻이 겹치는 사례 가운데 앞에서는 “아주 흔하게 쓰거나 몹시 자주 듣는” 표현을 소개했는데, 이번엔 언론에서 많이 쓰는 중복 표현 몇 가지 소개한다.
봄이 되면 꽃소식을 듣게 된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광양 매화축제나 진해 벚꽃축제(군항제) 등을 소개하며 매화나 벚꽃이 언제 ‘개화’하거나 ‘만개’하는지 알려준다. 난 꽃이 ‘개화’한다는 말에 기분이 언짢아진다. ‘개화(開花)’는 ‘꽃(花)이 피는/열리는(開) 것’인데, 꽃 뒤에 ‘꽃이 핀다’고 덧붙이는 것은 쓸데없는 중복이다. 우리말로 ‘매화나 벚꽃이 핀다’고 하면 쉽고 올바른데, ‘매화나 벚꽃이 개화한다’고 하면 한자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유식한 체하며 잘못 쓰는 것 아닌가. ‘만개(滿開)’는 ‘활짝/모두(滿) 피는/열리는(開) 것’이라 무슨 꽃이 피는 것인지 알리기 위해 ‘매화가 만개한다’거나 ‘벚꽃이 만개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다.
난 꽃을 몹시 좋아해 <고향의 봄>에 나오는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꽃뿐만 아니라 개나리꽃, 벚꽃, 매화, 목련꽃 등 거의 모든 꽃을 집에서 감상할 수 있게 해놨다. 대개 이런 봄꽃은 피는 기간이 길지 않다. 그야말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동안 붉게 피는 꽃은 없다’. 언제부턴가 집에 있는 철쭉이나 개나리가 11월에 꽃을 피우기도 하는데, 남들은 기후변화 탓이라 하지만, 난 내 집 꽃도 철없는 집주인을 닮아 철없이 핀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런 꽃들은 ‘피는 기간’이 짧은데, 유식한 체하며 한자어를 섞어 말하는 사람들은 ‘벚꽃/매화의 개화기간이 짧다’고 표현하기 마련이다. 뜻이 겹치는 거추장스러운 표현이다.
참고로, 앞에서 “뭐니뭐니 해도 가장 많이 겹쳐 쓰는 한자어는 ‘들어가다’는 뜻의 ‘입(入)’ 자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열린다’는 뜻의 ‘개(開)’ 자도 많이 쓰인다. ‘회의를 시작한다/끝낸다/마친다’고 하면 쉽고 좋은데, 굳이 한자로 ‘회의를 개회한다/폐회한다’며 뜻이 겹치게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학교를 시작했다/문닫았다’고 하면 쉬운데, 한자로 ‘학교를 개교했다/폐교했다’는 말은 어떤가. ‘병원이나 학원을 열었다’고 하면 바른데, ‘병원이나 학원을 개원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봄엔 꽃소식에 이어 무서운 산불 소식도 언론을 통해 듣기 쉽다. 큰 산불을 끄는 데는 헬기가 동원되는데, 꼭 ‘산불 진화’라는 말을 쓴다. ‘진화(鎭火)’는 ‘불(火)을 끄는(鎭) 것’이다. ‘소화(消火)’와 뜻이 같다. 우리말로 쉽게 ‘산불을 껐다’고 하면 되는데 굳이 한자어를 잘못 사용하는 것 아닌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진화’라는 말을 찾으면 ‘산불 진화’를 표준 사례로 들고 있으니 이 글을 쓰며 난감해지게 된다.
여름엔 물놀이 사고 소식을 접하기 쉽다. 익사 사고다. ‘익사(溺死)’라는 말은 ‘물에 빠져(溺) 죽는(死) 것’을 뜻한다. 난 수영을 잘하진 못해도 바다에서든 강에서든 계곡에서든 물속에 뛰어드는 걸 좋아하기에 당연히 빠져 죽지 않도록 조심한다. 그런데 ‘강물이나 계곡물에 익사했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까. ‘물’과 ‘익’이 겹치기 때문이다. ‘빠져 죽었다’는 표현은 상스럽거나 직설적이고, ‘익사했다’고 하면 고상하거나 유식한 표현 같아서 그럴까.
여름엔 장마 소식도 빼놓을 수 없다. 난 과실수, 정원수, 꽃나무 등을 많이 가꾸고 있어서 언제든 비를 반긴다. 나무에 뿌려줄 수돗물을 아낄 수 있고, 농번기에도 비를 핑계로 푹 쉴 수 있기 때문이다. 마당 몇 군데가 빗물에 잠기는 게 탈이지만. 이처럼 장마나 폭우와 관련해 도시에선 집이 침수되고 농촌에선 밭이나 온실이 침수됐다는 보도가 잇따른다. ‘침수(浸水)’란 ‘물(水)에 젖거나 잠기는(浸) 것’인데, 대개 ‘빗물에 침수됐다’는 표현을 쓴다. 우리말로 ‘빗물에 잠겼다’고 하면 좋을 걸, 굳이 한자어로 쓰면서 중복 표현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와 비슷하게 ‘수돗물이 누수됐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누수(漏水)’는 ‘물(水)이 새는(漏) 것’을 가리키기에 ‘수돗물 누수’란 뜻이 겹치는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전기가 누전됐다’거나 ‘전기에 감전됐다’는 말도 의미 중복이다. ‘누전(漏電)’은 ‘전기가 전깃줄 밖으로 새는 것’을 뜻하고, ‘감전(感電)’은 ‘전기(電)에 신체 일부가 감응하는(感)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수돗물이 샌다’거나 ‘전기가 샌다’면서 쉽고 올바르게 표현하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 월드컵 축구대회가 한창이다. 앞에서 썼듯 내가 즐기는 탁구나 테니스 경기의 중계방송은 보지 않더라도 나중에 10-20분짜리 유투브를 찾아본다. 수많은 사람이 열광하는 축구 경기는 중계방송으로든 축약 유투브로든 전혀 보지 않지만, 뉴스를 통해 어떻게 진행되는지 대충 알고 있다. 그런데 뉴스를 들으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표현을 접하기 쉽다. ‘선제골을 먼저 뽑아냈다’거나 ‘선취점을 먼저 올렸다’는 등의 말이다. ‘선제골(先制goal)’은 ‘먼저(先) 넣은/제압한(制) 골(goal)’이고, ‘선취점(先取點)’은 ‘먼저(先) 딴/얻은(取) 점수(點)’다. ‘선제골’이나 ‘선취점’엔 ‘먼저’라는 말이 들어있기에 ‘먼저 뽑았다’거나 ‘먼저 올렸다’는 건 거추장스러운 중복 표현일 뿐이다.
내가 뉴스 빼곤 TV를 거의 보지 않지만, 가끔 노래 경연 프로그램을 즐긴다. 남자가수가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윗옷을 벗을 때가 있는데 사회자는 꼭 ‘상의를 탈의했다’고 표현한다. ‘상의(上衣)’는 ‘위(上)에 입는 옷(衣)’이고, ‘탈의(脫衣)’는 ‘옷(衣)을 벗는(脫)’ 것이다. 모두 순수한 우리말로 ‘윗옷을 벗었다’고 하면 가장 좋고, 한자어를 써서 ‘상의를 벗었다’고 해도 좋지만, ‘상의를 탈의했다’고 말하면 유식한 체하며 한자를 잘못 쓰는 것이다.
무슨 선거가 끝나면 당선과 낙선의 희비가 엇갈릴 수밖에 없다. ‘당선(當選)’은 ‘선거에서(選) 뽑히는(當) 것’이고 ‘낙선(落選)’은 ‘선거에서(選) 떨어지는(落) 것’이기에, 둘 다 ‘선거’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무슨 선거에서 당선됐다거나 낙선됐다고 말하는 데 당선이나 낙선 앞엔 선거라는 말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대선 선거운동’이란 표현도 의미가 중복된다.
선거 이후 정당에선 ‘젊은 피를 수혈하겠다’는 말이 종종 나온다. 역시 못마땅하다. ‘수혈(輸血)’은 ‘피(血)를 들여오는/수입하는(輸) 것’이다. 수혈이란 말에 이미 피가 들어있다. ‘젊은 피를 받아들이겠다’거나 ‘젊은이를 받아들이겠다/영입하겠다’고 하면 되지 굳이 ‘피를 수혈한다’고 뜻이 겹치게 말할까.
작년에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의 전시작전권(전작권) 환수 문제가 사회적 쟁점이 됐다. 이와 함께 ‘주한미군 주둔’이나 ‘주한미군 감군/철군’이란 말을 많이 듣는다. 잘못된 말이다. ‘주한미군(駐韓美軍)’은 ‘한국(韓)에 머무는/주둔하는(駐) 미국군대(美軍)’를 가리킨다. 주한미군의 ‘주(駐)’자가 ‘주둔한다’는 뜻인데 그 말 뒤에 또 ‘주둔’이란 말을 쓰는 게 적절한가. ‘감군(減軍)’은 ‘군대(軍)를 줄인다/감축한다(減)’는 뜻이고, ‘철군(撤軍)’은 ‘군대(軍)를 거둔다/철수한다(撤)’는 뜻이다. 앞에 미국군대가 나오는데 뒤에 다시 군대를 덧붙이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군대/병력을 파병한다’는 말은 어떠한가? ‘한국전쟁 휴전/참전/종전’은 어떻고? 이렇듯 한자어 중복 사용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사례가 많지만 이제 끝내고 싶다.
편집: 김미경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