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을 스크루지 영감으로 오해하지 말라
하느님이 주시는 좋은 것들을 누려서는 안 된다고 심술궂은 생각은 하느님의 사랑을 뒤틀린 시각으로 바라보는 소행이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마치 천국 베란다에 서서 누구라도 인생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지 감시하는 스크루지 영감처럼 생각한다. 스크루지는 행복한 사람이 눈에 띄기만 하면 고함을 지른다. “당장 그만두지 못해!” 하느님을 그런 분으로 여기는 것은 신성모독임며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일이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어쩌다가 하느님을 재미없고 흥이나 깨뜨리는 방해꾼으로 보는 시각이 생겨났는지 쉽게 알 수는 없다. 아마도 불순종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즉각 쓰러뜨릴 진노의 하느님이라고 불완전하게 생각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이는 참으로 비뚤어진 논리이며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음과 같이 보는 것이다.
- 사람들은 죄가 즐거워 보여서 죄를 짓는다.
- 죄는 하느님이 싫어하신다.
- 따라서 즐거움은 일절 피해야 한다.
이런 사고방식이 새롭지는 않다. 데렉 티드볼은 이렇게 말한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일부 사람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려는 자는 비참하게 살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티드볼은 티모테오 1서 4-5절에서 바오로는 이 문제를 다루면서 초대교회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던 어리석은 논리를 파악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시각은 이런 식의 접근방법으로 흠집이 날 때가 많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즐거워하는 일로 하느님이 부르실 경우 뭔가 잘못된 신호라고 생각하며, 그런 일이 생기게 하실 리가 없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기적으로 ‘육에 속한 생활’을 하거나 훈련과 희생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유혹을 피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가 본성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상황 쪽으로만 인도하신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우리가 하는 일을 좋아하면 우상이 되기 쉬우며 모두가 알다시피 즐거움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비롯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 삶에서 하느님의 기쁨을 온전히 알려면 직장에서 힘들게 지내야 한다.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무한한 사랑으로 돌보시는지 살펴봄으로써 이런 경향에 대적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서 29장 11절에는 “나는 너희를 위하여 몸소 마련한 계획을 분명히 알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평화를 위한 계획이지 재앙을 위한 계획이 아니므로, 나는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고자 한다”라고 했고, 로마서 8장 32절에는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외에도 여러 구절에서 하느님의 성품이 스크루지와는 정반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은 “안 된다고 말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 금욕주의자가 아니시다”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을 일절 못하게 하시는 심술쟁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성경이 말하는 기본 진리부터 배우기 바란다. 로마서 12장 2절을 인용하면서 티드볼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총체적 계획이 “선하시며 기뻐하시며 온전하시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확신과 감사함으로 그 뜻을 받아들인 티드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죄책감을 느끼지 말고 마음껏 누려라.”
첫댓글 마음껏 누리는 그런 오늘을 만들겠습니다. ^^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