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털 같으면 어떠랴
통장이 장롱서랍에 빼곡하다. 지금은 빈 껍질이지만 슈퍼뱅크통장, 으뜸적금통장 등 이름만 보아도 힘이 솟았던 친구들이다. 세어보니 200여 개나 된다. 모두가 사연을 안고 사열하듯 줄 서 있다. 그 중에 한 녀석을 뽑아 펼친다. 농협 온라인통장, 남편의 급료 통장이다.
모서리가 하얗게 닳은 통장을 한 장씩 넘긴다. 2002년 2월 17일 맡기신 금액란에 ‘S대 급여’ 2,446,800원이라고 또글또글하게 찍혀 있다. 그 밑으로 찾으신 금액란에는 적금 30회 100,000원을 비롯해서 전기요금, 가스 요금 등 이십여 개 품목이 나붓하게 적혀 있다. 경상적으로 지출한 아이들의 학비와 생계비로 자리에 익숙하다. 시기적으로 보니 큰딸과 둘째가 대학을 다니고 셋째가 고등학교, 막내가 중학교 다니던 눈코 뜰 새 없던 때였다.
통장을 들여다보면 일기 같다. 그때의 애환들이 환등기처럼 넘어간다. 아이들의 등록금, 어려운 형제에게 보내는 지원금 등. 당시의 사연과 희로애락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들 통장은 가족의 심장이었던 것. 맡기신 금액은 동맥이고, 찾으신 금액은 정맥이 아닐까 싶다. 남편의 급료는 시댁과 우리 가정을 핏줄처럼 돌아나가며 비좁은 칸 안에 화안하게 흔적을 새겨 놓았다.
지금은 남편이 정년퇴직을 했고, 죽순 같은 아이들도 왕대가 되어 초록으로 싱싱하다. 딸 넷이 죽순처럼 자랄 때, 우리 가족의 동력 벨트는 이 작은 통장에서 힘을 얻어 숨 가쁘게 돌아갔다. 때로는 통장이 가뭄 든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기도 했다. 빠듯하던 잔액이 그마저 말라 갈증으로 허덕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비상금통장을 헐어내어 갈한 목을 축이곤 했다.
우리 가족의 텃밭에 물과 산소를 공급해 준 통장이 새삼 대견하다. 그래서 폐지 구멍이 숭숭 뚫린 통장들을 여태 버리지 못한다. 흡사 다람쥐가 까먹은 밤 껍질처럼 수북해도 그걸 뿌듯하게 즐긴다. 껍질만 보아도 흐뭇하기에 언제까지나 장롱 서랍에 든든하게 쌓아 두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아이들은 장성했고, 시동생들도 모두 독립해서 잘 살고 있다. 그래서 요즘의 통장은 찾으신 금액란이 많이 단순해졌다. 이순을 넘긴 우리의 삶만큼이나 단조로워진 온라인통장을 들여다본다. 잔액 란의 숫자도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가끔 가다 구원투수 같은 딸들의 이름이 통장에 샛별처럼 반짝인다. 이제는 찾으신 금액란이 아니라, 맡기신 금액란에 찍힌 딸들의 이름…. 용돈으로 보태라는 아이들의 정성이 갸륵하다.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 얇은 통장에 있는 입금과 출금란, 우리 몸속의 동맥과 정맥이 우리의 생명을 이어주듯, 몇 개의 숫자가 우리의 삶을 유지시켜 준다. 세상에서는 이것들의 불균형으로 인해 부모와 자식, 형제간에 많은 불협화음이 일어나기도 한다. 또 사주(社主)들은 욕심만 채우려고 동맥만 불리고, 정맥을 틀어막아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아 갖가지 험악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자고나면 보게되는 친족간 살인과 사기, 폭력 등 우리 사회의 만연한 환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남편은 공직을 퇴직한 지 3년째다. 그는 제 2 취업을 극구 부인하며 집에서 지내고 있다. 이제는 크던 작던 일자리를 젊은이들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산하 단체나 기관에까지 쫓아가서 경력자라는 이름으로, 상급관청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명목으로, 한 자리 차지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단다.
처음에는 남편의 고드름 같은 소신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똑같은 조건의 어떤 이들은 정년퇴직 후에도 산하기관에 들어가 근무하면서 공직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두툼한 통장을 가져온다. ‘남편 한 사람 더 일한다고 대한민국 젊은 실업자들의 취업 길을 모두 막는 것도 아닐 것인데….’
긴 세월의 경력이 아깝지 않으냐고도 해보았다. 그러나 남편은 시종일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참새가 어찌 붕새 마음을 알까. 제 울타리 안만 생각하는 속 좁은 나를 보며 얼마나 가소로워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의 처신이 백 번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특히 최근 해군참모총장이 두 명 씩이나 구속되는 방산업체 비리를 보면서 남편이 존경스럽고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처 산하기관과 각종 이익단체들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싸고 돌아가는 썩어가는 사회. 그 허울 좋은 가면이 빚어내는 엄청난 과오들을 어찌할 것인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떤 달콤한 유혹도 물리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인정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당장은 그런 사람이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박봉을 콩알처럼 쪼갤 때도 대가족이 잘 살아냈는데, 이제는 많이 단조로워진 생활이다. 통장이 깃털 같으면 어떠랴 싶다. 생각도 깃털처럼 가볍게 가지면 유유자적으로 살 수 있으리라. 몸만 건강하다면, 행여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이제는 이순을 넘었는데…. 생에 대한 집착을 덜어내면 마음은 더욱 여유로워지리라.
남편의 빛바랜 월급 통장에서 대가족을 짊어졌던 가장의 절박함이 갈피마다 오롯이 되살아난다. 가벼워진 통장에 몸과 마음을 싣는다. 내려놓는 삶 속에 오히려 충만함이 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첫댓글 안녕하셨십니꺼?
이런데서 보이꺼네 반갑네예. 날씨도 어지가이 덥어야지예.
좋은 글 마이 올렸네예. 김샘은 참말로 부지런 합니더. 그라머 나중에 또 보입시더.
잘 계시이소, 김샘.
인자
경기이남 파이팅!!
깃털처럼 가붓한 통장에 대한 상념,
집에서 책으로 읽었습니다. 정말 공감가는 대목이었습니다. 소재에서 한몫하셨습니다.^^
박수~~~~^^
이태선 선생님, 이복희 선생님, 김경애 선생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의 글에 공감을 표시해 주시고, 애정 어린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착실하게 열심히 살아오신 삶이 평안하신 것 같아 읽는 이도 편안해집니다.
건강만 잘 챙기시면 되겠지요.
비유가 멋진 글, 다시 읽어도 좋습니다.
좋은 수필집을 보내 주셔서 감사드리며,
그속에서 만난 여러 감동을 주는 글중에 하나였습니다.
휼륭하신 부군과 오래도록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빌며
멋진 글 이곳에서 또 다시 만나니 좋았습니다
김미옥 선생님 박관석 선생님 부족한 글을 그리 칭찬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마음에 간직하고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통장 이야기로 이렇게 감동을 줄 수도 있는 것이로구나 라고 생각하게 했던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겪었음직한 일.
그런 평범한 일에서 감동을 끌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혜연 선생님 감사합니다. 2012년 저의 졸작을 봄호에 이어 여름호에 초회. 완료 추천해 주시고 늘 애정어린
마음으로 지켜 봐 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오늘 이렇게 선생님의 칭찬을 들으니 영광입니다. 더 열심히 쓰고 읽겠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건강 유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