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사상의 특징 또는 핵심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으로 즉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학문이다. 유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공자가 체계화한 사상인 유학의 학문을 이르는 말이다.
개요[편집]
유교(儒敎)는 춘추시대 태동한 제자백가의 한 분파이자, 공자가 이전 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정리한 유가를 후대 공자학파의 사상가들이 계승하여 체계화한 중국 사상종교의 한 종류이다. 최초로 중국 전토를 '안정적으로' 지배한 한나라의 지배 이념으로 채택된 덕에 춘추시대부터 경쟁했던 쟁쟁한 사상들을 누르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제자백가 시대의 유가는 한나라 때부터 농가, 도가, 음양가[6] 등 다른 여러 사상을 조금씩 흡수했고, 중세의 성리학은 불교나 도교에서 여러 형이상학적 요소를 차용했다. 이렇게 유교는 계속 보완돼가며 19세기까지 정치, 제도, 철학, 종교 등에 넓게 걸쳐 동아시아 세계 모든 분야의 근간으로 작용했다. 19세기 이후에는 서구 문명의 진입과 자체적인 비판에 부딪치면서 국가 이념으로서의 의미는 퇴색되었지만, 현재도 사회 규범이나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교의 특징 또는 핵심 사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유교가 실현하고자 하는 진리 구현의 방식이 수기치인이다. 수기치인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리는 것으로서 위정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즉, 유교는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며 또한 그것을 향한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불교를 배척하고 고려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유교를 많이 배웠는데, 워낙 조선 시대가 유교로 유명하니 현대에서 한국적인 문화를 모두 유교가 기원인 것처럼 말하지만, 어른에 대한 공경이나 존댓말, 혼전순결 등은 유교에서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유교 풍습이 거의 없던 고려 이전에도 한국 왕조에서는 어른에 대한 공경, 존댓말 등의 풍습이 중요시 되었고 오히려 유교가 더 중요한 위치에 있던 송나라와 명나라에서는 존댓말이 존재하지 않았고 신하로서의 충을 강조했지만 어른을 공경하는 풍습이 존재했다는 기록은 없다. 워낙 조선시대때 유교를 배우는 일이 많아 한국의 토착 풍습도 유교의 풍습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현대에는 많다.[7]
2. 특징[편집]
공자는 사상적 측면에서 동아시아적 휴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인(仁)'을 최초로 제시하였다. 공자가 제시한 인이란, 도덕적, 인본주의적, 인문주의적인 의미의 사람다움, 즉,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었고, 또한 공자가 말하는 '사람다움'이란, 논어의 仁者 愛人('인'은 남을 아끼는 것이다)에 따르면, 우리네 어머니들이 자식을 대할 때 그러하듯이, 배려하고 걱정하는 등, 조건없이 남을 챙기고 아끼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춘추전국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배신 속에서 죽는 것을 본 공자는 '남을 챙기고 아끼자. 그래서 사람답게 살자.'라는 외침을 한 것이었다.
주변을 아끼고 챙기는 사람다움(仁), 이것을 잘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신뢰(信)를 얻게 된다. 주변의 수많은 신뢰를 통해 높혀진 그 사람은 자신이 속한 무리의 장(長)이 된다. 공자는 올바름을 '의'(義)라고 하였고, 공정하고 의로운 자가 높은 위치에 있어야 그 사회가 안정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주변 친한 사람을 챙기는 것도 너무 지나치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상하관계의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있어서 순서가 없으면 미숙한 아랫사람이 그 미숙함으로 윗사람을 우습게 보아 가르침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니, 친하더라도 거리를 지키게 하고 상하관계에서는 순서를 따르게 하였는데, 또 이러한 형식을 '예(禮)'라고 불렀다. 즉, 인(仁)한 사람은 결국 높은 자리로 자연스럽게 나아가 의로움(義)을 펼치게 되는데, 이러한 인과 의의 적절한 순서를 지키는 행위가 바로 예라는 것. 여기서부터 효제자(孝悌慈), 서(恕), 경(敬)의 윤리관, 예치(禮治), 덕치(德治)의 정치관 등이 만들어졌다.
공자는 이러한 개념 아래, 당시 세상이 혼란한 연유를 이러한 인(仁)의 부재와 예악(禮樂)의 상실에서 찾았던 것이며, 예악을 따르는 인군(仁君)을 일으켜 주나라 초기와 같은 성세(聖世)를 회복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게 되었다. 정치는 인을 갖추고 예에 밝은 군자(君子)[8]가 주도해야 한다고 보았고, 이 군자를 양성함에 신분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 교육을 베풀었다. 그가 정립(正立)한 사상, 그리고 그의 사후 후대 학자들이 그 사상을 뼈대로 하고 여러 사상을 곁들여[9] 발전시켜온 일련의 사상계(思想界)를 바로 유학(儒學), 또는 유교(儒敎)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자세히 짚자면, 공자는 주나라 전성기의 이상적인 질서를 숭상하였고[10] 패악질이 난무하는 춘추시대의 사회 질서의 재건을 시도했으며, 이를 위해 '사(士)'로 불리는 계층을 교육하는 데 노력했다. 흔히 이 글자의 뜻은 선비로 알려져 있지만, 사는 주 대의 하층 귀족이었다가 춘추전국시대 들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유력 인사들이 유입되어 형성된 계층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무질서로 인해 이들 중에는 문적 교양이 전혀 갖추어지지 못한 인물들이 많았고, 공자는 이들을 교육해 바로잡으려 한 것. 공자는 단순한 부국강병이나 패도의 결과주의에 안주하지 않고 도덕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덕목들을 규정하여 후에 '유(儒)'로 불리게 된 학문적인 집단을 구축했다. 공자는 춘추시대의 귀족사회에서 능력주의 전국시대로 이행하는 사회의 흐름에 맞추어 사회와 국정 경영을 위해 필요한 덕목과 실력을 교육하여, 학파에 따른 인재 육성과 등용을 처음으로 구체화하였다. 정확히는 능력주의[11]라기보다 동아시아판 원시적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로 백성을 노동자처럼 보고 내심 귀족들보다 중시하였다.[12] 이러한 유가의 학문적인 성과는 유가뿐만 아니라 묵가, 법가 등 여러 유파의 형성이나 사상적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13]
이에 따라 오늘날 세간에서는 보통 공자를 '유교의 창시자' 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적어도 공자는 자신이 무언가의 창시자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긴 했다. 공자는 다만 스스로 옛날부터 이어져 오던 예악(禮樂) 전통을 정리하고 계승했을 따름이며, 자신의 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옛 성왕(聖王), 성현(聖賢)의 행적에 깃든 참뜻을 밝혀낸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유명한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저술한 것이지 창작한 것은 아니다."는 말은 이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의 목표는 요순우탕문무주공의 사상을 잇는 것이었다. 실제로, 흔히 유교 문화로 알려진 것들 중에는 공자 이전부터 있었거나 혹은 나중에 가서야 형성된 관습들이 많다. 또한, 공가(孔家)라고 부르지 않고, 유가(儒家)라고 부르는 것도 후대의 학자들이 이런 점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유교'는 '유학(儒學)', '정학(正學)', '도학(道學)' 등으로 널리 불렸고, '유교'라는 표현은 '유학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추후 20세기가 되어 교(敎)라는 글자가 종교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례가 한정되면서 '유교'라는 표현이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있게 되었지만, 유교는 이러한 발전을 거쳐왔다는 면에선 우리가 흔히 논하는 종교들과는 퍽 다르다는 점은 자명하다.
다만 그렇다고 유교가 종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사실 현대에 와서는 이 유교라는 것을 종교와 깔끔하게 분리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부터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이는 유교 자체의 가르침에는 내세에 관한 일정한 기준점이 있어서 다른 종교와 동시에 행하기는 어려운 탓이다. 특히 그리스도교 계열 종교들이 유교적 제례인 제사 참여를 허용하느냐 안 허용하느냐는 식의 쟁점은 심심하면 등장하는 주된 종교적 떡밥 가운데 하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지금에 와서는 젊은이와 어르신을 가릴 것 없이 현대인은 모두 유교를 '조상님께 제사 드리는 종교'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유교는 종교이고, 종교의 정의적 관점에서도 유교는 종교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유교를 보는 시각은 어떠하였을까.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에겐 종교와 학문을 깔끔하게 분리하여 구분을 지으려는 현대인의 관점이 없었을 것이다. 당장 유교의 경전이나 사상가들에게 대한 선비들의 태도는 종교의 경전이나 성인(聖人)에게 대한 종교인의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단적으로 알고리즘 교과서를 라면 냄비받침대로 쓴다고 격심히 비난할 현대인은 없지만, 논어를 라면 받침대로 쓰는 모습을 조선 시대 선비가 보면 난리가 날 것이다. 요컨대 과거엔 학문을 대하는 자세가 원천적으로 달랐고, 당연히 현대의 구분 기준이 과거의 그들에게 적용될 리 없다. 이는 유교 말고도 많은 고대 학문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특성이다. 수학을 대하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태도나 영혼을 대하는 플라톤의 논의 등 고대 철학의 많은 분야에서 이러한 종교와 유사한 성격을 갖는 행동거지를 찾아볼 수 있다. 어쨌든 결론은 과거에도 또한 유교는 학문이자 도(道)이자 철학이자 숭상, 숭배의 대상이었다는 것. 따라서 유교는 다른 종교들과의 출발점은 분명 다르나, 현대에나 과거에나 종교 그 자체, 내지는 종교 같은 것일 수는 있다 말하겠다. 더 자세한 것은 아래 9번 문단에서 서술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서 유교를 단순히 공자 및 그를 따르는 집단의 개인주관적 철학, 혹은 단순히 과거 역사에 짙게 흘렀던 한 종교였을 뿐이라고 그렇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인이 입을 모아 동의하듯, 유교는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국가제도와 법질서를 모두 포괄하는, 그 자체로 동아시아의 문명, 문화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동아시아의 각국 언어 자체에 큰 영향을 끼친 한자부터가 기본어휘 상당수를 유교 경전인 사서오경에서 비롯하였다.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대부분 국가들, 특히 한국, 베트남, 일본 역시 모두 한자를 사용했고 사용하는 나라다. 그 가운데에서도 한국은 또한 조선의 영향으로 그 어떤 나라보다 유교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아들였다. 한중일 3국은 개화기 이후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기존에 없던 서양의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술 용어들의 대다수를 아예 유교경전에서 따와서 번역하기까지 하였다. 사실상 생활의 모든 것이 유교에서 시작되었고 유교로 이루어졌다. 서방에서 기독교가 끼친 영향이 역사, 문화적으로 지대하듯, 동방에서 유교가 끼친 영향도 그에 지지 않을 만큼 지대하다.
물론 19세기 서양의 침공과 근대의 충격으로 기존의 유교질서가 상당히 붕괴하였고, 20세기 초반에는 유교가 서양에 뒤쳐진 원인으로 지목되어 탈유교 또는 반유교적인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 국가통치 주요 사상에서는 한 번 완전히 몰아냈던 것은 맞으나, 그럼에도 현재 멀쩡히 존재하는 종법적 질서, 연공 중시, 상급자에 대한 순종, 조상 숭배, 가부장제 같은 유교적인 관습과 정서는 동아시아 사회에 계속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실 이렇게까지 유교가 길게 살아남고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유교가 부의 재분배, 평등을 외쳐서 사람들의 환호를 이끌어냈던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맥락이 상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냐면, 예를 들어, 유교의 공은 평분(平分 :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고 사는 간사함이라, 개인 재산이 많은 사람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남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야 한다. 공자는 심지어 "군자는 백성의 살림이 모자라는 것보다 도리어 고르지 않음을 근심하라"고 했다. 덕분에 유교적 성인군자들은 돈을 크게 벌었더라도 다 뿌리고 청빈하게 살았다고. 유교의 가르침들이 다 이러하니 극히 최근까지도 유교는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 다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그 인기가 다 날아가기는 했다. 유교가 구시대의 악습을 모조리 뒤집어 쓴 이미지가 되어 인식이 완전히 나빠졌기 때문. 물론 이는 유교 이념 자체보다는 변질된 유교적 전통이라는 파행적 현상이 더 주목받기 때문이기는 하다. 유교를 어느정도라도 안다면 가르침부터가 다 틀려서 유교는 필요없고 쓸모없고 날려야 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한국에서는 유림이 고려시대 말부터 정치세력화하여 조선왕조 500년을 지배하기도 하였으나, 조선왕조 말부터 크게 쇠락하면서 대원군 실각 이후에 정치세력으로서의 구실을 거의 잃게 되었다. 1919년 파리 장서 사건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영향력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 현재 유교 종단 측에서는 자체집계 통계로 신자가 한국에만 1,000만 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인구주택총조사의 종교통계를 보면 10만 명 정도로 나타난다. 물론 위에서 말했듯 이것이 실제 유교의 위세를 딱 잘라 나타내는 해석이 될 수는 없다. 유교를 서양식의 종교 개념이 아닌 생활 사상이나 정치 철학, 순수 철학 등으로 파악하는 시각이 지배적이기 때문. 즉 애초에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프레임 자체가 굉장히 다르다. 이는 불교와 도교[15]가 서양식의 종교 개념으로 말미암아 빠르게 정의된 것과는 다른, 동양 사상 중에서도 특이한 경우다. 그리고 이러한 복합적인 성격 때문에 '나는 유학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현대인도 여전히 '유학적 삶의 형태'는 많이 따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유학 자체의 본질이나 학문적 성격관 거리가 멀고, 말 그대로 유학에서 파생된 부수적인 관습과 사고가 그대로 문화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