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이 있던 1979년 10월을 떠올릴 때면 나는 늘 빚진 자가 된다. 10월의 푸른 하늘을 볼 때마다 더 그렇다. 끝없이 푸른 하늘처럼 끝이 없을 것 같은 사색 끝에 부마사태라는 단어가 걸리면 절로 고개 숙이고 만다. 1979년의 가을, 저 때 나는 무엇이었고 무엇을 했던가? 결론은 항상 저 시대의 젊은 청년으로 항쟁의 대열에 함께 하지 못한 부끄러움과 미안함이다. 이래서 늘 고개를 떨구고 빚진 부채감에 짓눌리고 만다. 이때 나는 군대를 제대하고 나와 내 식구를 건수 한다고 분가하여 부산의 변두리에 집을 얻어 살았다. 첫 휴가로 얻은 첫아이는 3살, 그해 또 얻은 작은 아이가 막 백일을 지나던 때다. 나는 이렇게 그 시대의 사태를 기억하기보다 내 아이의 나고 자라던 때를 더 생생히 기억하는 사회초년생으로 순 소시민이었다. 내 아이들과 먹고살기 위해 무슨 일이던 해야 했다. 하지만 고졸 출신의 어정쩡한 나에게 그럴만한 직장이 주어지지 않아 지역신문의 구인난을 다 훑고 다녔다. 이런 끝에 겨우 어느 월간지 수금 사원으로 입사했고 하루 300원의 여비를 받아 이것을 아껴 퇴근길에 아이에게 라면땅이라도 사다주기 위해 차를 타지 않고 다녔다. 이렇게 다니던 하루 보수동 책방 골목을 지나 가톨릭 회관을 지날려는데 군중의 함성이 들렸고 그 계단에 사람들이 쫙 앉아 시위를 하고 있었다. 길도 막혔고 가을의 햇살이지만 여름처럼 따갑게 내리쬐던 오후의 햇볕만큼 뜨거운 군중의 열기에 끌려 다가섰고 그 끝 줄에 앉았다. “독재타도!” “유신철패!”를 따라 하며 “삼선개헌 반대”를 외치며 수업을 거부하고 교문을 박차고 나가던 3.15의 본령이던 그 교정과 고교 때를 생각했었다. 그리고 자신과 세태가 모두 불안하고 불안정한 것에 울분했다. 한편으론 이 시위 자체도 가증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몇 번 따라 하다가 일어서 나왔다. 언제적 시위며 여직도 저러고 있을까 하는 생각과 나는 먹고살기도 힘겨운데 젊은것들이 앉아서 소리만 내지른다고 생각 들었기 때문이다. ‘하면 제대로 뒤집어엎든지….’ 이것으로 나의 시대적 현장은 다였고 며칠 지나지 않아 지역 계엄령이 내려지고 세상이 깜깜해졌다. 살기가 더 힘들어졌고 모든 생활이 부자연스러웠다. 이후 나는 시민운동 단체의 실무자가 되었고 저 시위의 현장에선 동떨어진 괄호 밖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4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돌이켜 저 때 군중의 함성, 뭉쳐진 결기와 희생이 얼마나 큰 정의이고 역사의 흐름이었는지를 더 굳게 안다. 알수록 시위의 끄트머리에 앉았다 슬그머니 빠져나오며 불평했던 자신이 또 미안하고 부끄럽고 늘 빚진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