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복수를 재생산합니다. 복수는 결코 복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잠재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분노에 휘말리면 이성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결국 분노의 노예가 됩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이미 분노와 자기 자신이 일체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노의 목표는 뚜렷합니다. 그러므로 그 목표를 이루고 나야 잠잠해질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은 치열하고 어쩌면 최대한 무자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살아가며 분노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정상인이라면 없을 것입니다. 성인군자라도 분노를 느낍니다. 다만 억제하는 능력이 남다를 뿐이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분노를 경험하고 또 일부 지닌 채 살아갑니다. 많이 담고 있는 사람과는 자칫 충돌을 일으킬 소지가 많습니다. 소위 발끈 하는 사람은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이기 십상입니다. 조금만 마음이 틀어져도 싸움하자고 할 것입니다. 상대하기 어렵고 가까이 하기 불편할지 모릅니다. 이해심이 하해와 같지 않다면 좋은 이웃이 되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눈앞에서 부모가 폭력배들에게 살해당합니다. 이제 겨우 9살 소녀입니다. 그 현장에서 그들과 마주하여 당당합니다. 어쩌면 부모의 그런 세계에 태어나면서부터 익숙해져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기막히게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도주하지요. 그곳에는 삼촌이 피신하여 살고 있습니다. 삼촌과 할머니 손에서 자라납니다. 목표는 하나, 복수입니다. 그래서 킬러로 훈련을 받습니다. 킬러라고 무기 사용하는 법이나 몸이나 단련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상대를 알기 위해서는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최신 기기들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훈련이고 또한 공부입니다. 그런 노력을 어떻게 그런 것에 기울여야 할까요? 안타깝습니다.
15년의 세월이 흐릅니다. 세상도 발전하고 한 여인도 눈부시게 달라집니다. 기막힌 두뇌회전, 유연한 몸놀림, 강인한 체력, 숙달된 기기 사용, 웬만한 총잡이를 능가하는 실력 등등 완벽한 슈퍼우먼입니다. 경찰과 FBI의 철저한 보안을 뚫고 목표물을 제거합니다. 흔적도 없습니다. 도무지 찾지를 못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목표물을 제거해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 도장을 찍어 놓습니다. 최종목표물을 찾기 위한 포석이지요. 그러나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위험한 흔적이기도 합니다.
과연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함부로 처리할 수는 없지요. 더구나 개인이 해결하는 일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될 것입니다. 쓰레기 같은 악인들이 살해되고 있지만 그래도 살인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수사기관은 그 범인을 추적하여 검거해야 합니다. 수사망이 좁혀옵니다. 또 한편 목표물도 스스로 자기 자신의 위험을 감지합니다. 그러므로 역시 살 궁리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먼저 찾아내서 처치하는 것입니다. 쫓고 쫓기는 형국이 되지요. 그런 사이 흔히 그 주변 사람들이 희생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노를 더욱 촉발시키며 증폭시킵니다.
삼촌과 할머니가 무참하게 살해됩니다. 이제 더 갈 곳도 없습니다. 빨리 끝장을 내야 합니다. 슈퍼우먼, 여전사의 이름은 ‘카탈리야’입니다. 피붙이는 다 잃었습니다. 마지막 복수의 혈전만이 남았습니다. 은신처를 알아낸 카탈리야는 중무장을 하고 단독으로 침투합니다. 그리고 목표물의 은신처를 두들겨 부숩니다. 그렇게 오만하고 당당하던 자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얼마나 초라해지는지 볼썽사납습니다. 폭력배 두목은 고사하고 소위 국가 최고 정보국이라는 곳에 몸담고 으르렁거리던 작자도 어쩔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은 그렇게도 절절매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의 목숨은 그리 쉽게 처리할 수 있는지요? 교만 뒤에 숨은 나약함을 보는 듯합니다.
한 마디로 그저 신납니다. ‘섹시하게, 화끈하게, 완벽하게, 통쾌하게!’ 광고 문구처럼 깊이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즐기면 됩니다. 사내아이가 아닌 여자아이로 복수의 화신을 바꾸어 설정했습니다. 상업성을 고려한 것이 아닐까요? 연약한 듯 유연하면서도 날렵하고 민첩합니다. 무엇보다 섹시하지요. 그러면서도 실력이 뛰어난 전사입니다. 볼만하지요. 움직임의 시원함과 통쾌한 결말, 그것으로 끝입니다. 더 바랄 것이 있습니까? 영화 자체는 그렇습니다.
누구나 당한 만큼 갚아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되로 받고 말로 줍니다. 복수하는 시점까지의 당한 고통을 얹혀서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수는 점점 더 잔혹해집니다. 무엇보다 그 주변 사람들이 함께 당할 비극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영화 ‘콜롬비아나’를 보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영화는 끝났지만 생각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