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東溪) 권도(權濤)
樂民 장달수
약력
1575년(선조8) 단성현 단계서 출생
27세 진사시 급제
29세 한강 정구 문하에서 배움
32세 남명선생 사당 참배
49세 성균관 주서 제수
50세 병조정랑 사간원 정언 제수
66세 사간원 대사간 제수
68세 덕계집 교정
70세(1644) 세상 떠남
산청군 신등면 소재지를 이곳 사람들은 ‘단계’라고 부른다. 한옥 보존 단지로 지정된 마을로 파출소, 초등학교가 모두 한옥으로 되어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색다른 기분을 느끼곤 한다. 단계의 즐비한 기와집은 오랜 전통을 간직해 온 마을의 역사를 그대로 말해 주고 있다. 단계는 유서 깊은 마을로 안동(安東) 권씨(權氏)들의 집성촌이었다. 지금은 예전같이 권씨들이 많이 살지는 않지만, 그래도 산청지역 대표 성씨로 알려져 있다. 단계천 건너편 양전 마을에 단계 안동권씨의 조상인 충강공(忠康公) 동계(東溪) 권도(權濤)의 신도비가 있다.
“공의 사람됨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성실하고 청렴하고 강직했다. 집에 있을 때 부모를 봉양하고, 장사 지내는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으며, 조정에 있을 때는 얼굴색을 바르게 하고 임금에게 바른 말을 잘 하였다” 조선 정조 때 명재상 채제공(蔡濟恭)이 지은 신도비문에는 동계가 집안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벼슬에 나가서는 임금에게 충성한 전형적인 선비임을 말해 주고 있다.
동계 권도는 1575년(선조 8년) 단계에서 태어났다. 동계의 5대조 사용(司勇) 벼슬을 지낸 계우(繼祐)가 단성에 사는 윤변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안동권씨들이 비로소 이 마을에 살게 된 것이다. 동계는 어려서 매우 총명하였던 것 같다. 10세 때 서애 유성룡이 관찰사로서 지나가는 길에 동계가 총명하다는 소리들 듣고 집에 들러 시험해 보고는 “이 아이가 내 스승이다”라 감탄해 마지않았다 한다.
18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부친에게 산 속으로 이주할 것을 권해 황매산으로 이사를 했다. 동계가 왜적이 쳐들어 올 것이라고 말하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비웃으며 미리 방비하지 않았다 한다. 임진왜란 때 피란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자 동계는 곡식과 돈을 풀어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했다. 동계 부친인 세춘(世春)은 의병을 모아 망우당 곽재우 진영을 따랐다가 이듬해 학질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동계는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충청도 회덕, 성주 등지를 옮겨 다니다가 난이 끝난 후인 1600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28세 때 삼가에 살던 남명 문인 입재 노흠을 방문했으며, 이듬해 숙야재(夙夜齋)에서 역시 남명제자인 한강 정구를 만나 가르침을 들었다. 다시 32세 때 덕천서원으로 가서 남명선생 사당에 참배하고, 이때 덕천서원을 참배하러 온 한강을 영접하고 가르침을 들었다. 38세 때는 여헌 장현광을 만나 가르침을 들었다. 이듬해 회시(會試)에 급제해, 조정에서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유했으나, 조정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 그냥 고향으로 돌아왔다.
42세 때 성균관학유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동계가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던 것은 광해군이 정치를 잘못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 동계는 집을 두릉(杜陵)의 대나무 숲 가운데 지어 스스로 호를 ‘동계병은(東溪病隱)’이라 하고 스스로 세상에 나가기보다는 자연을 벗 삼아 숨어 살고자 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동계는 비로소 벼슬길에 나아간다. 1623년 3월 인조반정이 성공했는데, 6월에 승정원 주서(注書)의 벼슬에 나아간 것이다. 이때 동계는 주로 승정원 홍문관 성균관 사헌부 등지에서 벼슬을 하며, 임금에게 올바른 시책을 건의했으며, 잘못된 정책은 바른 말로 부당함을 주장해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다.
특히 원종대왕 시호를 의론하는 일로 임금에게 바른 말을 하다가 미움을 사서 해남에 유배되기도 했다. 이때 동계의 지조가 널리 알려져 조야의 많은 선비들이 그를 칭송하기도 했다. 동계는 외직에 나아가서도 그 직분을 다하였다. 흥양 현감으로 나아가서는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특히 80세 이상 된 사람들에게는 솜과 옷을 주었다. 흥양현이 바닷가 외진 곳에 있어 사람들이 학문을 잘 몰랐는데 동계는 젊은이들을 모아 친히 공부를 가르치기도 했다. 64세 때 통정대부에 올라 이듬해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68세 때 덕계선생 문집 교정의 일을 맡아 보았다.
동계는 자제들을 가르칠 때도 반드시 의로운 방법으로써 했다. 일찍이 글로 경계하기를, “음주를 하지 말며, 사냥을 하지 말며, 할일 없는 사람들과 왕래하지 말고, 부지런히 독서하라. 늙은 아비의 근심이 네가 화살을 짊어지는 것에 있지 말게 하여라”고 했다. 동계가 69세 때 만든 가훈으로 부지런히 책을 읽어 학문에 힘쓰란 내용이다. 가훈을 만든 이듬해 동계정사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0세였다. 동계가 세상을 떠난 후 조정에서는 이조판서의 벼슬을 추증하고, 1672년에는 고을의 선비들이 도천서원에 배향했다.
1788년에는 다시 사림들이 완계(完溪)의 동쪽에 서원을 건립해 동계의 위패를 봉안했다. 현재 신등면에 있는 완계서원이 그곳이다. 완계서원은 옛날 동계가 살았던 동계정사가 있던 곳이다. 동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유림들이 서원을 건립한 것이다. 동계의 흔적을 찾아 단계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단계초등학교 정문이 눈에 띄었다. ‘삭비문(數飛門)이란 간판을 달고 솟을대문 모양을 하고 있다. 일찍이 공자가 배우고 익히는 것을 새가 자주 날갯짓 하듯이 해야 한다 했다. 새가 자주 날갯짓 하는 것이 ‘삭비’다. 배움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단계 사람들이 조상의 전통을 끊임없이 이어오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