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史記 19회》
☆월나라의 책사 범려☆
고대 중국 역사에는 신출귀몰한 꾀로 주군을 보좌하여 創業(건국)을 하거나 부국강병을 이룬 策士(謨士, 軍師 등 여러가지로 칭함)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고 조조에게는 순욱이 있었으며 한나라를 창업한 유방에게는 장량이 있었습니다.
그들중에서 대선배라고 할 수 있는 범려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앞에서도 여러번 언급되었지만 범려는 월왕 구천의 꾀주머니로 구천을 도와 철천지 원수 오나라를 굴복시키고 구천이 춘추5패의 반열에 오르도록한 인물입니다.
구천이 패자(覇者)가 되는 순간까지 전력투구한 범려는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절정에 오른 군주 옆에 오래 있는 것은 위험하다. 구천은 고생은 함께 나눌수 있어도 영화는 함께 나눌 그릇이 못된다." 이렇게 생각한 범려는 구천에게 편지를 띄워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습니다.
일종의 사표를 낸 것입니다.
사표를 받은 구천은 "나는 나라를 둘로 나눠서 귀공과 더불어 다스리고자 하는데 그만둔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나와 함께 하지 못하겠다면 나는 귀공을 죽일 것이오."라는 글을 써서 비서에게 들려보냈습니다.
그러나 범려는 이미 그럴줄 알고 짐을 챙겨 가솔을 데리고 배를 타고 제나라로 가는 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제나라에서 농사를 지으며 열심히 살던 어느날 大夫(총리) 문종이 위험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문종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빨리 구천 곁을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새가 다 잡히면 좋은 활도 창고에 처박히고 교활할 토끼가 다 잡히면 사냥개는 삶아먹힙니다."
飛鳥盡 良弓藏(비조진 양궁장) 狡兎死 走狗烹(교토사 주구팽)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문종은 그래도 설마 하며 구천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떤 간신배가 문종을 헐뜯는 모함을 하였습니다.
오나라에 포로로 잡혀 3년동안 그 고생을 하며 자신을 위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한 문종을 구천은 간신배의 모함을 그대로 믿고 죽였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범려는 탄식하며 "고생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영화는 함께 나눌수 없다"는 말을 되뇌이며 생사를 같이 했던 친구 문종의 죽음을 슬퍼하였습니다.
범려는 제나라에서 숨어살다시피 하였으나 어떻게 알았는지 제나라에서 재상(총리)에 앉아 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하여 잠시동안 재상을 하다 이것도 오래하면 안된다고 판단하고 1년만 하고 도(陶)나라로 가버렸습니다.
범려는 성을 도(陶)씨로 바꾸고 열심히 장사를 하여 陶主公이라는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초나라에서 장사를 하다 사람을 죽여서 감옥에 갇혀 사형 날짜만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범려는 마차에 금품을 가득 싣고 막내 아들에게 초나라에 가서 아버지 친구 張生을 만나라고 편지 한장을 써서 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이 자기가 가겠다고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범려는 막내 아들을 보내야 둘째를 데리고 올수 있다고 하였으나 장남이 하도 성화를 내는 통에 그의 부인이 장남을 보내자고 하여 보냈는데 둘째를 살려서 데려오지 못하고 죽은 시체만 마차에 싣고 왔습니다.
둘째가 시체로 돌아오게된 내막은 이렇습니다.
장남이 초나라에가서 장생을 만나 편지를 전해주고 금품을 전해 주면서 별도로 다른 관리들에게도 돈을 뿌렸습니다.
장생은 임금에게 나라도 안정되고 평화로우니 전하의 은덕을 천하에 알리기 위해 죄수들을 모두 사면시키자고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이 범려의 장남 귀에 까지 들렸습니다.
범려의 장남은 자기동생만 빼달라고 거금을 주었는데 죄수들을 모두 사면한다고 하니, 거금을 준 것이 아까웠습니다.
그길로 장생에게 가서 맡긴 돈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장생은 받아놓은 돈을 그대로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장생은 임금에게 가서 "도나라 陶主公의 장남이 여러 관료들에게 금품을 살포해 자기 동생을 빼달라고 하여 그 빽으로 다른 죄수들도 사면을 받게 되었다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하의 권위에 손상이 될까 두렵습니다. 하오니 사면은 없었던 일로 하고 도주공의 둘째 아들을 사형시킨 다음에 다시 사면령을 내리는 것이 전하의 권위에 손상이 가지않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하였습니다.
이에 초나라 임금은 장생의 건의를 받아들여 범려의 둘째 아들을 사형시켰습니다.
범려의 부인은 둘째 아들이 시체로 돌아오자 울고불고 하였지만, 범려는 내 그럴줄 알았다며 둘째 아들의 죽음을 인정해 버렸습니다.
"장남은 나와 함께 어려운 고통을 감내하면서 돈을 벌었기 때문에 돈이 아까워서 장생에게 준 돈을 다시 찾아왔기 때문에 둘째가 죽은 것이오. 나는 그럴줄 알고 돈 아까운 줄을 모르고 자란 막내아들을 보내려고 했던 것이오."라며 부인을 달랬습니다.
범려는 배팅을 크게 해야만 승산이 있고 위험한 장사가 돈이 많이 남는다는 이치를 일찌기 터득하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