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소명의식(召命意識) 그리고 예정론(豫定論)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Max weber)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기독교 정신, 특히 프로테스탄티즘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예정론(豫定論)이란 게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예정론이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신에게 구원(천국으로 갈지 못 갈지를)을 받을지, 못 받을지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겁니다. 다만 자신은 그것을 모를 뿐이라고 합니다. 만약 자신의 구원이 태어나는 순간 이미 정해져 있다면 인간, 특히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요? 대부분 자신은 반드시 천국으로 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에 걸 맞는 행동을 하게 될 겁니다. 비록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자신은 구원이 예정된 사람처럼 행동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에 따라 열심히 신앙생활에 집중하는 것은 물론 일상적 생활도 신앙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마치 무인카메라가 자길 찍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이 지점에서 ‘소명(召命)의식’이라는 게 나옵니다. 신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자로서 스스로 확신하고 행동한다는 것인데, 그러므로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신이 이미 예정해 놓은 일들을 하고 있다고 믿게 되는 겁니다. 서구인들의 직업의식은 바로 이 소명의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신께서 언제, 어디서든 지켜보고 계시므로 늘 최선을 다하고 게다가 근면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한다고 생각했는데, 베버에 의하면 그게 결국 자본가의 모습으로 연결된다는 겁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일정 정도의 부(富)를 축적했으면 축적을 그만두거나, 축적한 것을 주변과 나누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던 일을 중단 없이 열심히(?) 계속 하는 게 신에 대한 자신의 소명의식을 다하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고, 특히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자본가들은 소명의식의 실천을 끝없는 ‘자본의 증식(增殖)’으로 연결시킨다는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중단 없는 사업 확장과 집중이 그것이죠. 오히려 예정론, 소명의식 등이 자본의 증식에게 더욱 더 강한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 같아 보입니다. 어떻게 해도 그게 신의 뜻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관계는 이른바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더욱 드러납니다. 자본주의에서 자본가들의 종자돈이라고 불리는 ‘초기 자본’은 어떻게 마련된 것일까요? 그들은 정말 합리적이고 근면하며 성실하게 일만 한 하나님의 선택받은 착한 백성이었을까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토대를 마련한 변혁의 서곡은 15세기 마지막 1/3기와 16세기 첫 수십 년 동안 연주되었다.”- 칼 마르크스 <자본론>
자본주의가 시작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이른바 ‘자본의 본원적 축적’ 기간에 지주(地主)들은 소작인들을 농토로부터 몰아내면서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유럽은 ‘양모(羊毛) 산업’이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양모가격’이 급등하고 대지주, 귀족, 혹은 봉건영주들의 많은 농지(農地)가 양을 키우는 목장으로 바뀌면서 강제로 농민들을 도시로 몰아내게 됩니다. 그걸 엔크로저(encloser) 운동이라고 하는데요, 그냥 나가라고 한 게 아니라 집을 부수고 불을 지르고 갖은 협박과 폭력이 수반되었습니다. 도시로 내몰린 농부들은 대부분 도시빈민(프롤레타리아, 무산자계급)이 되었고 자본주의 내에서 저임금 노동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자본가 계급의 ‘자본’은 농민들 중 일부 농민이 열심히 일하여 모은 돈을 검소하고 합리적으로 사용하여 만든 게 아니라 이처럼 피 비린내 나는 강제철거와 이주가 만들어낸 산물이었던 것입니다.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 관련된 엔크로저 운동은 1차로 끝난 게 아니고 2차 엔크로저 운동도 연이어 일어났으며 그때부턴 영주나 귀족과 함께 이미 부유해진 부르주아나 상인들에게 의해 더욱 수탈이 가속화 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마을의 거의 모든 공동토지들이 수탈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공유재산 횡령, 유혈입법, 대감금, 대추방, 빈민법, 노동교화, 경찰, 감시 장치 등에 의해 폭력적 수탈은 강화됩니다. 심지어 종교개혁의 유명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칼뱅(Calvin)조차 ‘대중은 오직 빈곤에 의해서만 노동하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을 하면서 마치 난폭한 동물을 길들이는 것처럼 대중은 빈곤과 배고픔에 처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축적한다는 것(혹은 부자가 된다는 것)은 이론적으론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체제는 표면상 노예제나 봉건제와는 달리 ‘등가교환(等價交換)’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즉 100원짜리 상품은 100원에 사거나, 100원에 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은 부를 축적하고 있죠.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등가교환의 이면에 무수한 부등가 교환이 있다는 말입니다. 처음엔 지역이나 시간 차(差)를 이용한 부등가교환이 있었고 산업혁명이후 자본은 노동력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부등가교환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아담스미스가 말하는 이른바 ‘국부(國富)’는 자본이 노동자로부터 노동력을 구매하고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부등가교환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초기자본주의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자본주의는 그것을 넘어 거의 모든 부문에서 부등가교환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본은 먼저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서 여러 가지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와 공권력, 언론, 이데올로기, 금융, 교육, 종교, 문화 등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주류가 됨으로서 자본은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작금의 금융자본 같은 거대한 괴물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방식의 부의 축적이 마치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처럼 되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자를 ‘잘 사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일상어법이 바로 그런 것의 한 단면이지요. 사실 '부자로 산다.'는 것은 '잘 산다' 것과는 다를 뿐 아니라 오히려 정 반대죠. 가난한 사람을 ‘(잘)못 사는 사람’으로 부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자본은 지금 우리가 매일 들어 마셔야 하는 공기(空氣)를 확 바꾸어 놓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부등가교환을 자연스러운 ‘물의 흐름’으로 여기게 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지금의 자본은 ‘노동자의 노동력’을 수탈하는 것보다 '노동자들의 의식'을 수탈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겁니다.>
첫댓글 3-1)~5, 약 5회에 걸쳐 자본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마르크스는 프로이트, 니체, 다윈과 함께 중세와 근대 그리고 현대로 넘어갈 때 사유해야 할 중요한 문턱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