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년 모월 모일. 비는 그쳤지만 종일 찌푸림 필살의 창, 매복했던 적이 날린 창에 찔려 낙마한 나는 피범벅이 된 전장터에 누워 있었다. 숱한 전장터를 나와 함께 누비던 충성스러운 애마도 옆구리를 찔린 듯 가쁜 숨을 내쉴 때마다 옆구리에서는 붉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어. 자랑스럽게 날리던 하얀 갈기는 세상의 오욕과 피로 얼룩져 더욱 비참했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으리만큼 지쳐있었고 올려다 보는 초겨울 하늘이 너무 맑고 높기만 했어. 도라지가 그려진 내 순백의 깃발을 매단 창을 초겨울 푸른 하늘을 향해 힘겹게 뻗어보았어. 찔러도 내 창끝에는 아무것도 맺히지 않는 허공뿐이었어. 내 창이 가늠하지 못하는 하늘은 끝없이 푸르렀고 아득하게 멀었어. 평생을 모셔온 주인 곁에서 거칠게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애마의 눈처럼 세상은 슬프고 애달펐어. 그 순간 가물거리던 내 눈에 눈물이 몇 방울 주르륵 흐르네. 평생 살벌한 전장을 누비면서도 왜 적을 죽여야 하는지 몰랐어. 끓어오르는 살의를 가지고 적의 가슴을 찌른 적이 없었던 게 믿어지지 않았어. 그저 습관적으로 창을 단단히 잡고 히이~잉 하얀 갈기를 날리며 적진을 향해 달리는 애마 위에서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건지, 내가 누구를, 왜 죽여야 하는지 몰랐어. 즐기라던 부장 말따나 내가 부장으로 승진하고나서야 깨달았어. 내가 이리도 전쟁을 즐길 줄을... 어쩠든 눈물에 비치는 전장. 필사적으로 부르짖는 건 조 차장이었어. 낙마한 부대장인 나를 찾으라는 명령을 고래고래 고함치고 있었지만. 맙소사 연전연승하던 무적의 도라지 부대는 무참하게 깨지고 있었어. 절룩이며 부러진 창을 꼬나든 채 뿔뿔이 흩어지는 내 부하들이 어떻게 무적의 도라지 부대랄 수 있겠어. 맞부딪치고 빗겨 찌르고 위로 올려 막고 내찌르는, 창 검술을 벌이는 군사들이 내지르는 비명은 들리지 않았어. 흡사 음향장치가 고장 난 영화처럼 내게 아무런 감흥이 나지 않았어. 내가 말이야 극장에 영화를 보러온 거 같더라니까.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었어. 옆에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애마의 처연한 임종이 있었어. 주인 된 도리로 나는 칼을 뽑아 들고 욕되게 붙어 있는 그의 숨을 한 방에 끊어주는 게 의당 내가 할 일이었겠지. 나는 일어설 수 없었어. 애마도 가물가물 멀어지고. 나는 차츰 까무룩하게 밀려드는 잠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어. 죽음보다 깊은 잠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게 깊고도 깊은 잠에 취했어. 패전의 전조는 달콤했어. 우리가 패전의 늪으로 빠져들 조짐은 이미 가을에 접어들면서 들어나기 시작했다. 이즈음 나는 귀가시간마저 늦어지고 있었어. 전장을 며칠이고 누비다 보면 내가 베어버린 적의 피였던지 내가 흘린 피인가? 피범벅이 된 군화와 포탄 냄새가 깊이 배어든 군복을 입은 채 차마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어. 전장에서 그을고 상처 입은 벌거벗은 내 몸을 아내에게 보여 줄 수는 없었어.
그때가 아마 롯데호텔에 있는 빠를 들르는 게 내 일과였지. '윈저 바'라고 스코틀랜드풍의 바가 맘에 들었어. 스카치를 즐기기도 했지만 가을 들어서는 맥주를 주로 시켰어. 스코틀랜드 체크 무늬 조끼를 입은 반백의 웨이터가 냉장고에서 유리잔을 조심스레 가지고 오는 것이 첫 번째 의식이었어. 실내 온기로 유리잔은 금새 희뿌연 안개가 자욱하니 피어올라 우윳빛으로 변하는 게 놀랍더라고. 다음은 호박색 맥주를 천천히 따루겠지 격조 있는 솜씨로. 뿌옇게 안개가 피어올랐던 유리잔은 금새 호박색 맥주를 머금은 투명한 유리잔으로 변해갔어. 맥주를 따르는 반백의 웨이터와 나는 무슨 종교적 제의를 치르는 듯 숙연했고 우린 말없이 이 과정을 즐기고 있었다네. 안개. 가을에 접어들면서 희뿌연 안개는 흉칙한 이빨을 들어냈어. 우선 피아간의 구별이 없어지더군. 적이 어디에 있는지 곤두 신경을 쏟다보면 나중에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어. 모든 게 헝클어졌고 사방이 허방이었어. 총질을 해보아도,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창을 가지고 찔러보아도 어디에도 꽂히는 맛이 없이 허방이었어. 작전장교가 무어라고 열심히 작전을 세우고 떠들었지만 듣는 우리도 뭐가 뭔지 몰랐고 사실 작전을 세운 그놈도 모르는 것 같았어. 모든 게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무인도에 떨어진 듯 이따금 외로웠어. 달려들어야할 적의 진지가 보이지 않으니 애마도 하루하루 맥이 빠졌고 디룩디룩 살이 쪄갔어. 순백의 갈기도 차츰 그 윤기를 잃어가고. 포복. 살금살금 기어 오는 적의 기척을 느낀 것은 언제 즈음이었을까? 사령부가 가르쳐준 정보는 절대 없었어. 사령부는 살찐 누룩 돼지만 가득했으니까. 환각제를 마시면 이럴까? 나른한 잠만 밀려왔어. 무능해빠진 사령관은 그걸 평화라고 했어.
평화? 세상에!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평화란 놈이 겨우 이런 거였단 말이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이 나른하고 무력해도 명징하게 머리는 맑아왔어. 그래서 더욱 힘이 들었다네. 그때야, 우리가 띄운 척후가 말여물 빼돌려 팔아먹고 노래방으로 방석집으로 돌아다니는 줄 어떻게 알았을까. 모든 것이 아침 해가 떠오르면 스르르 걷혀가는 안개처럼 진리는 나중에 흉한 모습을 들어낼테지만, 질긴 안개로 포위된 우리는 스스로 무장해제를 당하고 있었던 거야.
안개 때문에 그랬다니까? 나중에 산헤드린 청문회에서 말 잘하는 랍비와 바리사이가 사령관을 족치더라만 다 헛것이었어. 우리가 처참하게 당한 패전의 이유는 안개 탓이라니까. 안개는 집요했고 슬금슬금 잠자리에 스며드는 구공탄 가스처럼 도무지 기척이 없었다네. 혹시 마약을 하면 이 기분일까. 맨 처음에는 안개 속에서 두려웠지만 잠이 늘어가면서 그건 달콤하기까지 했어. 척후가 눈 똑바로 뜨고 적진을 살폈던들 하면서 감옥에 보내려하더만 말짱 헛것이야. 또 돼지같이 디륵디륵 살찐 사령관을 십자가에 달아야 한다고.... 내 보기에는 사령관은 단순히 무능할 뿐이었고 더 악질은 총 사령관 자리를 두고 앙앙불락하던 놈이 더 나빠. 디제이랬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불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 위에서 사령관 영샘이가 발을 번쩍 들고 캉캉 춤을 추려고 하면 빤스를 벗기려 무대 바로 밑에서 디제이가 기다리는 걸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어? 숙맥이라고? 진종일 전쟁터만 쫒아 다니는 우리가 숙맥이지. '불쌍한 우리만 골탕 먹었네' 징징 짜지 마. 그때는 다들 미쳤다고. 방학 때는 동남아 편은 애초에 틀렸고 유럽행 비행기도 자리가 없었어. 바티칸에 가봐. 시스티나 성당 최후의 심판 앞에는 둘러보아도 한국 놈뿐이었어. 그래서 최후의 심판, 이글이글 타오른 지옥불에 산적이 되어 이 고통을 당하는 거지 뭐그래. 그렇다고 쌤통이라는 넌 뭐가 그리 좋아서 호들갑이니? 아이엠에프랬어! 아엠에프라는 듣도 보도 못한 신형 무기가 우리를 전멸시킨 거야. 적은 오랫동안 준비한 게 틀림없어. 안개라는 달콤한 미끼를 던져 놓고 한 순간에 몰살시킨 솜씨는 군인인 내가 봐도 정말 대단했어. 불세출의 무사가 휘두른 칼솜씨랄까. 변하려고 애쓴 놈이 이긴다는 걸 우린 몰랐던 거야. 흡사 일본 전국 시대, 붉은 갑옷의 기병대를 거느린 다께다 신겐은 전국시대 일본의 최고의 장수였어. 붉은 갑옷의 기병이 나타나면 적병은 즈레 겁을 먹고 도망쳤다고 해. 이런 불세출의 영웅, 다께다 신겐이 나가노 전투에서 조총으로 무장한 오다 노부나가의 철포대한테 패한 것은 바로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탓이었어. 피로 칠갑을 한 붉은 갑옷을 입은 기마대열이 긴 창검을 꼬나들고 질풍노도처럼 달려든들, 땅에 주저앉아 부싯돌에 불을 붙여서 한 발 한 발 쏘아대는 화승총에 어찌 견주랴. 신겐은 비운의 인물이 아니라 세상을 몰라본 대가를 톡톡히 치룬 게지 뭐.
역전의 용사랬어 날. 스무 해를 넘긴 역전의 용사라고 내가 너무 자만했던 거야. 반듯한 놈으로 척후를 띄웠더라도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잘난 놈들이 배운 건 뭐였지? 미국까지 가서 따온 MBA는 쌔고 쌔벌렸더라만 전장이 안개로 포위당한 오리무중에는 아무 쓸모도 없더구먼. 부러진 창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나는 부러진 창을 끌고서 절룩이는 걸음으로 돌아왔어. 차마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 성당에 들렸더니 젊은 보좌신부가 다가와 잔을 채울 뿐, 우린 말이 없었어. 신문에 자자했던 내 패전 소식을 듣고서는 보좌신부는 위로도 해 줄 수가 없었나봐. 하지만 집 말고는 어디 갈 수 있겠나. 아내는 그동안 잘 싸웠다고 격려를 해주었지만 분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지. 용감했던 내 부하들을 반이나 잃고서 고개를 쳐들 수 없었어.
불면의 밤. 불면의 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 게 이 때였어. 자꾸만 커지는 세상에 비해 나는 끝없이 작아지고, 밤에 문득 눈을 뜨면 앞으로 살아내야 할 삶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잠을 청해도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가는 부하들의 모습이, 피아간을 알 수 없는 머리가 떨어진 군사들이 나를 향해 내 머리 내놓으라고 달려들었어. 누구도 책임 질 줄 모르는 기묘한 전쟁은 그렇게 끝났고 전쟁이 준 흉측한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어.
어느덧 찾아온 내 중년이 이리도 무력하게 시작하고 있었어. 머리를 깍은 날이면 하얗게 무서리가 내린 내 꼴이 보기 싫어 아내는 염색약을 챙겨 주었지. 매사 바지런하고 잘 챙겨주던 아내가 지쳐가고 있었어. 내가 내민 창끝에 행커치프를 매어 주던 싱싱하고 푸르렀던 아내는 어디로 가고, 눈가에 기미가 까맣게 깔린 중년의 여인이 피곤한 차림으로 있을뿐 내 아내는 보이지 않았어. 애마를 잃은 장수가 집을 나설 때도 손 한 번 흔들어 주지 않았어. 그저 '미안해요, 잘 다녀오세요.'라고 쓴 메모지가 나를 배웅할 뿐이었어. 아내는 늘 잠들어 있었어.
패장이 징징거리는 소리. 전장에서 세운 공로로 훈장 달아달라는 구차한 사정을 하는 게 아니야. 아릿답던 내 아내의 환한 미소를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이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내 아내가 흔들어 주는 눈부신 행커치프와 박꽃처럼 환한 미소를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한 번만이라도...
왜 안 되는 걸까? 내가 패장이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