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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이 왕위에 물러나면서, 갑작스럽게 신하들에 의해 추대되었던 왕이 바로 중종(中宗)이다. 연산군의 모친인 윤씨가 폐서인되어 왕비에서 축출된 후,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에게서 태어나 진성대군이라고 칭했던 인물이다. 그렇기에 연산군과는 이복형제이며, 실제 연산군 재위 시에 그에 관한 기록은 매우 소략할 정도라고 하겠다. 아마도 연산군과 배다른 형제이고 조금이라도 특별한 행적을 보이면, 곧바로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될 수 있었기에 그만큼 조심스럽게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연산군이 말기의 폭정으로 인해 축출되면서, 자연스럽게 쿠데타를 일으켰던 신하들은 성종의 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였던 것이다. 이를 일컬어 혼란스러운 정치를 바르게 돌린다는 의미로 ‘중종반정’이라 칭하고 있다.
태생적으로 왕이 될 수 없었던 인물이 신하들에 의해 등극했기 때문에, 집권 초기에 중종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추대한 신하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을 것이다. 저자는 단순히 ‘거사’에 찬성 의견을 냈다는 이유만으로 ‘개나 소나 공신’으로 책봉되었던 당시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실제 ‘반정’의 공신록에 올랐던 인물들 가운데 상당수가 연산군 시절 총애를 받았으며, 정작 소수의 연산군 측근들에게만 정치적 책임을 지웠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또한 신하들에 의해 ‘명분없는 쿠데타’가 자행되었기에 당시의 반정 주역들도 ‘또 다른 반정’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이처럼 신하들의 쿠데타로 인해 왕위에 등극했다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녔기에, 중종의 치세 기간은 권신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우유부단함’으로 평가되고 있다.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 세력인 사림을 적극적으로 양성했으나, 그들을 대표하는 조광조의 강력한 개혁 정책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내 축출시켜 개혁이 좌초되었던 사실이 중종 치세의 성격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전개되었던 조광조의 개혁이 왕권에 도전한다고 여겼던 중종은 마침내 ‘기묘사화’(1519)를 통해 사림파들을 대거 숙청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아마도 중종은 조강조의 개혁이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다고 여겨 그저 두고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이후 남곤과 김안로 등의 권신들에 의해 조정 권력이 장악되었고, 사극의 소재로 활용되었던 문정왕후와 경빈 박씨의 세자를 둘러싼 알력 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실록을 통해서 드러난 중종의 치세를 저자 역시 ‘무력한 세월’이라는 타이틀로 정리하고 있으며. 실제 중종 치세를 일관된 정책보다는 왕위를 지키기 위해 권력을 극단적으로 강화하려 했던 시대로 평가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중종의 이러한 성격은 신하들의 쿠데타로 왕위에 올랐다는 것으로 인해,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 역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며, 인자하다는 호평과 더불어 변덕스럽고 우유부단함을 지적하는 비판적 견해도 공존하고 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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