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머리에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면서 국문학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고, 당시에 새롭게 문을 연 대학들에서 국어국문학과가 본격적으로 개설되었다. 민족문화를 정립하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각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가 설립되면서, 그동안 일부 학자들의 몫으로 여겨졌던 국문학 분야의 연구가 체계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토대는 마련된 셈이었다. 새로운 시대를 맞아 적극적으로 활동에 나섰던 당시 학자들은 국문학에 대한 열의가 높았지만, 그에 반해 연구를 위한 자료의 확보와 연구 성과를 발표할 지면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에 노출되었다. 연구자들이 크게 부족했던 상황에서 서울의 주요 대학에서는 경성제국대학 출신들을 중심으로 교수진이 갖춰지기 시작했으며, 대학 설립 초창기인지라 교육 환경을 비롯한 각종 여건은 절대적으로 미흡한 실정이었다. 학과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한 교육 과정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으며, 전공 수업에 활용할 교재도 온전하게 갖춰지지 않아 교육 현장은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에 재직하고 있던 교수들은 개인의 연구와 함께 학생들을 교육하고, 그에 걸맞은 교육 과정과 학과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새롭게 개설된 국어국문학과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학과의 운영과 교과 과정의 체제를 온전하게 구축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던 상황이었다. 당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일부 학자들이 모여 연구 모임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개인의 연구 활동을 펼치면서 국문학의 자료를 수집하고 교과 과정의 정립과 교재 개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고정옥을 비롯한 당시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7명이 조직하여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쳤던 ‘우리어문학회’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모임에 참여했던 구성원들은 여전히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던 국어국문학 분야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면서, 대학의 국어교육을 담당할 교재의 개발을 염두에 두고 1948년에 ‘동호인적 성격’의 모임을 조직했다고 하겠다.
이들은 애초에 그 명칭을 ‘국어교육연구회’라고 명명했는데, 아마도 대학 현장에서 제기된 교육의 어려움을 공유하고 이의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구성원들이 수업 교재로 활용하기 위한 국문학사를 공동 집필하였고, 이후 본격적인 연구 활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모임의 명칭을 ‘우리어문학회’로 변경하였다. 이들에 의해 조직된 학회는 비교적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치고 적지 않은 성과를 제출하였음에도, 활동하는 기간 내내 제한된 인원만을 유지하였기에 다소 ‘폐쇄적’이라고 평가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한국전쟁’(1950)의 와중에 일부 회원들이 사망하거나 북으로 옮겨 활동하면서, 남아있던 구성원들만으로는 학회 활동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어 사실상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학회의 존재는 물론 ‘해방공간’에서 활동했던 그들의 연구 성과가 제대로 검토되지 못한 채, 국문학 연구사에서도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같은 이름인 ‘우리어문학회’라는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는 학회가 존재하지만, 해방 이후 활동했던 이들과 전혀 연관되어 있지 않은 별개의 단체라고 하겠다.
우리어문학회는 1940년대 후반 약 3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지만, 적지 않은 연구 성과를 제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들이 제출한 연구 성과들을 꼽아보면 학회의 이름으로 국문학사와 국문학개론 등 2권의 저서를 출간했고, 모두 3호에 걸쳐 학회의 기관지인 어문을 발행하였다. 고전문학 자료의 교주본의 집필 작업도 진행했으나, 그 결과물이 단행본의 출간으로 완결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학회 활동과는 별개로 회원들이 개별적으로 국어국문학 분야의 연구를 진행하여, 구성원 각자의 연구 성과를 논문과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처럼 학문적 토대가 열악한 조건에서 ‘학회’를 구성하여 연구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으나, 국문학 연구사를 조망하는 작업에서 이들의 활동과 연구 성과는 현재까지 그에 걸맞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연구 성과의 교류가 쉽지 않았던 현실과 함께, 일부의 연구 성과를 제외하고 이른바 ‘해방 공간’에서 활동했던 학자들의 성과물을 그동안 쉽게 접하기 힘들었다는 상황이 중요한 이유로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던 ‘우리어문학회’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무엇보다 그들이 남긴 연구 성과는 물론 활동 양상이 담긴 기록을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상황을 거듭 절감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의 대치 상황이 지속되면서, 학회 구성원들 가운데 일부가 북한에서 활동했다는 점이 학회의 활동 양상과 연구 성과를 거론하기 어렵게 만들었던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이와 함께 해방 이후 대학에 진학한 이른바 ‘해방 후 세대’가 주축이 된 ‘국어국문학회’가 1952년에 결성되면서, 이들에 의해 우리어문학회의 활동과 연구 성과들이 비판과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진 것도 또 다른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국어국문학회가 결성되면서 그 구성원들의 활발한 연구 활동을 통해 이후 국문학 연구를 주도하였고, 자연스럽게 연구자들의 세대교체가 이뤄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후속 세대들에 의해 우리어문학회의 활동과 성과들이 극복의 대상으로 지목되면서, 남아있던 사람들은 학회 재건의 꿈을 간직한 채 개인적으로 연구 활동을 지속하였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그동안 우리어문학회의 연구사적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들의 연구 성과를 꾸준하게 발굴하고 소개했던 연구자로서, 우리어문학회의 존재와 성격은 물론 구성원들의 연구 성과들도 초창기 국문학 연구사에서 충분히 다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들의 활동과 연구 성과를 진지하게 검토함으로써, 여전히 많은 부분 공백으로 남아있는 ‘해방공간’의 국문학 연구사에서 그 빈틈을 채워나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 연구 성과에 나타난 관점이나 자료의 한계가 명확하지만, 학회 구성원들이 공동 집필한 국문학사와 국문학개론은 출판 기록을 검토한 결과 같은 이름으로 출간된 최초의 문헌으로 확인되고 있다. 기관지인 어문 역시 3호 발간에 그쳤지만, 구성원들의 학문적 성과를 발표하여 동시대의 연구자들과 공유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이들에 의해 마련된 학문적 성과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연구사에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국문학 연구자로서 이들의 연구 성과와 그 의미를 따져 학계에 보고하는 역할을 자임하기로 한 것이다.
실상 우리어문학회의 활동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고 연구를 진행하게 된 계기는 학회 구성원이었던 고정옥의 연구 성과를 접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석사학위 논문의 주제를 사설시조에 관한 연구로 방향을 정하고,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고정옥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였다. 사설시조를 ‘장시조(長時調)’라고 명명하면서, 50수의 작품을 가려 뽑아 주석과 해석을 붙인 고정옥의 저서 고장시조선주(古長時調選註)는 사설시조 연구에 한 획을 그은 저서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선행 연구들에서 빈번하게 거론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논문을 쓰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이 자료를 직접 구해 읽는 일이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대학 도서관에서 앞부분 몇 장이 떨어져 나간 책을 복사할 수 있었고, 석사논문을 쓴 이후에 각 대학의 도서관의 자료를 검색하여 낙장(落張)이 없는 완전한 형태의 사본을 비로소 구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꾸준히 그의 연구 성과들을 수집하고 검토하면서, 고정옥이 한국전쟁의 와중에 북으로 간 이후에도 활발하게 연구 활동을 펼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80년대 후반 납·월북 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되기 이전에는, 고정옥을 비롯한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인용하거나 거론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한 현실적인 조건으로 인해 고정옥을 비롯한 우리어문학회의 연구 성과들을 접하기가 쉽지 않았으며, 자료상의 제약이 그들이 활동했던 시기의 국문학 연구사를 온전하게 조망할 수 없도록 만드는 요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자료를 입수한 후에 틈틈이 고장시조선주의 교주 작업을 진행해, 국문학 연구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교주 고장시조선주(보고사, 2005)를 출간하였다. 아울러 고정옥의 연구 성과들을 섭렵하면서, 그의 관심이 기층민중들의 양식이었던 민요(民謠)에서 비롯되어 고전시가를 비롯한 국문학 전반에 걸쳐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우리어문학회 구성원들이 함께 저술한 국문학개론의 총론에 해당하는 「국문학의 형태」라는 글은 국문학사의 흐름과 각 시기에 존재했던 갈래들의 연관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의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기관지인 어문(창간호)에 기고한 「인간성의 해방」은 다채롭게 변화하고 있던 조선 후기의 문학을 역사적 상황에 결부시켜 서술하였다. 고정옥의 문학관을 엿볼 수 있는 이 두 편의 글은 교주 고장시조선주를 출간하면서, 부록으로 소개한 바 있다. 이후 고정옥의 연구 성과들을 검토하면서, 자연스럽게 그가 속했던 우리어문학회의 존재와 연구 성과들로 관심을 넓혀갈 수 있었다.
이후 그가 집필했던 국문학 관련 연구 성과들을 꾸준히 수집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국문학 연구자로서 고정옥의 위치를 정립하는 몇 편의 논문들을 학계에 제출하였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집필했던 고정옥과 우리어문학회에 대한 연구의 성과들을 이제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세상에 선보이고자 한다. 고정옥을 비롯한 우리어문학회의 구성원들은 학회의 활동을 멈춘 이후에도, 꾸준하게 연구를 진행하여 남과 북에서 중요한 국문학적 성과물들을 제출하였다. 학회가 사실상의 해체 상태가 된 이후 구성원들의 연구 활동까지 추적하여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지만, 불가피하게 이 책에서는 우리어문학회 구성원으로서 활동했던 기간의 연구 성과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고정옥을 비롯하여 월북한 이들의 북에서의 활동 양상을 현재 상황에서 온전하게 파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며, 남쪽에 남아서 활동했던 구성원들의 이후 연구 성과들은 이미 국어국문학 연구사에서 충분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먼저 ‘고정옥과 국문학 연구’라는 제목의 1부에서는 월북 이전 고정옥의 생애와 연구 활동의 성과를 다룬 4편의 논문이 수록되었다. 앞서 서술했듯이, 고정옥의 관심은 민중들이 향유했던 민요에서부터 시작되어 사설시조와 국문학사 전반에 걸쳐 있다. 수록된 논문들을 통해 국문학 연구자로서 고정옥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어지는 2부에서는 ‘우리어문학회의 활동과 연구 성과’를 다룬 3편의 논문들을 수록하였다. 이 논문들을 통해서 학회 구성원들의 참여로 이뤄진 국문학사와 국문학개론 그리고 기관지 어문의 면모와 문학적 성과들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논문들을 통해서 독자들은 고정옥과 우리어문학회의 존재와 연구 성과들의 개략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은 시기를 달리하여 작성된 것이기에, 불가피하게 일부 겹치는 내용들이 여러 곳에 산재할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그동안 우리어문학회의 연구 성과물들을 접하기 쉽지 않았던 현실을 감안하여, 3부에서는 ‘자료편’이라는 항목으로 우리어문학회 기관지인 어문의 총목차와 ‘우리어문학회 일지’ 등 학회의 활동 양상을 개관할 수 있는 자료들을 수록하였다. 또한 기관지 어문에 실렸던 해방 이후 출간된 국어국문학 관계 목록은 물론, 서울대와 고려대 그리고 이화여대의 제1회 졸업생들의 졸업논문들의 이름과 졸업논문의 제목도 전재하였다. 이 자료들을 통해 해방 이후 국문학계의 활동 양상과 당시의 문화적 상황들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와 함께 해방 이후 최초로 ‘국문학사’라는 이름을 내걸고 출간했던 국문학사(수로사, 1948)의 전문을 그대로 수록하였는데, 이는 앞으로 국문학 연구사를 정리하면서 그 존재가 분명히 거론되기를 바라는 연구자로서의 희망을 담고 있다. 특히 이들 자료는 ‘맞춤법 통일안’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이전에 출간되었기에, 당시의 표기법을 그대로 제시하고 필요한 경우 간단한 주석만을 달았음을 밝혀둔다.
그동안 발표했던 논문들을 책으로 엮으면서, 오랫동안 고정옥과 우리어문학회의 연구 성과들과 씨름하면서 고민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 책의 출간으로 인해 우리어문학회의 존재와 그 성과들이 앞으로의 국문학 연구사에서 충분히 다뤄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무엇보다 교주 고장시조선주에 이어 이 책의 출간을 흔쾌히 수락하고, 책의 편집과 교정 과정에 까다로운 주문을 넉넉한 마음으로 수용해주신 보고사의 가족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내가 꾸준하게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은 가족들의 절대적인 응원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다. 여전히 옆에서 묵묵히 응원을 아끼지 않는 아내 심명선, 입대를 앞두고 조금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들 가은이는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한 존재들이다. 팔십 후반의 나이에도 새벽마다 운동을 다니시는 어머님께서도 건강을 유지하며, 오래도록 우리 옆에 계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빌어본다. 앞으로도 지치지 않고 묵묵히 연구할 수 있기를 다짐하며, 또 다른 연구 성과물로 독자들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22년 11월
순천 죽도봉 자락의 여중재(與衆齋)에서
김용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