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평론 >
디카시와 시적인 것
구모룡(문학평론가)
‘디카시’가 시(Poetry)의 하위 양식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 장르라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하나의 장르가 탄생한 셈인데 이를 장르로 존립하게 하는 색인(index)에 대한 검토가 계속되고 있다. 먼저 ‘사진시’(포토 포엠)와 비교하는 일이다. 이는 ‘그림시’와도 연관된다. 그림을 두고 시를 쓴 경우는 오랜 전통을 지닌다. 산수화나 문인화에 시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동아시아에서 문사적 관습에 해당한다. 사진이 나오면서 사진을 두고 시를 덧붙이는 일이 많아졌다. 이를 두고 ‘사진시’라고 명명하기도 하지만 ‘그림시’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두 장르의 만남에 가깝다. 서로 다른 장르의 만남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시와 음악, 이와 무용, 시와 연극, 시와 영화, 시와 건축의 만남도 있다. 이러한 만남은 서로 다른 장르의 텍스트에 대한 해석적 관계를 의미한다. 시의 입장에서 시적인 것으로 포괄하려는 과정이다. 만일 디카시가 이러한 만남과 다른 차원이라면 그에 대한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디카시는 무엇보다 디지털 기술에 기반한 디지털 사진의 등장으로 탄생한다. 디지털 사진과 시편(poem)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 논리를 따르면 디카시는 시와 사진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사진시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디카시를 하나의 장르로 성립하게 하는 바탕일까? 이는 순전히 달라진 기술 환경에서 찾아야 한다. 기존의 사진시가 필름으로 촬영한 사진을 먼저 두고 그에 대한 시편을 써 배치한 양식이라면 디카시는 디지털 사진이라는 현상과 분리되지 않는 시쓰기를 의미한다. 사실 이는 매우 복잡한 설명을 요구한다. 만일 사진을 먼저 찍어 놓고 그에 시를 덧붙인다면 기왕의 사진시가 지닌 해석행위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시차와 거리의 문제는 두 양식의 대비에서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표현 주체도 사진시의 경우에 서로 다를 수 있지만 디카시는 동일하다는 차이가 있다. 워커 에번스나 도로시아 랭, 로버트 프랭크와 최민식의 사진에서 우리는 여전히 시적 감흥을 얻는다. 이를 시로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디카시는 이러한 차원과 전혀 다르다.
디지털 혁명은 발터 벤야민이 말한 대로 복제 기술이 예술의 민주화를 불어온 변화를 보다 넓게 말할 수 있게 한다. 누구나 디지털카메라를 소유하게 되었고 일상이나 여행에서 즉각적으로 사물을 포착할 수 있다. 본디 중간 예술에 해당하고 일부의 작가가 예술로 승격한 장르가 사진이다. 다큐멘터리와 예술을 놓고 오랜 논쟁을 이어가고 있기도 하다. 빛의 조작에 더하여 기술적 조작이 커진 예술 사진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여전히 기록적 가치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이러한 가운데 디지털 사진은 사진의 대중화를 불어왔다. 전문 작가의 권위가 낮아지면서 일반 대중의 참여가 활발한데, 주지하듯이 디카시는 이러한 디지털 기술 환경 속에서 부상한 민주적 장르이다. 따라서 그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다고 하겠다.
앞서 언급한 대로 디카시는 사진을 찍는 과정과 시를 쓰는 과정이 분리되지 않는 현상의 산물이다. 이는 한편 창작의 과정으로, 다른 한편 의식 현상학으로 해명해야 할 문제이다. 쉽게 설명하면 누군가 사물을 만나면서 그 사물을 사진으로 재현하는 동시에 시편으로 표현하는 과정이다. 발견이라는 행위가 먼저인데 이는 시적인 훈련이 있는 이에게 가능한 법이다. 가령 영화 『패터슨』의 주인공 패터슨처럼 일상 속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하고 시적 언어를 건져내는 능력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적 능력은 보편적이지 않다. 그래서 디카시는 먼저 전문 시인의 소산이다. 사물에 감응하며 시적 언어를 건져 올리는 데 익숙한 이들의 작업인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디카시가 시적 후퇴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다. 그동안 시는 즉각적인 감정의 토로나 즉물적인 이미지의 재현을 경계해 왔다. 내면에서 숙성한 정서나 사물과 상호 교응하는 정동을 표현하기를 권유하였다. 아울러 메마른 이미지의 조합보다 유기적인 이미지의 결합을 강조하였다. 나아가서 수준 높은 언어의 연금술을 추구하였다. 이같은 현대시의 성취와 지향에 비추어 디카시가 시의 하락을 불러올 수 있다는 염려를 불식하기 어렵다. 디카시에 동참하는 시인은 자신의 기왕의 시 세계와 디카시를 애써 분리하려 하며, 새로운 장르로서의 디카시와 시 대중화의 방편으로서의 디카시라는 두 가지 의의를 부각하려 한다. 이러한 지점이 디카시의 아슬아슬한 국면이다. 전문성의 관점에서 하락으로 비칠 수 있고 대중성의 관점에서 확산으로 간주된다. 전자의 입장에 선 시인이 디카시를 비판하는 일은 타당하다. 또한 후자의 입장에 선 시인이 디카시를 옹호하는 일도 타당하다. 이처럼 애매한 국면은 디카시를 전문성과 대중성으로 설명하는 일의 한계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새로운 장르로서의 위상과 그 효용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요긴하다.
새로운 장르로서의 디카시는 창작 방법의 측면과 대중성의 측면에서 논의를 더 진전시켜야 한다. 전자의 경우 시적인 것의 발견이 사진과 언어라는 서로 다른 두 미디어가 동시에 연합하는 의식의 과정이다. 대개 일반적인 현실에서 사진은 시선의 권력에서 놓여나기 쉽지 않다. 풍경의 수집이나 기억의 보존을 위한 행위와 이를 전시하려는 욕구가 디지털 시대의 대중이 견지한 디지털 사진이다. 셀카가 말하듯이 외부의 사물과 풍경을 주체로 회수하는 나르시시즘이 만연하다. 무엇보다 디카시는 나르시시즘적 주체와 다른 시적 주체를 설정하는 일을 전제해야 한다. 디지털 기술이 깔아놓은 즉각적 작동의 기술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주체의 형성을 가로막는다. 기술에 내재한 권력과 공격성은 대상을 지배한다. 그래서 디카시는 기술에 내재한 힘의 벡터를 극복하는 지향을 중요한 색인으로 삼아야 한다. 이는 사물과 풍경의 발견이 서로 감응하는 과정일 때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시적인 마음의 상태가 먼저다. 디카시가 아직 기성 시인의 산물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물과 만나면서 시상을 떠올리고 이를 디지털카메라에 담으면서 시화하는 과정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물을 생동하는 물질로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있어야 하고 이를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낯섦과 기이함을 추종할 가능성이 커진다. 시에 있어서 요구하는 낯설게 하기는 인식의 문제이다. 이러한 인식이 언어의 쇄신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기상(conceit)을 경계하는 까닭은 인식의 결여에서 비롯한다. 마찬가지로 디카시에 대한 지나친 열망이 예외적인 장면을 설익은 언어로 표현하거나 성급한 아포리즘을 구성하는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일반 대중이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두고서 나중에 이에 대한 시편을 조합하였을 때에 이를 판별할 방법이 없다는 점도 중요한 비판 지점이다. 이러한 일은 사진시의 창작 방법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창작자의 양심의 문제로 남겨질 뿐인데, 사진과 시의 동시성이라는 디카시의 장르 색인은 그만큼 애매하고 힘든 위치에 있다. 하지만 감응과 사진 이미지와 시의 동시적 구성은 디카시가 반드시 지켜야 할 장르 준칙이라 하겠다.
디카시의 장르적 특성은 어떤 의미에서 운동성을 지닌다. 먼저 앞서 말했듯이 기술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나르시시즘의 주체를 극복하는 일이다. 시선의 권력으로 사물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는 데서 탈피하여 사물의 생동하는 물질성을 자기 안으로 품고 연결해야 한다. 즉 사물들의 우주 속으로 나아가서 하나가 된다. 이를 나는 다른 글에서 제유(synecdoche)라고 규정한 바 있다. 환유의 한 부분인 사진에 은유적 마음을 결합할 때 제유의 우주와 만난다. 물론 모든 디카시가 이러한 지향을 당위로 삼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디카시를 통하여 현대에 내재한 폭력을 이겨내는 가치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다음으로 디카시의 운동성은 일상에서 생성하는 의미를 찾는 데서 발현한다. 사진이 ‘결정적 순간’(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을 포착하려 한다면 디카시는 일상적 순간을 포획한다. 여기서 포획은 지배를 의미하지 않으며 의미의 생성(들뢰즈)을 뜻한다. 달리 표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다. 표현은 안에서 밖으로 의미를 만드는 능동적 행위이다. 그렇지만 이는 일방의 지평을 지향하지 않는다. 사물과의 감응을 통하여 상호작용한다. 따라서 디카시의 주체가 소우주가 되어 대우주에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주체는 자기를 배려하는 주체이다. 자기가 사는 세계로부터 유배된 삶, 소위의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세계의 생성에 참여하고 화육하는 주체이다. 이를 달리 예술로서의 삶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적어도 디카시는 이와 같은 삶을 중요한 지평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디카시의 운동성은 달리 대중성이다. 그래서 디카시의 가치와 의의를 수직적인 평가체계에 두지 않아야 한다. 그럴 가능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다. 디카시는 수평적인 예술 운동이다. 대중이 디카시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의식과 존재의 전이를 이룬다면 이야말로 디카시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 된다. 디지털 혁명이 이러한 가능성을 열고 있다.
예술과 기술이 근대에 와서 분리되면서 예술은 순수예술(fine arts)로 존립하였다. 디지털 기술이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결합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디카시도 이러한 양상 가운데 하나인데 시각 중심의 근대적 감각 체계를 극복한다는 의도를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비록 시지각에 기초한다고 하더라도 공감각을 불러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단지 기술적 조작이나 유희에 그치지 않기 위하여 디카시를 쓰려는 대중의 시적 감수성과 시적 능력을 배양하는 일이 병행되어야 한다. 디카시는 추상화된 시각의 문화를 다양한 감각의 지각으로 구체화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것(cocrete)은 함께 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포착한 사진에 보이지 않는 바람과 향기를 시어로 표출할 때 디카시의 확장은 성취된다. 이는 의식의 문제이자 지각의 문제이다. 무엇보다 시적인 것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시적인 것은 도처에 있고 삼라만상 속에 있다. 구체적인 삶 속에 시적인 것은 끊임없이 빛을 발한다. 압도적인 현실의 무게에 눌려 그 미미한 빛이 겨우 새어 나올 뿐이다. 이를 찾아서 표현하는 행위의 주체는 삶을 쇄신하고 세계를 변화시킨다. 디카시가 이러한 운동성을 구체화할 때 그 장르적 위상이 확고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구모룡 문학평론가
비평집 『폐허의 푸른빛-비평의 원근법』 외 다수
제31회 팔봉비평문학상 수상
현재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