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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피아노를 입고 걸었다
햇빛이 쏟아지는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다. 고음의 크락션이 뒤통수를 때렸다. 이유 없이
은행잎이 떨어지고.
마음에서 구린 음音들이 굴렀다.
이탈된 소리는 상처받은 산역꾼처럼 몸속 깊숙이 구덩이를 파고 닿지 않은 먼 이야기라도
묻고 있는 듯 웅웅거렸다.
녹슨 자전거 바퀴에서 구르는 지상의 소리들은
공평하지 않았다.
낮은 도에서 높은 도道에 이르는 길은 순탄치 않았고. 우리는 불협화음을 정당화하면서
길을 건너고 있었다. 헐렁한 티셔츠 위에 그려진 피아노가 접혔다.
펴진다.
나는 언제 한번 공작의 꼬리처럼 실컷 펼쳐진 적이 있었나. 누르고 외면한 채, 밀어 넣은
소리들은 내부에서 뭉쳐지고 굳어져 갔다. 아름다운 선율 같은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프린트된 건반을 입고 올라가던 계단은 고장 난 자신을 알 수 없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어긋난 뼈들이 부딪히는 소리만 요란할 뿐.
꼬리 아홉 개 달린 화음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우리는 한 옥타브의 구름 아래를 걷고 있었고.
절반의 주파수에 닿을 뿐이었다.
히잡을 쓴 자매들처럼
서른 개의 밤을 지나 한 뭉치의 어둠처럼
까마귀가 울면
나는 퇴고의 방식으로 죄책감을 읽는다 동그랗게 감싼 창밖, 피어난 얼굴 속에서
개입할 수 없는 모종의 슬픔이 피어오른다
첫 페이지는 늪이고 목차는 계속 늘어만 갔다
귓속에서 자라는 빨간 토끼는 거짓말을 먹고 살이 찌고 얼룩무늬 반점으로 물들며
음매 울기도 했다
서른 개의 모래톱이 서른 개의 등을 쓸어내리는 동안
나는 천을 덮어쓴 밤의 숲처럼 조용해진다 나와 같은 자매들이 빽빽하게 들어차면
우리의 그림자는 북쪽으로 길어지고
폐쇄적인 문장들은 쓸데없이 죄를 길러내고 있었다
불순종의 나팔을 불어봐 탐스러운 머리채를 드러내고 헤드뱅뱅 바람 따라 휘어지는
나무들처럼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머리부터 발목까지 늘어뜨린 여러 장의 천들이 내 곁을 스쳐지나간다 나는 얼굴만
동동 떠가는 밤의 창들을 찢고 압사 직전의 육체들을 꺼내고 싶어진다
순전하다고 믿는 자매들의 꿈속 깊이
손을 넣고
불경스러운 나를
편협한 검은 천의 세계를
<대표작>
친밀한 타인
꼬치 전을 만들었다 명절이므로 길고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대파를 끼우고 햄을 끼우고 대파를 끼우고 맛살을 끼우고 대파를 끼우고 느타리버섯을 끼우고 커튼처럼 길게 늘어뜨린 나뭇가지에 노을이 끼워지고, 모퉁이 뒤 빨간 지붕이 끼워진 채 나란히 앉아 텅 빈 아버지 옆에 엄마, 사이에 오빠와 나 옆에 동생들이 한 나뭇가지에 끼워져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허옇게 흩날리며 미끄러지다, 계란 물에 몸을 적시고 눈물 콧물 흘리며 뜨거운 후라이팬 위에서 지글지글, 징글징글 가늘고 얇은 나뭇가지 하나 벗어나지 못한 채 한 줄에 꿰어 비좁은 옆을 탓하고 수상한 냄새를 역겨워하며, 꿰뚫어진 서로를 증오하다 소식을 끊고 꼬치가 익어갈 즈음 한 줄이었음을 깨닫고, 한 줄을 원망하며 대파 다음 햄, 대파 다음 맛살처럼 텅 빈 아버지 옆에 엄마, 사이에 오빠와 나 옆에 동생들이 가늘고 얇은 가지에 꿰어진 채 지글지글 징글징글
오늘의 운세
서쪽방향에서 불어오는 푸른눈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계단 끝을 오르는 능소화는 컨디션이 좋아 보여 오늘의 향기를 얻기에 충분합니다 지나치게 우아한 구름은 피하시는 게 상책입니다 컹컹 짖는 개는 당신의 조력자이므로 두려워 마시고 좋은 관계가 되도록 노력 하는 게 좋습니다 바람결에 들리는 애인의 소문과는 자중자애 하십시오 옳다고 생각되는 교집합은 강하게 밀어 붙이고 섣부르게 핀 장미의 입술은 멀리 하시는 게 좋는습니다 꿈을 싣고 오는 발소리는 좋은 결과를 가져 옵니다 물방울처럼 흘러내리는 맹독의 혀에 귀를 기울이고 배려심을 보이십시오 의심이 들어있는 햇빛과 빨간 우체통은 어수선한 기운이 돌지만 뜻밖의 횡재로 돌아서기도 합니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톱을 물어뜯는 것은 불필요한 갈등입니다 만나는 사람에게 분홍빛이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변덕스러운 고양이에게는 마음을 투자하지 마십시오 붉은 스커트를 입고 초록린넨 머플러를 두르고 스카이 미용실로 가십시오 귀인을 닮은 가위가 당신의 불길한 기운들을 싹둑 잘라낼 것입니다
오늘도
핏빛 노을 한 장 문서처럼 쥐게 되실 운입니다
하리잔
가꾸는 사람이 없으므로 잡초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반기지 않는 손님처럼 버려진 공간에 들어서서 조용히 눈감고 귀 막고 공간을 차지한 후,
공간을 소비 할 뿐 꽃밭의 주인이 아니고 채소밭의 주인이 아닌
쓸모 있는 것들 사이에서 쓸모없다 여겨지는 그들은
시끄럽지 않게 발을 뻗고 입을 늘리고 소리 소문 없이 번져가는 힘으로 옆을 장악하고 꽃과
채소를 무너뜨리려는 생각 없이 그냥 살아감으로
무성해지고
불어나는 것일 뿐
태어날 때부터 마땅히 뽑아버려야 할 대상으로 낙인찍혀 나쁜피라 불리며 피를 뽑기 위해
허리를 구부린 사람들의 피가 거꾸로 쏠릴 때까지 밟혀도 아프지 않은 척
시퍼렇게 웃으며
집요하게 불어오는 바람의 근성으로
논밭 둑 멀리 강둑 위로 내 던져질지라도
모두가 잠든 밤
달 속으로 깊이 뿌리를 뻗으며
눈치껏 어이없이 아연하게 자라나는
신의 자식들처럼
흘깃거리며 쏟아지는 비난과 무시의 힘으로, 진압하려는 사람들보다 앞서 번지는 들불처럼
최후의 노래처럼
회전하는 그들은
우리는
<약력>
채수옥 시인
2002년 『실천문학』 등단
시집 『오렌지는 슬픔이 아니고』 『덮어놓고 웃었다』 외
‘나’와 ‘하리잔’과 ‘히잡을 쓴 자매들’.
-채수옥 론
임지훈
잡초. 산과 들에 퍼져 자생하는 풀들의 총칭. 인간에 의해 재배되지 않으며 어떤 유용성도 갖지 못하는 식물을 가리키는 말. 그러니까, 잡초는 사실 특정한 풀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에게 어떠한 유용성도 제공하지 않는 ‘무용한 것들’을 가리킨다. 무용할 뿐이라면 다행일까. 경작을 하는 입장에서 잡초는 경작물에게 가야 할 영양분을 빼앗는 방해물로 여겨지기에 제초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잡초는 특정한 무언가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인간에 의해 판단 내려진, 다만 살아가고 있을 따름인 존재다.
그러므로 잡초란 그 자체로 하나의 비유이다. 어떤 특정한 존재와 그 존재를 중심으로 하는 구조, 그러한 구조의 유지를 위해 억압되고 예외화 되는 X가 있어야 한다는 비유. 이건 단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의 구조 자체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예컨대 나치 독일과 유대인, 백인 사회의 유색인종, 일제 치하의 이등국민, 단일 민족 사이의 이민족들, 비장애인 사이의 장애인, 두눈박이들 사이의 외눈박이 등등. 각각의 사회에서 소수자에 위치하는 존재들이 존재 그 자체가 억압되어야 할 대상으로 처리되고 악마화되는 사례를 이처럼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이것이 단지 특정 시대, 특정 국가에서의 문제일까?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건 특정한 시공간에 한정되어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이며 국가의 구조이며 공동체의 구조이다. 최소한의 공동체인 가족에서부터 인류라는 전체에 이르기까지 구조는 반복된다. 심지어, 둘 만의 공동체인 연인 관계에서도 이와 같은 구조는 반복될 수 있다. 그 경우 잡초는 인간 존재 자체이거나, 혹은 인격이라는 한 사람의 중핵이 위치하기도 한다.
가꾸는 사람이 없으므로 잡초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반기지 않는 손님처럼 버려진 공간에 들어서서 조용히 눈감고 귀 막고 공간을 차지한 후, 공간을 소비 할 뿐 꽃밭의 주인이 아니고 채소밭의 주인이 아닌
쓸모 있는 것들 사이에서 쓸모없다 여겨지는 그들은
시끄럽지 않게 발을 뻗고 입을 늘리고 소리 소문 없이 번져가는 힘으로 옆을 장악하고 꽃과 채소를 무너뜨리려는 생각 없이 그냥 살아감으로
무성해지고
불어나는 것일 뿐
태어날 때부터 마땅히 뽑아버려야 할 대상으로 낙인찍혀 나쁜피라 불리며 피를 뽑기 위해 허리를 구부린 사람들의 피가 거꾸로 쏠릴 때까지 밟혀도 아프지 않은 척
시퍼렇게 웃으며
집요하게 불어오는 바람의 근성으로
논밭 둑 멀리 강둑 위로 내 던져질지라도
모두가 잠든 밤
달 속으로 깊이 뿌리를 뻗으며
눈치껏 어이없이 아연하게 자라나는
신의 자식들처럼
흘깃거리며 쏟아지는 비난과 무시의 힘으로, 진압하려는 사람들 보다 앞서 번지는 들불처럼 최후의 노래처럼
회전하는 그들은
우리는
- 「하리잔」, 전문.
따라서 한 시적 화자가 스스로를 잡초라 자각한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자기비하를 위한 비유로 기각되어선 안 된다. 여기에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조에 대한 전제가, 그리고 그러한 구조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억압되어야 하는 대상의 지위에 속해 있다는 자각이 전제되어 있다. 일종의 이중의 자각으로서, 자신이 속한 시공간에 대한 객관적인 통찰과 그 속에 속한 ‘나’의 위치와 위상에 대한 주관적인 존재론적 통찰이 함께한다. 채수옥의 시가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나’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한 비극적인 자각에는 한 사회체가 구성되기 위해 억압되어야 하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구조적 통찰이 배음으로 흐르고 있다. 그와 같은 통찰은 시의 내용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러한 통찰이 일종의 존재론적 통찰로 더욱 살아나게 하는 것은 「하리잔」이라는 특수한 기표를 통해서이다. 본래 카스트 제도의 한 계급인 이것은, 다음의 시를 통해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지는 동시에 확장되는 것으로 보인다.
서른 개의 밤을 지나 한 뭉치의 어둠처럼
까마귀가 울면
나는 퇴고의 방식으로 죄책감을 읽는다 동그랗게 감싼 창밖, 피어난 얼굴 속에서 개입할 수 없는 모종의 슬픔이 피어오른다
첫 페이지는 늪이고 목차는 계속 늘어만 갔다
귓속에서 자라는 빨간 토끼는 거짓말을 먹고 살이 찌고 얼룩무늬 반점으로 물들며 음매 울기도 했다
서른 개의 모래톱이 서른 개의 등을 쓸어내리는 동안
나는 천을 덮어 쓴 밤의 숲처럼 조용해진다 나와 같은 자매들이 빽빽하게 들어차면 우리의 그림자는 북쪽으로 길어지고
폐쇄적인 문장들은 쓸데없이 죄를 길러내고 있었다
불순종의 나팔을 불어봐 탐스러운 머리채를 드러내고 헤드뱅뱅 바람 따라 휘어지는 나무들처럼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머리부터 발목까지 늘어뜨린 여러 장의 천들이 내 곁을 스쳐지나간다 나는 얼굴만 동동 떠가는 밤의 창들을 찢고 압사 직전의 육체들을 꺼내고 싶어진다
순전하다고 믿는 자매들의 꿈속 깊이
손을 넣고
불경스러운 나를
편협한 검은 천의 세계를
- 「히잡을 쓴 자매들처럼」, 전문.
‘하리잔’. 본디 불가촉천민을 뜻하는 이 단어는 제도 밖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가리킨다. 분명 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으나, 상징계적 의미에서는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대상들이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몸이 어딘가에 닿아서도 안 되며 누군가의 눈에 띄어서도 안 되는, 존재 자체가 늘 부정하게 여겨지는 자들이다. 이들에 대해 사회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 모습을 드러내지 말며 스스로를 부정하게 여기라는 동시에 길거리 청소나 시체 처리, 도축, 오물 처리 등 사회의 가장 낮은 노동을 강제한다. 예컨대 카스트 제도 내에서, 이들은 불경하고 부정한, 사라져야 할 존재인 동시에 그와 같은 제도가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 할 필수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존재는 앞서의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특정한 시공간에 한정되어 나타나는 존재가 아니다. 각각의 사회 구조는 구조의 구성과 성립, 유지를 위해 그와 같은 지점을 늘 함축하고 있다. 「히잡을 쓴 자매들처럼」에서, 채수옥의 통찰이 한결 선명해지고 확장된다고 표현한 것은 이 때문이다. 위의 시에서 화자인 ‘나’는 “천을 덮어 쓴 밤의 숲처럼”이라는 직유를 통해, 한 문화권에서 비가시화되어야 하는 특정한 존재로서의 ‘여성’을 자처한다. 그와 같은 비유가 단지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한 동정 내지는 연민이 아닌 까닭은 ‘나’가 그러한 존재의 비의를 “퇴고의 방식으로”, 하나의 죄책감으로써, “개입할 수 없는 모종의 슬픔”으로써 자각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그들의 슬픔에 대해 ‘말하는’ 대신, “나와 같은 자매들”이라며 스스로를 그들 가운데 하나로 위치시킨다. 그들과 나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면서, 동시에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동일한 고통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나쁜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햇빛이 쏟아지는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다. 고음의 크락션이 뒤통수를 때렸다. 이유 없이 은행잎이 떨어지고.
마음에서 구린 음音들이 굴렀다.
이탈된 소리는 상처받은 산역꾼처럼 몸 속 깊숙이 구덩이를 파고 닿지 않은 먼 이야기라도 묻고 있는 듯 웅웅거렸다.
녹슨 자전거 바퀴에서 구르는 지상의 소리들은
공평하지 않았다.
낮은 도에서 높은 도道에 이르는 길은 순탄치 않았고. 우리는 불협화음을 정당화하면서 길을 건너고 있었다. 헐렁한 티셔츠 위에 그려진 피아노가 접혔다.
펴진다.
나는 언제 한번 공작의 꼬리처럼 실컷 펼쳐진 적이 있었나. 누르고 외면한 채, 밀어 넣은 소리들은 내부에서 뭉쳐지고 굳어져 갔다. 아름다운 선율 같은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프린트 된 건반을 입고 올라가던 계단은 고장 난 자신을 알 수 없었다. 한 걸음 내 딛을 때마다 어긋난 뼈들이 부딪히는 소리만 요란 할 뿐.
꼬리 아홉 개 달린 화음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우리는 한 옥타브의 구름 아래를 걷고 있었고.
절반의 주파수에 닿을 뿐이었다.
- 「피아노를 입고 걸었다」, 전문.
채수옥의 시가 화자의 정서적 통증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타 일반의 시와 차별화되는 것은 이처럼 그 이면에 구조론적 통찰과 존재론적 통찰이 배음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통찰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이번 신작시에서도 여전하며, 오히려 더욱 강렬하고 날카롭게 벼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햇빛이 쏟아지는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을 뿐인 화자를 덮쳐오는 금기와 금지의 소음들 속에서, 화자는 자신의 몸을 한껏 움츠린다. “나는 언제 한번 공작의 꼬리처럼 실컷 펼쳐진 적이 있었나. 누르고 외면한 채, 밀어 넣은 소리들은 내부에서 뭉쳐지고 굳어져 갔다. 아름다운 선율 같은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화자의 속내 속에서, ‘나’의 자리는 더 이상 단수가 아니다.
그곳에는 ‘하리잔’과 ‘히잡’을 쓴 여성들이 겹쳐져 있다. 존재론적 슬픔, 그러나 더 이상 ‘단수’가 아닌 존재의 슬픔에 대한 토로는 그 자체로 강력한 선율이자 “불순종의 나팔”이 된다. 사회의 선율로부터 이탈할 수밖에 없는 소리들이 모여, 아름답지 않은 선율을 만들 때, 이것을 소음이라 말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그리하여 누군가를 향해 ‘잡초’라 지칭하는 것은 누구인가. ‘너’를 하리잔이라 명명한 자는 누구인가. ‘너’에게 히잡을 씌운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아름답지 않은, “어긋난 뼈들이 부딪히는” 불협의 화음은 그것을 묻고, 그것을 찢는다. 아마도 이 선율은 낮고 느리게, 그러나 오래도록 문학 속에서 울려 펴질 것이다.
임지훈
2020년 서울신문,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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