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성주들의 지방민에게 조세(租稅)와 역역(力役) 부과로 중앙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중앙정부는 주・군에 대하여 조세를 독촉하기에 이르렀고 중앙정부와 지방성주들로부터 이중으로 부담을 지게되어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들은 부랑하거나 호족에 의탁하거나 초적이 되어 재물을 약탈하기도 하였고 초적들은 이합집산을 하면서 보다 큰 초적으로 형성되어 국가권력을 잡으려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농민반란은 정치의 부패, 지배층의 불법적인 농토 확대, 가혹한 수탈, 부패․무능한 신라 왕실에 대한 불만 고조의 결과로서 반란의 첫 봉화는 진성여왕 3년 889년 사벌주(沙伐州, 상주)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였고 이어서 죽주(竹州, 안성 죽산)에서 기훤(箕萱), 북원(北原, 원주)에서 양길(梁吉), 완산주(完山主, 전주)에서 견훤(甄萱)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진성여왕 10년 896년에는 붉은 바지를 입은 적고적(赤袴賊)이 서해안지방에서 일어나 경주외곽까지 자격했으나 국가를 세울만한 경륜과 지도력은 없었다.
사벌주(沙伐州, 상주)의 원종(元宗)・애노(哀奴)의 난 진성여왕 3년 889년
북원(北原, 원주)의 양길(梁吉)
죽주(竹州, 안성 죽산)의 기훤(箕萱)
완산주(完山主, 전주)의 견훤(甄萱)
철원의 양길의 부하 궁예(弓裔)
나. 후삼국의 성립
⑴ 후백제(後百濟)의 건국(900)
견훤(甄萱, 867~936)은 상주호족 아자개(阿慈介,阿慈个,阿字蓋 또는 원선(元善))와 무진주(武珍州, 光州) 호족의 딸 사이에 태어나 군인으로 출세하여 농민세력을 규합하여 진성여왕 3년 889년 무진주 점령하고 진성여왕 6년 892년 왕을 자칭했으며 6두품출신 유학자 최승우(崔承祐)를 책사로 세우고 백제유민의 반신라감정을 이용하여 의자왕(義慈王)의 효공왕 4년 900년 완산주(전주) 점령하고 자신이 거느린 군사와 전라도 지역의 호족 세력을 토대로 완산주(全州)에서 후백제를 세웠다. 견훤은 군인세력을 배경으로 호족세력과 연합하여 세력을 키워서 전라도와 충청도의 대부분 지역 차지하고 있었다. 견훤은 미륵신앙에 근거한 전제군로서 행세하였다. 견훤은 55대 경애왕(景哀王) 4년 927년 경주를 공격하여 포석정(鮑石亭)에서 놀고 있는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김부(金傅)를 경순왕(敬順王)으로 내세웠다.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하자 935년 큰아들 신검(神劍)은 금강을 죽이고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하였다, 견훤은 감사가 소홀한 틈에 도주하여 왕건에게 귀의하자 왕건은 견훤을 상보(尙父)로 모시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⑵ 후고구려(後高句麗)의 건국(901)
삼국사기' 궁예전에 의하면 아버지가 신라 제47대 왕 헌안왕(재위 857~860년) 또는 제48대 왕 경문왕(861~875년)인 왕자 출신 궁예(弓裔)는 891년 죽주(竹州, 죽산)에 웅거한 기훤(箕萱) 밑으로 들어가 있다가 다시 892년 양길(梁吉)에게 의탁하여 있다가 나성(奈城, 영월), 명주(溟州, 강릉), 철원(鐵原), 패서(浿西, 황해도) 일대를 공략하여 중부 일대를 장악하면서 세력을 키우고 책사 종간(宗侃)을 얻어 899년(효공왕 3년) 국원(國原, 충주)을 비롯한 30여 성(城)의 강병(强兵)을 이끈 양길과 회전에서 선제공격으로 양길을 제압하여 이후 충청도 지역은 대부분 궁예의 세력권이 되었고 고구려 부흥을 기치로 효공왕 5년 901년 송악에서 후고구려국을 건설하였다. 이후 국호를 904년 마진(摩震)으로 연호를 무태(武泰), 905년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고 연호를 성책(聖冊)으로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 914년 연호를 정개(政開)라고 하면서 반신라 정책 강화와 통일 정책을 추진하였다.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고 한 것은 신라의 금덕(金德)이 끝나고 수덕(水德)이 만세토록 이어진다는 5행의 상생사상(相生思想)이 담겨있다고 한다. 궁예는 광평성(廣評省. 장관 시중), 병부(兵部), 대룡부(대룡부, 창부), 수춘부(壽春部, 예부) 등 관부를 두고 정광(正匡)을 비롯한 9관등을 설정하여 국가면모를 갖추었다.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彌勒佛)이라 하고 아들은 보살(菩薩)이라 하면서 전제군주로서 폭군행세를 하다가 신하들에게서 쫒겨났다.
연도 | 국호 | 수도 | 연호 |
901년 | 후고구려(後高句麗) | 송악(松嶽) | |
904년 | 마진(痲疹) | | 무태(武泰) |
905년 | | 철원(鐵原) | 성책(聖冊) |
911년 | 태봉(泰封) | | 수덕만세(水德萬歲) |
914년 | | | 정개(政開) |
⑶ 신라의 위축
신라는 후3국의 정립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2.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의 통일
가. 고려 건국
후고구려(後高句麗, 904년 마진(摩震), 911년 태봉(泰封)으로 개칭)를 세운 궁예는 점차 자신을 미륵불(彌勒佛)이라 하고 아들은 보살(菩薩)이라 하면서 폭군행세를 하다가 신라 54대 경명왕 2년 918년 신숭겸, 홍유, 복지겸, 배현경 등의 추대를 받아 시중(侍中) 왕건(王建)이 왕위에 오르고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했다. 다음해인 919년 왕건은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松岳)으로 옮겼다.
고려 왕건은 지방 호족 세력에 대한 우대정책을 쓰고 신라에 대해 우호적 자세를 취하였다. 그리고 926년 거란(契丹, 916~1125)에 의해 발해가 멸망하자 발해 유민들을 받아 들이고 발해왕자 대광현(大光顯)에게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주고 종적에 편입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나. 후백제와 신라
후백제는 왕위 계승을 두고 분열했다. 935년 견훤(甄萱)은 4자인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장남 신검(神劍)은 동생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김제 금산사에 가두자 견훤은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하여 왕건의 상보(尙父)가 되고 양주를 식읍으로 받았다.
신라의 마지막왕 56대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는 경순왕 9년 태조 18년 935년 고려에 귀부(歸附)하고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이 되었고 다음해인 936년 신검의 후백제와의 선산(일리천, 一利川) 전투에서 승리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태조 10년 927년 공산(대구팔공산) 전투에서 신숭겸, 김락 전사
태조 13년 930년 고창(안동)전투에서 후백제군 격파(차전놀이 유래)
태조 14년 934년 운주(홍성)전투에서 후배제군 격파
태조 18년 후백제 견훤 귀순, 신라 경순왕 귀부로 신라멸망
태조 19년 선산(일리천, 一利川) 전투에서 승리하여 후백제 멸망으로 후삼국 통일
다. 왕건의 후삼국통일 요인
⑴ 고대적 수취체제의 모순시정
⑵ 새로운 사회상 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