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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양란의 극복
1. 왜란
가. 왜란전의 상황
조선은 군역제의 모순으로 군사동원체제가 무너져 있었고 1590. 3~1591.1 일본에 통신사로 정사 황윤길(黃允吉, 서인)과 부사 김성일(金誠一, 동인), 서장관 허성(許筬, 동인)을 파견했으나 동서분당으로 일본에 대한 조정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일본은 1587년 전국시대의 혼란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 수습하여 전국을 통일하고 다이묘(大名, 지방의 영토를 다스리는 영주)들의 관심을 대외로 돌리고자 하였다.
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분로쿠의 역(文?の役, ぶんろくのえき))
⑴ 정명가도 요구와 거절
일본은 조선에 정명가도(征明假道)(명나라 정복에 조선이 앞장서도록 명령하는 정명향도(征明嚮導)와 사신들과 선봉 장수들이 정명가도(征明假道) 또는 가도입명(假道入明))를 요구했으며 조선은 이를 거절했다.
⑵ 부산상륙
1592년 선조(1567~1608) 25년 4월 13일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키고 부산에 상륙하여 부산첨절제사 정발(鄭撥)과 부장 이일운과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을 전사사키고 서울을 향해 북상하였다,
⑶ 이일(이일) 상주 패주
조정에서는 이일(李鎰)을 순변사, 함응대와 조경을 좌우방어사, 류극량과 변기를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과 조령을 지키게 했으나 상주에서 300명의 군사들은 흩어지고 이일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주하였다.
⑷ 신립(申砬)의 충주 패배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은 종사관 김여물의 조령에 진을 치자는 의견을 물리치고 탄금대의 금강상류를 등지는 배수진을 쳤으나 코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에게 패배하였다.
⑸ 선조의 피난과 근왕병 모집
신립마저 패하자 선조는 군무를 광해군에게 맡기고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하고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게 하였으나 모병에 응하는 자도 없었고 두 왕자는 일본의 포로로 잡혔다.
⑹ 왜군의 서울 입성
왜군은 부산에 상륙한지 20일도 못되어 서울에 입성했고 평양까지 진출하여 조선은 개전초 2달 동안 참패를 거듭했으나 그 후로는 우위를 점하였다. 이여송(李如松)이 거느린 명의 원군 5만이 도착하여 평양을 탈환하고 추격하던 중 벽제관에서 패배한 명군은 평양으로 패퇴하였다.
송응창(宋應昌), 진린(陳璘), 이여송(李如松), 양호(楊鎬)
⑺ 이순신과 수군의 활약
일본은 수군을 통해 물자를 조달하면서 유군과 함께 북진하는 작전을 구상했으나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지키고 일본의 작전을 좌절시켰다.
주요 해전
1592.4.13 | 임진왜란 발발 |
1592.5.7 | 옥포해전 |
1592.5. 29 | 사천 해전(거북선 첫 등장) |
1592.6.5 | 당포해전 |
1592.6.7 | 율포해전 |
1592.7.8 | 한산도대첩 |
1592.7.10 | 안골포해전 |
1592.9.1 | 부산포해전 |
1594.3.4 | 당항포해전 |
1594.9.29 | 장문포해전 |
1597.1 | 정유재란 발발 |
1597.9.16 | 명량(울돌목)대철 |
1598.11.19 | 노량대첩 |
⑻ 의병 항쟁
① 의병
자발적인 의용군인 무장부대이며 정부의 모병에는 소극적이었으나 스스로 향토방위를 위해 지방에 사는 양반, 유생, 농민, 노비들이 의병장을 중심으로 부대를 편성하고 작전지역을 넓혀 갔다. 의병은 향토지리에 익숙했고 정면충돌보다는 매복, 기습 등의 유격전술을 구사했고 북인 출신들이 많았다.
② 의병장
함경도의 鄭文孚(정문부), 묘향산 休靜(휴정, 西山大師), 평안도의 曺好益(조호익), 梁山璹(양산숙), 황해도의 李廷馣(이정암, 전 연안부사), 장응기(張應祺), 박덕윤(朴德胤), 조광정(趙光庭), 강원도 금강산의 惟政(유정. 四溟大師, 松雲大師), 경기도의 홍언수(洪彦秀) 洪季男(홍계남) 부자, 禹性傳(우성전), 李軼(이일), 충청도의 趙憲(충청도)과 영규(靈圭), 경상도의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권응수(權應洙), 成安義)(성인의), 辛碑(신갑), 전라도의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김덕령(金德齡) 및 류팽로(柳彭老)가 유명하며 의승군도 있었다.
의승군(義僧軍) : 특수집단인 승려 의병
휴정(休靜:서산대사) : 묘향산에서 수천 명의 제자들로 승군을 조직하고 각 사찰에 격문을 보내 의병조직을 권유하고 한양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움
유정(惟政:松雲大師. 四溟大師) : 금강산(관동). 평양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움
의엄(義嚴, 본명 곽수언(郭秀彦)) : . 휴정(休靜)의 제자로서 황해도(해서)에서 500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왜적들과 싸웠고 승군을 모아 여주 파사성(婆娑城)을 늘려 쌓았고 도총섭 휴정을 대신하여 승군을 지휘함
처영(處英, 뇌묵대사(雷默大師)): 전라도 지리산 승병 1000명으로 기병하여 금산사에서 싸웠고 권율 휘하에서 행주산성 전투 참가
영규(靈圭) : 충청도에서 1000명으로 기병하여 청주성 방어사 이옥의 잔류군사와 의병장 중봉조헌이 이끄는 의병과 함께 합군(合軍)하여 청주성을 공략, 혈전에 혈전을 거듭한 끝에 청주성을 수복하고 금산전투에서 전사
원오(原悟) : 경상도에서는 승군을 모아 활약
다. 정유재란(丁酉再亂, 케이초의 역(慶長の役,けいちょうのえき))
⑴ 발발
임진왜란중 1594년 선조 27년 훈련도감(訓練都監)이 설치되었다. 화의 교섭이 결렬되자 1597년 선조 30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발하여 약 20만의 왜군이 상륙하여 원균(元均) 휘하의 수군이 칠천(漆川)˙고성(固城)에서 대패시켰다.
⑵ 명랑해전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1593년 2월 권율에게 행주대첩에서 패한 일본은 경상도로 물러나 명나라의 화의제안에 응했으나 무리한 요구로 화의가 결렬되자 재침하였으나 일시 수군이 기세를 부리다가 이순신에게 1597년 6월 명량에서 대패한 후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자대에 봉쇄되어 있다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군하였다.
⑶ 노량해전과 이순신 전사
이순신(李舜臣)은 철수하는 일본군을 1598년 11월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크게 격파하고 전사하였다.
라. 왜란의 결과
⑴ 조선
① 인적・물적 피해
많은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농촌이 피폐화되었다.
② 문화재 소실
景福宮(경복궁) 昌德宮(창덕궁)(동궐) 壽疆宮(수강궁), 불국사, 전주사고(全州史庫) 등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③ 명(明) 숭배 사상
재조지은(再造之恩, 나라를 다시 살려준 은혜)에 의한 명 숭배가 강화되었다.
④ 재정 궁핍
인구가 줄고 토지대장과 호적이 불타 조세와 요역 징발이 곤란해졌다.
⑤ 신분제 동요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급한 일정한 양의 곡식을 바치고 성명이 기재되지 않은 관직수여증인 공명첩(空名帖)과 조선 초기 이후부터 군량(軍糧) 등 재정 궁핍과 구호대책을 보조하기 위하여 미(米) 혹은 전미(田米)를 헌납하면 적합한 사을 주는 납속책(納粟策, 납속수직(納粟受職))은 신분제를 동요시켰다.
⑥ 외래작물의 전래
고추, 담배, 호박, 토마토 등 새로운 외래작물이 전래되었다.
⑵ 명
① 군대 파견으로 구력 소모가 컸다.
② 여진족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여 1644년 명・청교체를 이루었다.
⑶ 일본
① 토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에도막부(江戶幕府, 1603~1867)가 열렸다.
② 문화재 약탈, 포로를 통해 성리학, 도자가 문화(이삼평, 신당길)의 발전을 이루었다.
임진왜란에 대한 표현
*일본 : 분로쿠게이초노에키(文祿慶長の役).
북한 : 壬辰祖國戰爭
중국과 대만 : 萬曆朝鮮戰爭, 萬曆의役, 萬曆東征, 壬辰倭禍
1609년 기유약조(己酉約條) 광해군 1년 에도바쿠후부(江戸幕府, えどばくふ, 1603-1651)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とくがわ いえやす)에 통교허용
* 기유약조
① 쓰시마 도주에게 내리는 쌀은 모두 100석으로 한다.
② 쓰시마 도주의 세견선은 20척으로 한다.
③ 관직을 제수받은 자는 1년에 한 차례씩 조선에 와야 한다.
④ 조선에 들어오는 모든 왜선은 쓰시마 도주의 허가장을 지녀야 한다.
⑤ 쓰시마 도주에서 도서(圖書)를 만들어 준다.
⑥ 허가장 없는 자와 부산포 외에 정박한 자는 적으로 간주한다.
⑦ 왜관에 머무르는 기간을 쓰시마 도주의 특송선 110일, 세견선 85일, 그 밖에는 55일로 한다.
통신사(通信使(조선사절))
조선시대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막부장군(幕府將軍:足利・德川幕府 등)에게 보낸 공식적인 외교사절.
2. 광해군(光海君)
가. 광해군의 집권
1608년 선조 후궁 공빈김씨(恭賓金氏)의 소생인 광해군(光海君, 대북)은 혈통상으로 선조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소생 영창대군(永昌大君, 소북) 보다 불리했지만 왕위에 올랐다.
나. 전후복구 사업
⑴ 양안(量案)과 호적 정리
⑵ 사고 정비(史庫 整備)
⑶ 1608년 대동법(大同法) 시행
⑷ 1610년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 편찬
⑸ 국초에 간행한 문헌들의 재간행
⑹ 경덕궁(경희궁) 건설하고 창덕궁 재건
⑺ 호패(號牌)의 실시
다. 중립외교정책
⑴ 후금의 건국
광해군(1608~1623) 8년 1616년 누르하치(奴兒哈赤, 노아합적, Nurhachi, 天命帝, 1559년 ~ 1626년 9월 30일, 재위 : 건주여진 1583년 ~ 1616년, 후금 1616년 ~ 1626년))가 1616년 여진족을 규합하여 후금(後金)을 세우고 1618년 명나라에 선전포고했다.
⑵ 명나라의 파병요구
광해군 11년 1619년 후금을 치기 위하여 만주로 출병했을 때 명의 신종(神宗)은 재조지은(再造之恩, 망하게 된 것을 구해준 은혜)을 갚아야 한다는 협박과 조정 신료들의 아우성에 은 광해군은 마지못해 요동파병군 도원수 강홍립(姜弘立)과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 김응서(金應瑞, 金景瑞, 김경서), 조방장(助防將) 김응하(金應河, 1580~1619, 선천군수)에게 1만 3천명의 군사를 주어 원조케 하면서 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관형향배 觀形向背)고 비밀지시를 하였고 명군이 불리하자 강홍립(姜弘立)과 김응서(金應瑞, 金景瑞)는 후금에 항복해 버렸고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와 운산군수 이계종(李繼宗) 등 전사하였다. 또한 명의 모문룡(毛文龍)이 압록강 입구 가도(枷島)에 주둔하자 조선은 식량을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 후금과 친선을 도모하는 등거리 중립정책(equi-distance foreign policy)을 쓰면서 내치와 국방에 주력하는 실리정책을 전개하였다.
⑶ 중립정책
광해군은 강홍립을 통해 명과 후금 사이에 실리적인 중립외교정책을 추진했다.
⑷ 결과
그 결과 명에 파병했지만 광해군때에는 후금의 보복없이 지나갔다.
3. 인조반정과 호란
가. 인조반정(仁祖反正)
광해군 15년 1623년 능양군(綾陽君), 이서(李曙), 이귀(李貴), 김류(김鎏), 김자점(金自點), 이괄(李适), 신경진(申景禛), 심기원(沈器遠), 구굉(具宏), 구인후(具仁垕), 최명길(崔鳴吉), 최내길(崔來吉), 이중로(李重老),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 (나중 이괄의 난때 투항하여 자결) 등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와 폐모살제(廢母殺弟,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것)를 반정의 명분으로 삼아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류희분(柳希奮)등을 축출하고 능양군(綾陽君)을 인조로 추대했다.
나. 이괄(李适)의 난
⑴ 원인
인조 2년 인조반정의 공신으로서 2등공신에 책록되고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불만이 컸는데 1624년 음력 1월 22일 문회(文晦), 허통(許通), 이우(李佑) 등이 이괄과 이괄의 아들 이전(李旃), 韓明璉(한명련), 정충신(鄭忠信), 기자헌(奇自獻), 현집(玄楫), 이시언(李時言)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하였지만 역모의 단서는 찾지 못하고 이괄의 아들 이전(李旃)을 서울로 압송하기로 했다.
⑵ 경과
이괄은 이수(李邃, 이괄 동생), 이전(李旃), 한명련(韓明璉), 기익헌(奇益獻), 원종경(元宗慶)등과 함께 압송하려 온 사람들을 죽이고 1624년 3월 11일(음력 1월 22일) 항왜병 100명을 선봉장으로 하여 1만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3월 29일(음력 2월 11일) 이괄군은 한양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서 선조의 열 번째 아들 흥안군 제(興安君 瑅)를 왕으로 세웠고 인조는 공주 공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이괄은 장만(張晩)과 임경업(林慶業)과의 길마재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밀리기 시작하여 광주를 거쳐 이천까지 도망갔다.
⑶ 결과
4월 1일(음력 2월 14일) 이천에서 李适(이괄), 李邃(이수, 이괄 동생), 이전(李旃, 이괄 아들), 韓明璉(한명련), 한모(韓某), 원종경(元宗慶) 등 9명이 부하 韓明璉(한명련)과 함께 부하장수 奇益獻(기익현, 진도), 李守白(이수백, 거제), 李先哲(이선철, 남해), 李善述(이선술, 영해), 柳震楨(류진정, 금성)에게 살해되어 실패로 마무리되었다.
⑷ 영향
이괄의 난은 대내적으로 수도의 함락, 국왕의 몽진(蒙塵, 공주) 등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공신세력 내부의 갈등의 노골화, 어영청 등 군영재편을 초래했으며, 대외적으로는 한명련(韓明璉)의 아들 한윤(韓潤)과 한택(韓澤)이 후금으로 도망가 남침(南侵)의 야욕을 자극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의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1624년 인조 2년 摠戎廳(총융청), 御營廳(어영청) 설치
1626년 인조 4년 守禦廳(수어청) 설치
다. 정묘호란(丁卯胡亂)
⑴ 원인
인조반정후 서인은 친명반금정책(親明反金政策)을 펼쳤고 이괄의 난에 실패한 후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과 한택(韓澤) 형제가 후금에 투항하여 (姜弘立) 휘하로 들어가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의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자 명나라 정벌에 앞서 조선을 제압하여 배후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⑶ 경과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Hongtaiji,皇太極)은 광해군의 복위의 명분으로 1627년 1월8일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에게 광해군 복위의 명분으로 3만명으로 조선을 정벌하라고 명령하였다. 여기에는 한족 출신의 이영방(李永芳)(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을 공격했을 때 투항), 조선 출신의 강홍립(姜弘立, 1619년 심하(深河) 전역에 참전했다가 투항)과 한윤(韓潤)(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켰던 한명련(韓明璉)의 아들)도 포함하여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부대는 평산으로 쳐들어 왔다. 철산 용골산성의 정봉수(鄭鳳壽・1585∼1668)와 의주의 이립(李立), 가산 부근에서는 김여기(金礪器)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회군하는 적을 맞아 타격을 입혔다.
의주 : 의주목사 이완(李莞)은 사로잡혀 피살.
정주 : 정주(定州)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포위해 선천부사 기협(奇協)이 전사하고, 정주목사 김진(金搢)과 곽산군수 박유건(朴惟建)은 포로
안주(安州) : 평안병사(平安兵使) 남이흥(南以興)은 성 밖의 민가를 불태우고 싸웠으나 방어선이 붕괴되어 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남이흥은 부하들과 함께 불붙은 화약 더미 속으로 몸을 던져 순국
인조는 훈련도감과 어영군의 병력을 호위에만 투입
⑶ 결과
조정에서는 강화를 청해 형제 관계를 맺고 명에 사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철수하였다.
라. 병자호란(丙子胡亂)
⑴ 원인
후금은 1636년 조선에 사신을 보내 기존의 형제 칭호를 버리고 군신 관계를 맺을 것을 강요하는 국서에서 나라 이름을 청(淸)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임을 천명하였다. 조선 정부는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다’는 명분론으로 청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전론이 팽배하여 주전론은 金尙憲(김상헌), 洪翼漢(홍익한), 尹集(윤집), 吳達濟(오달제), 鄭蘊(정온), 李敬輿(이경여), 趙絅(조경), 兪棨(유계) 등이 주도하였고 주전론은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화친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척화론으로 선회하여 주전론으로 기울었다.
⑵ 경과
청은 홍타이지(태종)는 인조 14년 1636넌 12월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왕자와 비비은 먼저 강화도로 피난을 갔으나 인조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갔다. 산성에는 군량도 저고 구원병도 오지 않고 강확다 함락되어 왕자와 비빈들이 포로로 잡혀서 최명길 등이 주화파의 건의을 받아들여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삼전도(三田渡, 송파)의 청태종 진영에 나와 항복하여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를 맺고 청이 명을 공격할 때 원병을 파견할 것을 약속하였다.
⑶ 결과
청은 소현(昭顯)・봉림(鳳林)의 두 왕자와 김상헌(金尙憲), 강경한 척화론자들(평양서윤 홍익한(洪翼漢)・교리 윤집(尹集)・교리 오달제(吳達濟))을 인질로 데려갔다.
주화론 :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홍서봉(洪瑞鳳)
의병 : 박철산(朴鐵山)이 이끈 의병부대는 용강 부근의 적산에서 ‘의병산’으로 불리게 되었고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1642년(인조 20년) 명(明)과 연결하여 청(淸)을 치려고 계획하다가 실패하여 청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왔다.
1653년 효종(1649~1659) 4년. 네델란드인 Hendrick Hamel 표착 1667년 탈출하여 표류기 저술
나선정벌(羅禪征伐, 러시아 정벌)로 본 효종의 북벌 의지
1. 1654년 효종 5년 제1차 나선정벌(羅禪征伐)
중국 청(淸)나라를 도와 러시아를 친 싸움으로 당시 이 싸움에서 우리 군사는 헤이룽 강(黑龍江)까지 진출하였다.
청은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격퇴하려 하였으나 무기 수준에서 낙후되어 불가능함을 알고, 임진왜란 이후 조총을 사용하는 조선에 총수병을 요청하여 조선에서는 함경도 병마우후 변급(邊岌)에게 조총군 100명과 초관(哨官) 50여 명을 주어 지원군으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모란강(무단장 牧丹江) 상류지역의 영고탑(寧古塔/寧安)에 이르러 명안달리(明安達哩)가 이끄는 청군 3천여 명과 합세하여 북상하다가 혼동강(混同江, 송화강 중류 지점)상에서 러시아군을 만나 교전하였다(4월 28일). 결과 7일만에 적군을 패퇴시키고 조선군은 6월에 본국 개선하였다. 청은 조선 총수의 위력을 처음 경험하였다.
2. 1658년 효종 9년 제2차 나선정벌(羅禪征伐)
그 후 청나라는 단독으로 러시아군 거점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17대 효종 9년 1658년 다시 조선에 총수(銃手)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조선은 혜산 첨사 신유(申瀏)에게 총군 200명과 초관 60여명을 주어 다시 파견하였다.
신유는 영고탑에서 사이호달(沙爾瑚達)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와 합류하여 북상하였고, 흑룡강과 송화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스테파노프'의 러시아 군사와 접전을 벌였다(6월 10일). 10여 척의 배를 앞세우고 공격해 오는 러시아군에 총과 화전(火箭)으로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스테파노프를 포함하여 270여 명이 전사하였고 잔당 모두 패퇴 전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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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효종과 서인은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북벌 정책을 추진했는데 북벌이면 청나라를 정벌하거나 침략하여 땅을 회복해야지 정벌 대상인 청나라를 도와서 나선(羅禪, 러시아)을 정벌에 동참하는 것은 실제로 북벌 의지가 있었는지 서인 집권 강화를 위한 것인지도 애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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