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으로 기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이사야61:10)
설교제목: 애통하는 자 복이 있나니.
성경본문: 마태복음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애통을 싫어합니다.
울고 싶지 않습니다.
무너지고 싶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괜찮은 척하며 살려고 합니다.
버텨보려고 합니다.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살아보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약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너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패배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울음 대신 다른 것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애통 대신 다른 것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바쁘게 살아버립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사는 것처럼 삽니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즐거운 것으로 덮어버립니다.
괜찮다고 스스로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주님의 이 말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이 말씀, 이건 위로가 아닙니다.
이건 선언입니다.
언뜻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믿어지질 않습니다.
애통하는데 어떻게 복이 있습니까?
애통한다는 건 아프다는 것이고 슬프다는 것인데 말입니다.
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단호하게 말슴하십니다.
복이 잇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주님이 말씀하신 “애통”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애통은 그냥 힘들어서 우는 게 아닙니다.
상처받아서 괴로운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애통은 마음이 찢어지는 슬픔입니다.
존재가 무너지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그 애통이
상황 때문에 오는 게 아닙니다.
“나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 없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지금까지 하나님 없이 산것에 대한 극심한 후회와 회한.
이걸 깨달을 때 오는 애통입니다.
이걸 깨달을 때 오는 단장의 슬픔입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과 슬픔입니다.
여러분,
이 애통은 자기 연민이 아닙니다.
이 애통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나는 그래도 잘 살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서 보니까 나는 하나님 없이 살아왔고 나는 하나님 없이도 괜찮다고 생각했고 나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걸 비로소 보게 되는 겁니다.
그때 무너지는 겁니다.
그게 애통입니다.
성경에 이 애통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됩니까?
모든 것을 잃습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돼지우리에서 서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배가 고파서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깨닫습니다.
“나는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이었구나”
“나는 그 집을 떠나온 사람이었구나”
그 순간 무너집니다.
그게 애통입니다.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데 돌아가야 하는 마음, 면목이 없는데 그래도 가야 하는 마음, 그 애통이 그를 집으로 이끕니다.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했던 사람입니다.
절대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됩니까?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합니다.
그리고 닭이 웁니다.
그 순간 주님의 눈과 마주칩니다.
그는 더 이상 숨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 눈물은 단순한 후회가 아닙니다.
그는 그 순간 자기 자신을 봅니다.
나는 주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나는 끝까지 지킬 수 없는 존재였고 나는 결국 주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보게 된 겁니다.
그래서 무너집니다.
그래서 웁니다.
그게 애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탕자도 울었고 베드로도 울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애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세 단계를 거칩니다.
처음에는 아무 느낌이 없습니다.
죄를 죄로 느끼지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게 자각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면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마지막 단계가 필요합니다.
무너지는 단계 애통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을 붙잡으십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만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이 약속하십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위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위로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위로가 아닙니다.
말 몇 마디로 위로받는 것도 아닙니다.
상황이 나아져서 오는 위로가 아닙니다.
삶이 윤택해져서 느끼는 위로가 아닙니다.
이 위로는 하나님이 직접 오시는 것입니다.
곁으로 오십니다.
함께 하십니다.
붙드십니다.
탕자는 무엇으로 위로받았습니까?
집이 아닙니다.
음식이 아닙니다.
아버지입니다.
탕자에게 주어진 것은 집도 아니고 옷도 아니고 아버지였습니다.
그가 뒤로하고 길을 나섰던 그 아버지가 탕자에게는 주어진 것입니다.
아버지 자체가 위로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엇으로 회복됐습니까?
자기 결심 아닙니다.
자기 의지 아닙니다.
다시 찾아오신 주님입니다.
주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만나셨을 때 주님은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냥 동행하셨습니다.
그게 위로입니다.
그 주님으로 베드로는 회복된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위로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위로는 환경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위로는 하나님이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진짜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애통해야 삽니다.
무너져야 회복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온 자신을 애통하는 자만이 하나님으로 위로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애통하면 끝나는 줄 압니다.
무너지면 끝나는 줄 압니다.
주저앉고 울면 마지막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끝까지 버티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탕자는 돼지우리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통곡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무너뜨려 놓고 떠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돌아갈 때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아들 자격 없다…”
“문 앞에도 못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먼저 달려옵니다.
안아버립니다.
여러분, 그가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다시 찾아오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건 책망이 아닙니다.
다시 시작하자는 초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는 위로는
“괜찮아질 거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다릅니다.
“내가 왔다”입니다.
“내가 여기 있다”입니다.
“다시 함께 가자”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가 복입니다.
그 사람만이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서 “나는 너무 멀리 왔다” “나는 이미 늦었다” “나는 자격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 계십니까?
그 생각이 바로 애통의 시작입니다.
탕자는 돼지우리까지 갔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런데도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직 울지도 않았으면서 왜 포기합니까?
오늘 선택해야 합니다.
계속 괜찮은 척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질 것인가
하나님은 강한 사람 찾지 않으십니다.
무너진 사람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 찾지 않으십니다.
애통하는 사람 찾으십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한 번 무너지십시오.
오늘 하나님 앞에서 목놓아 울어 보십시오.
상황이 힘들고 고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지나온 과거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없이 내 멋대로 살아왔던 그날들을 기억하면서 한번 울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자리에서 위로가 시작됩니다.
그 자리에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온 자신을 애통하는 자만이, 하나님 자신으로 위로받습니다.
애통하는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감정적인 위로보다 더 깊고 찐한 주님의 위로가 우리 모든 성도님들께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이제 말씀을 기억하면서 찬양하겠습니다.
탕자처럼 방황할 때도 애타게 기다리는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이 내 맘을 녹이셨네....
[기도하십시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애통을 피하며 살아왔습니다.
무너지지 않으려 했고, 울지 않으려 했습니다.
괜찮은 척하며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왔습니다.
주님,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없이 살아온 우리의 모습,
죄를 가볍게 여기며 지나온 시간들,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우리의 완고함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를 애통하게 하여 주옵소서.
탕자처럼 돌아가게 하시고
베드로처럼 무너지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주님을 다시 만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의 위로가 되어 주옵소서.
상황이 아니라
환경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
우리를 위로하여 주옵소서.
다시 찾아오셔서
다시 붙드시고
다시 세워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