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길을 찾다
(신 동욱)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보면 중세 수도원 도서관에 들어간 젊은 수련사가 감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책들이 서로 대화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수 세기에 걸친 속삭임, 만들고 쓴 자가 죽어도,
고스란히 살아남는 비밀의 보고였습니다."
그 독백은 작가 에코의 독백이기도 했습니다.
에코는 책 5만 권을 지녔던 장서가이자 독서광이었습니다. 집 서재에 들어선 그가 미로 같은 책장 사이를 몇 번이나 돌고 돌아, 찾던 책을 집어 듭니다. 그는 책에서 섭렵한 방대한 지식들로 스스로를 채운 도서관 그 자체였습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책이 없는 방은 영혼이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지닌 것을 모두 버려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면
책 덤이 속에서 죽겠다"고 했지요.
한국인에게 한국을 깨우쳐준 기자 이규태의 집 지하실은
책 만5천 권이 들어찬 '한국학 벙커'였습니다.
그는 세상을 뜨기에 앞서
"저 책들을 누군가 활용해줘야 할 텐데"라며 애를 태웠답니다.
그가 남긴 책 중에 절반, 7천여 권은 모교 연세대가
'이규태 문고'를 꾸려 소장하고 있습니다.
고인이 알면 서운해 할 일이지만 요즘 책이 겪는 수난을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이른바 베이비 부머 세대가 대거 은퇴하면서 평생 책을 가까이해온 애서가들이 책을 처리하느라 쩔쩔맨다고 합니다.
공공 도서관과 대학 도서관들이 더는 책을 둘 곳이 없어서
기증받는 책을 '발간된 지 5년 이하'로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전국 도서관에서 폐기되는 책도
백 65만 권까지 늘어났다고 합니다.
헌책방도 손님이 크게 줄자 헌책도 가려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헌책의 요람이었던 청계천 헌책방거리만 해도
20여 년 전 백 곳을 넘던 게 이제 열일곱 곳만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독서인구가 갈수록 주는 데다 그나마 전자책과 오디오 북에게 시장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마존 CEO 베이조스가
"책은 죽지 않는다. 다만 디지털화할 뿐" 이라고
한 게 실감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매끈한 디지털이 영원히 흉내 내지 못할 것들이 있습니다.
책장이 접히고, 밑줄 치고, 메모하고,
갈피엔 클로버 눌린 자국,
표지엔 세월에 바랜 흔적
그리고 쿰쿰한 책 냄새….
책에는, 책장을 넘기며 울고 웃고 가슴 뛰던
그때 그 삶의 체온이 스며 있습니다.
그런 책을 차마 어떻게 종이 쓰레기로 배출할 수가 있을까요.
저 역시 이사할 때마다 한 무더기씩 책을 내다 버리는 게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한 해의 끝을 바라보면서 뭔가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책이 포함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종이책은 영원하다"고 단언했던 움베르토 에코를 믿고서 말이지요.
11월 29일 앵커의 시선은 '책에서 길을 찾다'였습니다.
신동욱 기자(tjmicman@chosun.com)
(신동욱 앵커의 시선)
입력2022.11.29. 오후 9:50 수정2022.11.30. 오후 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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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7. 17 청계산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