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양소은 시인
기억의 수심
묵음의 창가
한참 앓았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잊고 싶을 때 그 사람을 가장 소망한다는 것을,
비 내리는 토요일,
빗방울이 둥글게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내가 나를 찾아 그림자로 떠도는,
묵음의 서정처럼.
빛과 그림자의 틈
안녕!
그녀는 토요일 저녁 대한항공을 타고, 버지니아 스프링필드의 토요일 아침에 도착했다. 하루 동안 사계절의 모습이 펼쳐지는 낯선 봄이었다. 익숙하게 맞이하는 토요일이었지만, 초면처럼 다가온 날씨가 시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목련이 피고 있었고, 초겨울 바람은 목젖을 떨고 있었다. 붉은카디널 새의 노랫소리를 찾아 하늘을 올려다보면, 햇살이 이마에 만개하던 한여름 오후였고, 나무 그림자 속으로 여우가 사라지는 가을밤이었다.
도로 건너, 오래된 일기장처럼 호수가 숨을 고르고 있었다. 비탈진 언덕의 잔디는 추운 겨울을 보낸 삶의 견고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호수 속에서 풍경들이 숨바꼭질하고 있었다. 젖은 일몰을 바라보던 늙은 백인 남자는, 어느 곳에 두고 온 자신의 그림자를 찾는 듯 말없이, 눈빛이 길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페이지를 넘기다 기억에 닿으려는 순간처럼, 담배 연기가 뒤엉킨 원고지 같았다.
그녀는 인공호수를 지나 숲속으로 들어섰다. 이곳에 온 뒤로 익숙하게 밟아온 길이었지만, 길 끝마다 처음 보는 듯한 낯선 갈래가 이어졌다. 가지들은 허공 깊이 뿌리를 내린 듯 서로 얽혀 있었다. 벤치에 앉아 호수 건너의 스위스풍의 집들을 바라보았다. 나무에 가려 윤곽이 드러나려면 한참을 들여다봐야 하는 집들. 시간의 결을 따라 사람들은 조용히 오가고 있었다.
나무 계단을 지나 여자가 걸어왔다. hello. 그냥 스쳐 가면 좋았을 인사가, 발목을 잡듯 붙들었다. 무슨 뜻인지 모를 말들이 쉼 없이 흘러나왔고, 그 사이 표정이 겹겹이 쌓였다. 친절한 나라, 그러나 총이 있는 나라. 아직은 경계 속에 선 이방인인 그녀는, 이유도 모른 채 달아나고 싶었다. 저의 없는 눈빛과, 그 너머의 알 수 없는 의도가 겹쳐 두려움이 번졌다. 보이는 얼굴 속 보이지 않는 무언가 앞에서, 달아나는 마음을 숨긴 채 보기 좋은 웃음만 짓고 있었다.
순간은 나오지 않는 아무 말도
비문의 웃음이 되고,
아찔한 깊이로 가라앉는
파편,
웃음은 스스로 문법이 되고……
웃음은 존재의 무게를 지탱하는 힘일까. 상상해 봐. 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소멸과 운명은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그녀는 문득, 상황에서 한 걸음 비켜서기 위해 오래된 이야기를 떠올렸다. 책에서였는지, 누군가에게 들은 건지 확실치 않은 이야기였다.
"한 남자가 맹장 수술을 받았어. 병상에 누워 있는데 의사가 와서 말하는 거야. 제가 건망증이 심해서 뱃속에 메스를 두고 봉합을 했습니다. 지금 바로 수술을 하셔야 합니다. 남자는 수술을 받고 병실에 누워 있었어. 그런데 잠시 후 담당의사가 다시 말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제가 뱃속에 실수로 가위를 두고 봉합을 했습니다. 지금 바로 수술을 하셔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남자가 깜짝 놀라며 말했어. 차라리 지퍼를 달아라 지퍼를"
그리고 그녀는 다시 침묵으로 돌아갔다. 그 후, 고통처럼 여자는 자꾸 나타났다. 숲속 갈림길에서, 호수 앞에서, 환영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여자로부터 언제쯤 달아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녀 안에 여자가 있는지도 몰랐다. 늘 다가와, 때로는 거울처럼 그녀를 비추는 존재. 혹시 꿈속에서 말을 걸기 시작했던 건 아닐까. 아니, 처음부터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답을 얻지 못한 그날은 언제나, 혀끝에서만 맴돌았다. 마치, 누군가를 떠돌다 문장 속 한 글자를 지운 산문처럼
바다 끝의 겨울
심해의 고독한 고요 속에서 그는 낚싯대를 들어 올렸다. Norfolk의 바닷가에, 생의 불꽃처럼 랜턴 불빛 하나 떠 있었다. 불빛의 경계 바깥에서 파도가 출렁거렸다. 낚싯대 방울 소리는 마음 깊은 곳을 흔들었고, 빈 바늘 끝에는 삼십 년 전의 목소리와 웃음, 그리고 따뜻했던 손짓 하나가 꿰어져 있었다. 시간은 신이 만든 거미줄이라지. 영원의 실에 걸려 끝나지 않는, 마음의 길 위에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줄을 던질 때마다, 그는 찢기고 부서진 한 사람처럼 자신을 깊은 바다에 밀어 넣었다. 어둠 위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굵은 눈송이들이 행성과 행성처럼 반짝이며, 돌아가고 싶은 그 겨울의 안부를 전하고 있었다.
비의 경계
그때도 비가 내렸지.
그녀는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손끝에 닿는 빗방울이 문장처럼 흘러내렸다. 잊지 못한 기억들이 행간 사이로 스며들었다. 떠나온 그곳도 토요일이었고, 돌아온 잿빛의 인천도 토요일이었다. 그러나 버지니아의 토요일과 인천의 토요일을 같은 이름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안녕!’과 ‘안녕?’, 의미가 다른 인사말처럼.
그녀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휴대폰을 들었다. 지현이예요. 그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을 잃어버린 줄도 모른 채, 그녀 또한 잊고 있었다. 그러나 꿈속을 걷듯 지현아, 지현아, 그녀의 이름만 부르고 있었다. 그녀를 훔쳐 간 또 다른 그녀의 이름을 찾아 헤매듯,
멀리서 보면
외투를 벗어놓은 것처럼
풀밭에 허물만 남은 매미
사라진 행방을 쫓을수록 기억은 조금씩 거대해졌다. 그 끝에서 그녀는, 비에 젖은 허물 속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예술가』 2025년 가을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