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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통사 > 북한역사학논저목록 > 제1부 북한의 역사학 연구 > Ⅲ. 고 대 > 삼 국 > 2. 고구려
1) 일 반
⑴ 개 관
리지린, 『고구려사연구』, 사회과학출판사, 1976.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편, 『조선전사 3(중세편-고구려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9.
채희국, 『고구려력사연구-고구려건국과 삼국통일을 위한 투쟁:성곽』, 종합대학출판사, 1985.
손영종, 『고구려사 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0.
손영종, 『고구려사 2』,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7.
손영종, 『고구려사 3』,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9.
과학백과사전출판사, 『조선고고학전서 3(중세편1-고구려)』,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91.
⑵ 사 료
김일출, 「진수의 ≪삼국지≫와 그 고구려전의 사료적 가치」, 『력사과학』 1957-3.
김래환·류택규, 「룡오리 산성에서 발견된 고구려 석각문」, 『문화유산』 1958-6.
손영종, 「중원 고구려비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5-2.
⑶ 인 물
조령출, 『온달전』, 문예출판사, 1984.
김원필, 『고주몽』, 금성청년출판사, 1986.
림왕성, 『을지문덕의 장검』, 금성청년출판사, 1987.
양철용 편저, 『온달전』, 평양출판사, 1989.
손영종, 『고구려시조 동명왕』, 사회과학출판사, 1992.
成海, 「조선명장론(연개소문장군 편)」, 『력사제문제』 4, 1948.
成海, 「조선명장론(을지문덕장군 편)」, 『력사제문제』 3, 1948.
김세익, 「연개소문의 정치 군사활동」, 『력사과학』 1965-1.
⑷ 기 타
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 민속학강좌, 『대성산의 고구려유적』, 김일성종합대학출판부, 1973.
정찬영, 『압록강·독로강 류역 고구려유적 발굴보고』,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3.
김용남, 「고구려사연구에서 고고학계가 이룩한 성과」, 『력사과학』 1980-4.
안병찬, 「장수산일대의 고구려 유적과 유물」, 『조선 고대 및 중세초기사 연구』, 교육도서출판사, 1992.
2) 정 치
⑴ 건 국
김일출, 「고구려 유국 900년설에 관하여」, 『력사과학』 1957-1.
류정준, 「자강도 내 원시유적 및 옛날 돈이 발견된 유적」, 『문화유산』 1958-5.
황철산, 「예맥(穢貊)족에 대하여⑴」, 『고고민속』 1963-2.
황철산, 「예맥(穢貊)족에 대하여⑵」, 『고고민속』 1963-3.
황기덕, 「두만강 류역 철기시대의 개시에 대하여」, 『고고민속』 1963-4.
리준영, 「고구려의 국가기원에 대하여-주몽 설화를 중심으로」, 『력사과학』 1964-4.
정찬영, 「초기 고구려 문화의 몇 가지 측면」, 『고고민속』 1965-4.
리병선, 「압록강 류역에서 철기시대의 시작」, 『고고민속』 1967-1.
김석형, 「고구려 시조 동명왕 주몽의 출생설화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4-1.
손영종, 「고구려 초기 일부 력사적 사실들의 년대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5-4.
손영종, 「고구려 건국년대에 대한 재검토」, 『력사과학』 1990-1.
강인숙, 「고구려에 선행한 고대국가 구려에 대하여」, 『력사과학』 1991-2.
손영종, 「고구려봉건국가의 형성과정과 그 초기발전」, 『조선 고대 및 중세초기사 연구』, 1992.
강인숙, 「구려국에 대하여」, 『조선 고대 및 중세초기사 연구』, 교육도서출판사, 1992.
박진욱, 「구려와 초기고구려의 유적유물에 대하여」, 『조선 고대 및 중세초기사 연구』, 교육도서출판사, 1992.
공명성, 「구려국의 성립에 대한 고찰」, 『력사과학』 1999-3.
⑵ 제 도
리지린, 「고구려의 령주제」, 『력사과학』 1967-5.
림종상, 「고구려에서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편성과정에 대하여⑴」, 『력사과학』 1979-1.
림종상, 「고구려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편성과정에 대하여⑵」, 『력사과학』 1979-2.
황병선, 「고구려 무관직의 등급과 임무」, 『력사과학』 1983-3.
손영종, 「고구려의 5부」, 『력사과학』 1984-4.
리승혁, 「고구려의 막리지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5-1.
리승혁, 「고구려의 대가·소가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6-2.
리승혁, 「고구려의 주·군·현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7-1.
리영식, 「집안부근 고구려무덤떼를 통하여 본 고구려 5부」, 『조선고고연구』 1995-4.
강세권, 「고구려 뇩살에 대한 고찰」, 『력사과학』 1998-4.
지승철, 「삼국시기 주·군·현 지방통치체계의 발전과정에 대한 간단한 고찰」, 『력사과학』 2001-1.
⑶ 군 사
전주농, 「고구려 시기의 무기와 무장⑴-고분벽화 자료를 주로 하여」, 『문화유산』 1958-5.
전주농, 「고구려 시기의 무기와 무장⑵-고분벽화 자료를 주로 하여」, 『문화유산』 1959-1.
김정현, 「고구려의 봉수체계에 대하여」, 『력사과학』 1978-3.
박진욱, 「고구려의 마구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6-3.
문병우, 「고구려군사제도의 특징」, 『력사과학』 1988-1.
박창수, 「고구려의 서북방 성방어체계의 위력」, 『조선고고연구』 1988-3.
박창수, 「고구려의 성분포와 서북방어체계」, 『력사과학론문집』 15, 1990.
손수호, 「무덤벽화를 통해 본 고구려행렬편성방법과 그 특징」, 『조선고고연구』 1993-3.
손수호, 「벽화무덤의 행렬도를 통해 본 고구려행렬의 특성」, 『조선고고연구』 1994-2.
손수호, 「고구려의 개마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7-3.
김청식, 「무덤벽화를 통하여 본 고구려사람들의 상무적 생활기풍」, 『력사과학』 1997-4.
강세권, 「고구려의 소국통합에 대한 력사적 고찰」, 『력사과학』 2001-1.
최승택, 「고구려 남부 부수도의 위성방어체계」, 『조선고고연구』 2000-4.
⑷ 도성 및 왕
황욱, 「고구려고도-평양성잡고」, 『문화유물』 1, 1949.
채희국, 「고구려 수도의 변천과 봉황성-환도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0-2.
윤국일, 「고구려 최고통치자의 황제적 지위」, 『력사과학』 1990-1.
한인호·리호, 「안학궁터 부근의 고구려 리방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1-4.
류렬, 「안악3호무덤의 주인공과 4세기 고구려의 남평양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 『력사과학』 1992-2.
한인호·리호, 「평양성 외성 안의 고구려 도시리방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 『조선고고연구』 1993-1.
리영식, 「고구려의 국내성천도 목적에 대하여」, 『력사과학』 1995-4.
손영종, 「고구려 왕세계와 왕호에 대한 왜곡을 비판함⑴-≪고구려사와 동아세아≫의 해당서술을 중심으로」, 『력사과학』 1996-1.
손영종, 「고구려 왕세계와 왕호에 대한 왜곡을 비판함⑵-≪고구려사와 동아세아≫의 해당서술을 중심으로」, 『력사과학』 1996-2.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고구려사연구실, 「토론:고구려 초기 왕세계와 실명왕의 이름에 대하여」, 『력사과학』 1997-3.
⑸ 대외관계(대중관계·대일관계·기타)
▶ 대중관계
리성순, 『수나라침략을 반대한 고구려인민들의 투쟁』, 조선로동당출판사, 1962.
『외래침략을 반대한 고구려인민의 투쟁』, 과학원출판사, 1974.
전준현, 「한나라 침략을 반대한 고구려인민들의 투쟁」, 『력사과학』 1967-5.
전준현, 「당나라침략자를 반대한 고구려인민의 투쟁(644-648)」, 『력사과학론문집』 4, 1973.
전준현, 「612년 고구려·수전쟁의 기본전선과 봉황성계선에서의 승리」, 『력사과학』 1980-2.
박진욱, 「쏘련 싸마르깐드 아흐라샤브궁전지 벽화의 고구려사절도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8-3.
강인숙, 「고구려·진(중국)관계」, 『조선 고대 및 중세초기사 연구』, 교육도서출판사, 1992.
강인숙, 「만리장성을 통하여 본 고구려·진(중국)관계」, 『력사과학론문집』 18, 1995.
▶ 대일관계
조희승, 「중부일본 시나노지방의 고구려소국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8-3.
손량구, 「고구려사람들의 일본렬도에로의 진출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9-2.
손량구, 「아스까사의 고구려적 성격」, 『조선고고연구』 1989-3.
조희승, 「고구려가 고대일본에 준 정치문화적 영향」, 『조선 고대 및 중세초기사 연구』, 교육도서출판사, 1992.
권기홍, 「일본 규슈지방 벽화계고분그림에 반영된 고구려적 성격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5-3.
권기홍, 「규슈지방 고분시대의 무덤에 반영된 고구려적 성격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7-2.
조희승, 「광개토왕릉비 신묘년의 왜 기사에 대하여」, 『력사과학』 1999-2.
▶ 기 타
최창빈, 「4∼5세기 전반기 삼국통일정책 실현을 위한 고구려의 투쟁」, 『력사과학론문집』 14, 1989.
최창빈, 「고구려는 대외관계에서 시종일관 자주권을 고수한 나라」, 『력사과학』 1993-1.
⑹ 영역·지리
리지린, 「수필:고구려의 서변」, 『력사과학』 1964-3.
손영종, 「612년 살수전투와 관련한 력사지리문제에 대하여⑴」, 『력사과학』 1979-3.
손영종, 「612년 살수전투와 관련한 력사지리문제에 대하여⑵」, 『력사과학』 1979-4.
박진욱, 「고구려 유주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0-4.
손영종, 「고구려의 남도 북도와 환도성의 위치에 대하여⑴」, 『력사과학』 1989-3.
손영종, 「고구려의 남도 북도와 환도성의 위치에 대하여⑵」, 『력사과학』 1989-4.
최창빈, 「4세기 말∼5세기 초 고구려의 국남7성과 국동6성에 대하여」, 『력사과학』 1990-3.
손영종, 「고구려의 령토확장과정에 대하여」, 『조선 고대 및 중세초기사 연구』, 1992.
손영종, 「5∼7세기 고구려의 서방과 북방 령역에 대하여⑴」, 『력사과학』 1993-2.
손영종, 「5∼7세기 고구려의 서방과 북방 령역에 대하여⑵」, 『력사과학』 1993-3·4.
손영종, 「고구려의 령토확장과정에 대하여」, 『력사과학론문집』 18, 1995.
최준경, 「6세기 초엽 고구려의 남방진출과 그 과정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지명고증에 대하여」, 『력사과학』 2000-2.
⑺ 기 타
전준현, 「670년에 재건된 고구려국에 대한 연구」, 『력사과학』 1982-2.
장국종, 「고구려에서의 도로발전」, 『력사과학』 1985-2.
리광희, 「고구려의 태녕년호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7-2.
3) 사회 경제
노정한, 「고구려에서의 토지소유관계」, 『삼국시기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토론집』, 1957.
정찬영, 「고구려의 사회경제적 성격에 대하여」, 『삼국시기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토론집』, 1957.
천석근, 「고구려 옷에 반영된 계급신분관계의 고찰」, 『력사과학』 1981-3.
리승혁, 「고구려의 봉건적 토지소유와 계급신분관계에 대한 연구」, 『력사과학론문집』 12, 1987.
최택선, 「고구려의 인물풍속도무덤과 인물풍속 및 사신도무덤 주인공들의 벼슬등급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8-1.
리태영, 「고구려의 철광업과 제철야금기술의 발전」, 『력사과학』 1990-2.
리승혁, 「고구려의 봉건적 토지소유 및 계급신분 관계」, 『조선 고대 및 중세초기사 연구』, 교육도서출판사, 1992.
손수호, 「벽화무덤을 통하여 본 고구려행렬의 등급」, 『조선고고연구』 1993-1.
4) 문 화
⑴ 개 관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고구려문화(1∼6)』, 사회과학출판사, 1972.
사회과학원, 『고구려문화』, 사회과학출판사, 1975.
⑵ 건 축
장상렬, 「자료와 연구:료동성탑」, 『고고민속』 1967-1.
리희선, 「안학궁의 터자리 복원을 위한 몇 가지 문제」, 『력사과학』 1980-1.
한인호, 「정릉사 건축의 평면구성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1-2.
안병찬, 「자료:새로 발굴한 고구려의 다리」, 『력사과학』 1982-3.
한인호, 「고구려건축의 력사적 위치」, 『고고민속론문집』 9, 1984.
한인호, 「자료와 연구:정릉사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6-3.
리화선, 「자료와 연구:고구려 금강사와 그 터자리 구성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6-4.
허철준, 「정릉사의 평면복원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몇 가지 고찰」, 『력사과학』 1986-4.
남일룡, 「황해북도 봉산군 토성리 고구려 절터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7-4.
한인호, 「고구려의 탑터와 관련한 몇 가지 문제」, 『력사과학』 1988-2.
김영숙, 「고구려무덤벽화에 그려진 기둥과 두공 장식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8-4.
리화선, 「벽화두공을 통해 본 고구려건축물의 두공」, 『조선고고연구』 1989-3.
장상렬, 「고층나무탑을 기본으로 하는 1탑 3금당식 사원건축형식의 력사적연원」, 『력사과학』 1990-2.
조선고고연구편집부, 「발굴소식:패엽사·쌍계사터 조사보고」, 『조선고고연구』 1993-2.
한인호, 「고구려건축의 특성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3-3.
전제헌, 「정릉사 행궁건물의 평면복원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4-4.
전제헌, 「정릉사 행궁건물의 원상복원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5-1.
한천섭, 「고구려무덤건축에서 단위자의 리용정형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7-2.
한문덕, 「고구려단청의 류형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8-2.
조선고고연구편집부, 「유물소개:고구려의 삼존불이 안치된 불당모형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8-2.
한천섭, 「무덤을 통하여 본 고구려의 돌가공과 리용에서의 우수성」, 『조선고고연구』 1999-2.
윤광수, 「고구려 마루기와의 변천」, 『조선고고연구』 2001-1.
⑶ 공 예
황욱, 「평양 청암리 토성 부근에서 발견된 고구려 금동유물」, 『문화유산』 1958-5.
채희국, 「학계소식:대성산에서 발견된 2좌의 소상에 대하여」, 『문화유산』 1959-4.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 고고학 연구실, 『고구려 기와무늬』, 과학원출판사, 1962.
문화유산편집부, 「유물소개:중앙력사박물관에 소장된 유물 중에서」, 『문화유산』 1962-6.
도유호, 「평천리에서 나온 고구려 부처에 대하여」, 『고고민속』 1964-3.
전제헌, 「발굴소식:대성산에서 나온 단지」, 『고고민속』 1965-2.
허순산, 「유물소개:고구려의 금귀걸이」, 『력사과학』 1985-4.
리준걸, 「새로 알려진 고구려와 발해의 금귀걸이」, 『조선고고연구』 1987-4.
조대일, 「고구려의 금속공예발전과 장공인들의 재능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8-4.
리광희, 「고구려무덤을 통하여 본 유약바른질그릇의 발생시기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0-4.
리광희, 「고구려시기 유약바른질그릇의 변천」, 『조선고고연구』 1991-1.
리일남, 「고구려 귀걸이의 형태와 기법」, 『조선고고연구』 1991-3.
리광희, 「고구려시기 질그릇들에 그려진 장식무늬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1-3.
리순진, 「강원도 철령유적에서 발굴된 고구려기마모형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4-4.
김영진, 「황해남도 봉천군 봉암리 고구려도자기가마터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7-4.
림창혁, 「고구려 소형금동불상의 몇 가지 형태상 특징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9-2.
림창혁, 「평천리 반가사유상의 연대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2000-1.
⑷ 예 술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 편, 『고구려 벽화무늬』, 과학원출판사, 1962.
전주농,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악기에 대한 연구⑴」, 『문화유산』 1957-1.
전주농,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악기에 대한 연구⑵」, 『문화유산』 1957-2.
주재걸, 「고구려에서의 군악대활동에 관한 연구」, 『력사과학』 1982-2.
주재걸, 「고구려사람들의 예술활동에 관한 연구-음악·무용을 중심으로」, 『고고민속론문집』 8, 1983.
주재걸, 「벽화무덤을 통하여 본 고구려의 교예」, 『력사과학』 1983-2.
⑸ 벽화 연구
문화보존지도국 사진장편집실, 『고구려벽화』, 문화보존지도국, 1979.
리준걸, 「덕화리 2호무덤의 별그림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1-1.
리준걸, 「28수를 다 그린 진파리 4호무덤」, 『력사과학』 1981-3.
리준걸, 「≪천상렬차분야지도≫에 대한 약간의 고찰」, 『력사과학』 1982-1.
리준걸, 「고구려 별그림의 특징」, 『력사과학』 1983-2.
리준걸, 「고구려벽화무덤의 별그림에 관한 연구」, 『고고민속론문집』 9, 1984.
리준걸, 「고구려 벽화무덤의 해와 달 그림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5-2.
한인호, 「고구려벽화무덤의 사신도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8-1.
김영숙, 「고구려무덤벽화의 구름무늬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8-2.
김영숙, 「고구려무덤벽화의 련꽃무늬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8-3.
리준걸, 「고구려에서의 천문학의 발전」, 『조선고고연구』 1989-3.
리경식, 「고구려무덤벽화에 적용된 립체표현수법」, 『조선고고연구』 1990-2.
손수호, 「고구려무덤벽화에 그려진 행렬도의 류형과 변천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2-3.
김혜숙, 「고구려벽화무덤에 그려진 수렵도의 류형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3-2.
김혜숙, 「고구려무덤벽화의 수렵도에 반영된 사냥도구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3-4.
김혜숙, 「고구려벽화무덤에 그려진 수렵도의 특징」, 『조선고고연구』 1994-3.
김성철, 「고구려무덤벽화에 그려진 사신도의 출현시기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7-2.
한천섭, 「고구려벽화무덤의 건축조형적 특성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7-4.
박준호, 「고구려벽화무덤에 그려진 장방생활도의 류형과 변천」, 『조선고고연구』 1999-4.
김성철, 「고구려사신도 무덤벽화의 류형과 그 변천」, 『조선고고연구』 2000-1.
천석근, 「동암리 무덤벽화의 남자머리쓰개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2000-2.
리영애, 「고구려무덤벽화무늬의 류형과 형식」, 『조선고고연구』 2001-2.
⑹ 생 활
최원희, 「고구려 녀자옷에 관한 연구」, 『문화유산』 1962-2.
송화섭, 「고구려인민의 무술 및 체력단련놀이」, 『고고민속론문집』 6, 1975.
천석근, 「고구려옷의 기본형태와 일본 고분시대 옷의 변천」, 『력사과학』 1981-1.
선희창, 「고구려 인민의 상무적인 생활풍습」, 『력사과학』 1981-3.
천석근, 「자료와 연구:안악 제3호 무덤벽화의 복식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6-3.
궁성희, 「고구려무덤들에 보이는 부뚜막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0-1.
⑺ 기 타
김사봉, 「유적소개:고산동의 고구려우물」, 『조선고고연구』 1986-1.
박진욱·안병찬, 「구월산의 단군사터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4-3.
강세권, 「동명왕사당에 대하여」, 『력사과학』 1994-3.
리광희, 「발굴소식:단동에서 발굴된 고구려 우물유적」, 『조선고고연구』1995-3.
5) 고 분
⑴ 일 반
고고민속편집부, 「용어:고임천장」, 『고고민속』 1966-3.
정찬영, 「고구려 초기 묘제의 유래」, 『고고민속』 1967-4.
정찬영, 「기원 4세기까지의 고구려묘제에 관한 연구」, 『고고민속론문집』 5, 1973.
리영식, 「집안 부근 고구려무덤의 분포상 특징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3-3.
리정남, 「고구려의 네모서리 돌출형 돌각담무덤에 대하여⑴」, 『조선고고연구』 2000-4.
리정남, 「고구려의 네모서리 돌출형 돌각담무덤에 대하여⑵」, 『조선고고연구』 2001-2.
⑵ 적석총
정찬영, 「고구려 적석총에 관하여」, 『문화유산』 1961-5.
석광준, 「평안북도 연산군 공포리 무덤떼 발굴 간략보고」, 『문화유산』 1962-1.
주영헌, 「고구려 적석무덤에 관한 연구」, 『문화유산』 1962-2.
리정남, 「운평리 고구려무덤떼 제4지구 돌각담무덤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1990-1.
리창언, 「최근에 조사발굴된 압록강 류역의 돌각담무덤들에서 주목되는 몇 가지 문제」, 『조선고고연구』 1991-3.
손수호, 「고구려돌각무덤의 분포상 특징」, 『조선고고연구』 1998-3.
손수호, 「집안일대 왕릉급 돌각담무덤들의 주인공 문제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9-2.
손수호, 「고구려 돌각담무덤의 등급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 『조선고고연구』 2000-3.
⑶ 석실봉토분(일반·유적조사)
▶ 일 반
채희국, 「고구려 석실 봉토분의 기원에 관하여」, 『문화유산』 1959-3.
도유호, 「고구려 석실 봉토분의 유래와 서역문화의 영향」, 『문화유산』 1959-4.
주영헌, 「고구려 봉토무덤의 기원과 그 변천」, 『고고민속』 1963-3.
주영헌, 「고구려 돌칸흙무덤의 연원」, 『력사과학』 1984-3.
리순진, 「락랑구역일대의 고구려돌칸흙무덤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0-4.
리창언, 「압록강 류역에서 고구려돌칸흙무덤의 발생과 년대」, 『조선고고연구』 1993-2.
손수호, 「고구려 돌칸흙무덤 류형분류에 대한 재고찰」, 『조선고고연구』 2001-1.
▶ 유적조사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안악 제1·2호분 발굴보고』, 과학원출판사, 1958.
도유호, 「안악에서 발견된 고구려고분들」, 『문화유물』 1, 1949.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자료편찬실, 「황해북도 은파군 대청리 1호분 발굴보고」, 『고고학자료집』 1, 1958.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자료편찬실, 「평안남도 은산군 남옥리 고분 발굴 보고」, 『고고학자료집』 2, 1959.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전야공작대, 「자료:대안리 무덤 발굴 보고」, 『고고민속』 1965-3.
장병협, 「발굴중간보고:수안군 산북리 고구려 무덤정리보고」, 『고고민속』 1965-4.
박창수, 「고구려시기의 마구일식이 드러난 지경동 무덤」, 『력사과학』 1977-3.
안병찬, 「학계소식:새로 발굴한 보산리와 우산리 고구려무덤」, 『력사과학』 1978-2.
최응선, 「석다리 돌칸흙무덤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4-2.
김재용, 「호남리 불당골 4호돌칸흙무덤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5-4.
최응선, 「새로 알려진 령천리 돌칸흙무덤」, 『조선고고연구』 2001-1.
⑷ 벽화고분(일반·안악3호분·덕흥리고분·동명왕릉·유적조사)
▶ 일 반
김용준, 『고구려 고분벽화연구』, 과학원출판사, 1959.
주영헌, 『고구려 벽화무덤의 편년에 관한 연구』, 과학원출판사, 1961.
주영헌, 「약수리 고분을 통한 고구려 벽화분의 년대에 관한 연구」, 『문화유산』 1959-3.
주영헌, 「고구려 벽화분의 편년 기준에 관하여」, 『문화유산』 1959-6.
주영헌, 「고구려 벽화무덤의 구조형식과 벽화내용의 변화 발전⑴」, 『문화유산』 1960-2.
주영헌, 「고구려 벽화무덤의 구조형식과 벽화내용의 변화 발전⑵」, 『문화유산』 1960-3.
전주농, 「토론:고구려 벽화무덤의 시원에 대하여」, 『고고민속』 1964-3.
주영헌, 「강좌:고구려 벽화무덤의 구조형식과 벽화내용의 변화 발전」, 『고고민속』 1965-4.
주영헌·박진욱·정찬영, 「고구려 무덤벽화의 특성과 그 문화사적 의의」, 『고고민속론문집』 6, 1975.
김종혁, 「수산리 벽화무덤과 다까마쯔무덤」, 『력사과학』 1985-2.
안병찬, 「보산리 및 우산리 고구려 벽화무덤의 년대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7-2.
최택선, 「고구려 사신도무덤의 등급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7-3.
최택선, 「고구려 벽화무덤의 주인공문제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7-4.
최택선, 「고구려 벽화무덤의 피장자에 관한 연구」, 『고고민속론문집』, 1988.
최택선, 「고구려 사신도무덤의 주인공문제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8-1.
리경식, 「고구려 무덤벽화 구도에서 공간의 리용」, 『조선고고연구』 1989-4.
▶ 안악3호분
황욱, 『안악 제3호분 발굴보고』, 과학원출판사, 1958.
사회과학원 고고학및 민속학연구소 고고학연구실, 『미천왕무덤』, 1966.
李如星, 「최근 안악에서 발견된 고구려고분의 벽화와 년대에 대하여」, 『력사제문제』 9, 1949.
김용준, 「안악 제3호분(하무덤)의 년대와 그 주인공에 대하여」, 『문화유산』 1957-3.
김용준, 「학계소식:안악 3호분의 년대와 그 주인공에 대하여」, 『문화유산』 1957-3.
전주농, 「안악 하무덤(3호분)에 대하여-그 발견 10주년을 기념하여」, 『문화유산』 1959-5.
전주농, 「최근에 발견된 고구려벽화 무덤」, 『문화유산』 1961-1.
전주농, 「다시 한 번 안악의 왕릉을 론함」, 『고고민속』 1963-2.
주영헌, 「안악 제3호 무덤의 피장자에 대하여」, 『고고민속』 1963-2.
박윤원, 「안악 제3호분은 고구려 미천왕릉이다」, 『고고민속』 1963-2.
박황식, 「미천왕 무덤(안악 제3호)의 건축구성에 대하여」, 『고고민속』 1965-1.
리순진, 「자료와 연구:새로 발굴된 오국리무덤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6-1.
박진욱, 「안악3호 무덤의 주인공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0-2.
박진욱, 「안악3호 무덤은 고국원왕의 무덤」, 『조선 고대 및 중세초기사 연구』, 교육도서출판사, 1992.
천석근, 「고국원왕릉벽화의 전각도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6-1.
▶ 덕흥리고분
박진욱·김종혁·주영헌·장상렬·정찬영, 『덕흥리 고구려 벽화무덤』,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허명, 「덕화리에서 발굴된 고구려 벽화무덤」, 『력사과학』 1977-2.
김용남, 「새로 알려진 덕흥리 고구려 벽화무덤에 대하여」, 『력사과학』 1979-3.
손영종, 「덕흥리 벽화무덤의 주인공의 국적문제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7-1.
박진욱, 「덕흥리 벽화무덤의 주인공과 유주의 소속문제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2-2.
손영종, 「덕흥리 벽화무덤의 피장자 망명인설에 대한 비판(1·2)」, 『력사과학』 1999-1.
▶ 동명왕릉
『동명왕릉과 그 부근의 고구려유적』,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6.
문화보존사, 『동명왕릉』, 문화보존사, 1993.
전제헌, 『동명왕릉에 대한 연구』, 사회과학출판사, 1994.
리철, 『민족의 력사적 재보 동명왕릉』,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4.
「학계소식:새로 발굴정리한 고구려 동명왕릉」, 『력사과학』 1978-4.
류정길·장춘빈, 「동명왕릉일대의 옛 자연환경」, 『조선고고연구』 1997-4.
리광희, 「동명왕릉 릉원형식의 대외적 영향」, 『조선고고연구』 2000-3.
▶ 유적조사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자료편찬실, 「평안남도 순천군 룡봉리 료동성총 조사보고」, 『고고학자료집』 1, 1958.
문화유산편집부, 「학계소식:기양 관개지구에서 새로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 『문화유산』 1958-4.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자료편찬실, 「평안남도 룡강군 대안리 제1호묘 발굴보고」, 『고고학자료집』 2, 1959.
채희국, 「평안남도 증산군 가장리 벽화고분 정리 간략 보고, 『문화유산』 1959-2.
주영헌, 「장산동 제1호 무덤 및 제2호 무덤에 관하여」, 『문화유산』 1962-6.
전주농, 「대동군 팔청리 벽화무덤」, 『고고학자료집』 3, 1963.
주영헌, 「약수리 벽화무덤 발굴보고」, 『고고학자료집』 3, 1963.
전주농, 「전동명왕릉 부근 벽화무덤」, 『고고학자료집』 3, 1963.
전주농, 「황해남도 안악군 복사리 벽화무덤」, 『고고학자료집』 3, 1963.
김종혁, 「수산리 고구려 벽화무덤 발굴 중간보고」, 『고고학자료집』 4, 1974.
김사봉, 「학계소식:봉성리 벽화무덤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0-2.
리일남, 「발굴 및 조사 보고:운룡리 벽화무덤 발굴 보고」, 『조선고고연구』 1986-2.
리동림, 「사진:동암리 벽화무덤의 일부 벽화 쪼각」, 『조선고고연구』 1988-2.
리창언, 「동암리 벽화무덤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1988-2.
조선고고연구편집부, 「실측도:동암리 벽화무덤 실측도」, 『조선고고연구』 1988-3.
한인호, 「평정리 벽화무덤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1989-2.
리창언, 「동암리 벽화무덤의 년대」, 『조선고고연구』 1989-3.
한인덕, 「월정리 고구려 벽화무덤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1989-4.
김사봉, 「고산동 20호벽화무덤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0-2.
정세앙, 「덕화리 3호무덤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1991-1.
한인호, 「환인지방에서 새로 발굴된 고구려 벽화무덤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2-3.
손수호, 「상왕가촌 벽화무덤의 성격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7-2.
⑸ 기 타
채희국, 『태성리 고분군 발굴보고』, 과학원출판사, 1959.
채희국, 「평양 부근에 있는 고구려시기의 무덤들」, 『문화유산』 1957-6.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자료편찬실, 「평안남도 대동군 화성리 쌍곽분 정리보고, 『고고학자료집』 1, 1958.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자료편찬실, 「황해북도 황주군 순춘리 상동 유적 조사 정리보고」, 『고고학자료집』 2, 1959.
전주농, 「강서군 태성 저수지 내부 유적의 정리」, 『문화유산』 1961-3.
정찬영, 「자성군 조아리·서해리·법동리·송암리·고구려 고분 발굴보고」, 『고고학자료집』 3, 1963.
백기하, 「고구려 무덤들에서 드러난 사람뼈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0-2.
라명관, 「발굴 및 조사 보고:평양시 상원군 일대의 고구려무덤 조사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1986-3.
박창수, 「발굴 및 조사 보고:평성시 지경동 고구려무덤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1986-4.
김사봉·최응선, 「안학동 로산동 일대의 고구려무덤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1988-4.
리준걸, 「룡흥리 고구려무덤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1993-1.
리준걸, 「금옥리 고구려무덤떼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5-3.
6) 성 곽
⑴ 도성(평양성·기타)
▶ 평양성
최희림, 『고구려 평양성』,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8.
채희국, 「평양 부근에 있는 고구려 시기의 유적-고구려 평양 천도 1500주년에 제하여」, 『문화유산』 1957-5.
전제헌, 「자료와 연구:대성산 못(池) 발굴 중간보고」, 『고고민속』 1964-3.
채희국, 「토론:평양성(장안성)의 축성 과정에 대하여」, 『고고민속』 1965-3.
정찬영, 「토론:평양성에 대하여」, 『고고민속』 1966-2.
최희림, 「평양성을 쌓은 년대와 규모」, 『고고민속』 1967-2.
최희림, 「고구려 평양성(장안성)의 성벽 축조형식과 시설물의 배치상태」, 『고고민속』 1967-3.
「새책소개:고구려 평양성(판형 4×6판)」, 『력사과학』 1978-1.
리화선, 「새로 복구한 대성산성의 남문」, 『력사과학』 1979-2.
리화선, 「고구려 평양성 외성 안의 리방의 형태와 규모 그 전개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9-1.
한인호, 「안학궁 부근의 고구려 수도 도시면모에 대한 복원」, 『조선고고연구』 1998-2.
남일룡·김경찬, 「청암동 토성에 대하여⑴」, 『조선고고연구』 1998-2.
안병찬·최승택, 「새로 발굴된 평양성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8-4.
남일룡·김경찬, 「청암동토성에 대하여⑵」, 『조선고고연구』 2000-1.
정봉찬, 「청암동토성에서 발굴된 석기」, 『조선고고연구』 2000-2.
남일룡·김경찬, 「청암동토성에 대하여⑶」, 『조선고고연구』 2001-2.
▶ 기 타
고고민속편집부, 「답사기:신원군 장수산성을 찾아서」, 『고고민속』 1966-1.
최창빈, 「학계소식:신원에서 고구려시기의 큰 도시유적 발견」, 『력사과학』 1985-4.
리승혁, 「장수산성의 축조형식과 년대」, 『력사과학』 1985-4.
안병찬, 「장수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유물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0-2.
최승택, 「장수산성의 축조년대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1-3.
최승택, 「장수산성 1호건물터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1-4.
김경삼, 「고구려 초기의 수도형식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8-2.
김순남, 「국내성 도읍시기 고구려의 종심방위성 체계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2000-2.
김순남, 「고구려의 초기 수도방위성 체계」, 『조선고고연구』 2000-3.
⑵ 산성(유적조사·기타)
▶ 유적조사
채희국, 「기행:태백산성(太白山城) 답사기」, 『고고민속』 1965-2.
김기웅, 「발굴보고:배천산성 답사보고」, 『고고민속』 1966-1.
「용어 및 과학지식:고구려의 성곽」, 『고고민속』 1966-1.
고고민속편집부, 「답사기:대현산성 답사기」, 『고고민속』 1966-2.
김기웅, 「자료와 연구:백마산성의 축조 경위에 대하여」, 『고고민속』 1967-2.
전룡철, 「유적소개:개성의 대흥산성」, 『력사과학』 1979-4.
최희림, 「황주성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2-2.
김기웅, 「안주성과 백상루를 쌓은 시기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2-3.
김기웅, 「고구려산성의 특성에 관한 연구」, 『고고민속론문집』 9, 1984.
최창빈, 「옹진고성(고구려 옹천성)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6-2.
김종혁, 「가응산성 조사보고」, 『조선고고연구』 1992-3.
김인철, 「온정리고성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4-2.
최승택, 「봉세산성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4-4.
남일룡, 「학성산성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4-4.
▶ 기 타
손량구, 「자료와 연구:태천군 롱오리산성을 쌓은 년대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7-1.
박창수, 「고구려산성의 위치 선정의 우월성」, 『조선고고연구』 1988-2.
박창수, 「427년 평양천도 이전 시기 고구려성들의 분포」, 『력사과학』 1988-4.
손수호, 「홀골산성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1-1.
7) 광개토왕릉비
박시형,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리지린, 「자료:광개토왕비 발견의 경위에 대하여」, 『력사과학』 1959-5.
박시형, 「강좌:광개토왕릉비」, 『력사과학』 1964-5.
김사억, 「서평 및 문헌해제:원사 박시형 저 ≪광개토왕릉비≫에 대하여」, 『력사과학』 1966-5.
김유철,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에 나타난 왜의 성격」, 『력사과학』 1986-1.
손영종, 「광개토왕릉비를 통하여 본 고구려의 령역」, 『력사과학』 1986-2.
손영종,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수묘인연호의 계급적 성격과 립역방식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6-3.
조희승, 「광개토왕릉비문에 대한 몇 가지 문제」, 『조선고고연구』 1987-3.
손영종, 「광개토왕릉비 왜 관계기사의 올바른 해석을 위하여」, 『력사과학』 1988-2.
채희국, 「광개토왕릉비문의 해석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8-2.
박진석, 「호태왕비문을 통하여 본 임나일본부의 존재여부문제⑴」, 『력사과학』 1989-1.
박진석, 「호태왕비문을 통하여 본 임나일본부의 존재여부문제⑵」, 『력사과학』 1989-2.
전대준,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숙신의 정체」, 『력사과학』 19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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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학계에서 나온 고구려 연구 논문 목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김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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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7.23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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