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우리詩 신인상 상반기 당선작
아버지 외 4편
조 봉 익
귀신은 담배씨만큼도 뵈지 않더라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쇳골배미 안산 초입으로 아버지 가신 후
어머니는 말문마다 아버지의 험담을 달고 살았다
썩을 놈의 영감탱이는
그녀의 단골 레파토리였다
해 저물어 끼니때가 되어도 꿩 궈 먹은 자리였다
밭일에 혼자서 허리가 끊어져도
수술한 무릎이 뻗정다리가 되어도
아버지는 윗목에 걸어논 가족사진 속에서
그저 노랗게 빛바랜 채
멀뚱멀뚱 염장만 지르는 영감탱이였다
집에 내려갈 때마다 밥상머리에서 풀어내는
푸념에는 이골도 나지 않았다
나는 무청김치에 더운밥을 뜨는 둥 마는 둥
맞아요 요즘 시대 귀신이 어디 있겠어요
맞장구 치고 얼른 일어나 내빼기 일쑤였다
그러던 사이 진달래도 연분홍 물이 빠지고
찔레꽃이 무리지어 화톳불 놓던 어느 날이었다
전화기 속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모처럼 밝았다
쇳골배미 못자리의 물꼬가 터져
어찌어찌 개울 따라 내려가긴 했을 터
어머니는 뻗정다리 주제로 되짚어 오르기는 도저히 난망했다
제풀에 주저앉은 그녀는 아버지 산소를 향해
영감! 영감! 나 좀 살려주시오!
한참을 퍼지른 채 눈물바람이었는데
느닷없이 넷째아들이 등 뒤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동생은 불현듯 아버지의 산소가 보고 싶어
내친 김에 뛰어왔고 말이다
전화기 속에서 아버지는 찔레꽃귀신이 되어
찔레꽃보다 환하게 웃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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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에서
무성한 잡풀 거느린 고향집
그리고
허물어진 담장
흐흐흐
흐흐흐
수북한 망초꽃이 웃는다
이빨이 보이도록 웃는다
웃다가
웃다가
엎어지고 뒤집혀
되살아 일어나는 기억들
어디선가
나비 한 마리 날아와 날개를 접고
기운 처마 끝엔 거미가 줄을 늘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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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참았던 숨이 터진다
정색을 하고 노려보는 그녀의 눈초리가 매섭다
헤어지기 전의 히스테리성 심술이다
이미 정 떨어진 탓인지
그녀의 숨소리에서 쌩쌩 쇳소리가 난다
누군가 만날 것 같은 기대가 설레는 날이다
정면으로 그녀의 응시에 맞선다
은근 슬쩍 시도하는 이별의 통지다
그녀는 매정하였다
성깔도 너무 거칠었다
순백의 초상화에 얼을 빼앗긴 환상도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녀와 나는 맞지 않았다
헤어지는 데에도 미숙하다
언제나 하는 이별이지만 항상 그렇다
그녀는 직설적으로 마지막 앙탈을 부리기 일쑤이고
나는 혹시 터지는 숨소리 있을까 귀 기울인다
숨소리가 터지면 맑은 울림이 있다고 한다
추위에 밟혀 떠는 나무들의 영양실조가
거뜬히 치료된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숨들이 터지는 날이다
그녀에 대한 반기인지
참았던 숨들이 터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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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에게
그래! 울어라
울고 싶으면 울어라
살다 보면 그렇게 하얀 눈물 흐르는 날이 있단다
이혼한 남편이 장가갔다고?
새로 생긴 애인이 다른 여자에게 가버렸다고?
터지는 눈물 막을 길이 없으면
슬픔도 솜처럼 하얗게 부풀기도 하나 보다
바람이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두려운 이 벌판을 달아나기에 바쁘다
멀리 떠나야 할 것들을 떠나보내는 아픔이 터지고 있다
하긴 우리 어머니 홀로 되어
차마 흘리지 못하는 눈물 꾸욱 참아 누르며
하늘이 맑아 가슴 트이는 곳이 있다면
바람이 맑아 가슴 쓸어갈 수가 있다면
울고 또 울어
하얗게 터져 피고 싶다고 하셨지
그래! 울어라
마음껏 소리 내어 울어버려라
울어서 눈물의 멍울 풀어진다면
치욕으로 변한 사랑까지도 그리움이 되는
그런 세상이 열리지 않겠니
펑펑 울어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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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大雪
2012년 12월 5일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
눈이 발목까지 쌓이면서
도로는 하얗게 아수라장이었다
설설설雪雪雪 설설설雪雪雪
내리는 눈발 속에서
버스며 승용차며 트럭이며
설설설 설설설
죄도 없이 무릎 꿇고 기어다녔다
날리는 설雪들 속에서
세상이 하얗게 개벽을 하였다
퇴근을 하고 저녁을 먹는데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도
설說들이 하얗게 날리고 있었다
설설설說說說 설설설說說說
대설주의보도 없이 쏟아지는
대선주자들의 흰빛 공약들
이제 민주국가의 시민들이
설설설 설설설
죄도 없이 무릎 꿇고 기어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날리는 설說들 속에서
세상도 하얗게 개벽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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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난정(蘭丁)과 누차에 걸쳐 의논한 끝에 오명현과 조봉익 두 사람에게 <우리시회>의 이름으로 시인의 관을 씌우기로 했다. 이 분들은 수년에 걸쳐 <자연과 시의 이웃들>을 통해 시를 연찬해 오는 과정에서 충분한 검증을 거친 시인들이다. 은관시인의 자격을 이미 취득했고 금관시인을 향해 정진하고 있는 유능한 이들이다. 따라서 굳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이미 시단에 데뷔한 것으로 인정이 되지만 <우리詩>를 시단 활동의 발판으로 마련해 주고자 번거로운 절차를 밟게 된 것이다.
오명현은 위트와 날카로운 센스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시 속에 재미를 담을 줄 안다.「결투」「은행을 털다」「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등에서 그의 이러한 재능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얄팍한 재미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의 비애에까지도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죽음을 다루고 있는 「이명」이나, 피안을 눈앞에 두고 있는 환자를 그린 「목선」은 만만치 않은 서정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으로 크게 기대가 된다.
조봉익의 작품 세계의 특징은 토속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고향과 가족이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아버지」와「빈집에서」가 이러한 특징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사물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다. 한편, 추운 겨울을 매서운 여인으로 의인화한 「입춘」, 억새를 통해 여인의 한을 풀어내는 「억새에게」, 내리는 폭설(暴雪)과 입후보자들이 쏟아내는 공약의 폭설(暴說)을 풍자적으로 대비시킨「대설」들은 소재를 다루는 시인의 능력을 충분히 확인시켜 주는 가작들이다.
이들은 동문수학한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등단의 자리를 같이 해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함께 추천키로 한 것이다. 인제는 자신의 문명을 걸고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길에 들어섰으니 더욱 정진하여 세상이 크게 감동하는 좋은 작품들을 많이 출산해 내기 바란다. 문운을 빌며 축하의 말씀도 아울러 적는다.
임 보 홍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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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솔직히 무거운 마음이 앞섭니다.
시를 공부하는 중에 한 번도 열정을 느껴보지 못하였다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열정을 쏟지 아니하고 게으름만 피웠습니다. 그래서 더운 마음이 무겁습니다.
봄이 아름다운 것은 추운 겨울을 이겨내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내 인생에 있어서 봄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항상 현실에 안주한 채로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열정을 쏟아보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한다는 의무감도 듭니다. 저를 뽑아주신 분들에게도 그것이 도리겠지요.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시는 이유는 먼 길 포기하지 말고 꿋꿋이 나아가라는 격려로 생각합니다. 더욱 더 분발 하겠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임보 교수님, 홍해리 이사장님, 그리고 손현숙 오태환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시인의 길이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르지만 부끄러움 없이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덕성시원과 백운시회, 늘푸른 아카시아 회원들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조 봉 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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